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74
1374회. 추모의 의미로 한마디 해 줬으면 하는데, 괜찮겠지?
뜻하지 않은 비보에 놀라고 당황스럽기는 엘리오도 마찬가지였다.
“아드리아 왕국 상황이 그 정도로 나빴나?”
총병과 엑시티움의 결합으로 제국군은 천하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때 쉐이드 왕국을 수복했던 남부 왕국군이 또다시 아드리아 왕국까지 밀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파비안이 먹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크라시온 성에 있던 예비 부대까지 다 끌어다 썼을 겁니다.”
귀족 사회의 음험함을 알고 있는 그조차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아드리아 왕국은 위태로웠다.
“어떻게 할래? 무덤을 찾아가 참배하겠다면 데려다주고.”
엘리오가 파비안을 힐끔 보았다.
한 사람 정도는 구룡번신(九龍翻身)으로 이동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파비안이 씁쓸한 얼굴로 답했다.
“아닙니다. 소피아 남작과 정이 깊은 것도 아니고……. 무덤을 봐서 뭐합니까.”
“그래도 한번 들여다보기는 해야 하지 않냐?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
“지금 가 봐야 기분만 더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럽니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보다 한번 이상한 기분 맛보는 게 더 낫다.”
거듭된 엘리오의 권유에 파비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아이까지 임신했던 여자를 끝까지 모른 척하기는 어려웠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북구 외곽 인적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엘리오는 한 손으로 파비안의 허리를 둘러 안고 하늘로 솟구쳤다.
공중에서 아홉 번이나 자리를 옮겨 다니던 두 사람의 신형이 어느 순간 ‘퍽!’ 하고 사라졌다.
***
남부 아드리아 왕국.
쿠스코 성.
초저녁, 쿠스코 성의 정원으로 두 명의 남자가 떨어져 내렸다.
엘리오와 파비안이다.
구룡번신에 익숙한 엘리오와 달리 파비안은 어지러운지 잠시 비틀거렸다.
“괜찮냐?”
“예,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아서 그런가 어질어질하네요.”
“처음이라 그러지 몇 번 하면 느낌도 없다.”
이윽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쿠스코 성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 중이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 일행은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몇 달 전에 엘리오가 예고 없이 다녀간 뒤로 그러려니 하게 된 것이다.
인사를 나눈 뒤 엘리오와 파비안이 자리에 앉자 하워드가 급히 물었다.
“음식을 더 가져오라고 할까요?”
그러자 엘리오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우린 조금 전에 점심을 먹었어. 그냥 와인이나 마시면 돼.”
“아, 예.”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하워드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앉았다.
‘파비안 형님을 데리고 온 걸 보면 역시 그 일 때문이겠지?’
쿠스코 성에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의 전사 소식이 전해진 건 오늘 아침이다.
아드리아 왕국 정보부에서 마법 통신으로 제도의 정보원들에게 연락하겠다고 했으니, 그 소식을 듣고 온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묵묵히 와인 한 잔을 비운 뒤 말했다.
“하워드, 우리는 조금 전 소피아 남작의 전사 소식을 전해받았다. 그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
“한 달쯤 전 스컬 군단 지휘부에 마력포가 떨어져 사상자가 제법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 일로 참모 숫자가 비자 스컬 군단에서 파견 나간 참모들을 불러들였는데, 실무 선에서 급하게 처리하다 보니 소피아 남작한테까지 명령서가 보내졌던 모양입니다.”
“라울 국왕은 그걸 보고만 있었고?”
“소피아 남작이 크라시온을 떠나고 보름 뒤에야 알았답니다. 뒤늦게 스컬 군단에 ‘소피아 남작의 크라시온 전출 명령서’를 보냈는데……. 전령이 도착하기 전에 전사했다고 합니다.”
엘리오는 더 묻지 않았다.
스컬 군단의 일 처리가 조금 아쉽지만, 전쟁 중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까닭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파비안이 입을 열었다.
“시신은?”
“페로무로스 인근 전사자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들었습니다.”
파비안이 씁쓸한 얼굴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돌아보았다.
“라고아 경, 저는 내일 아침 페로무로스로 가 보겠습니다.”
“같이 가자.”
그러자 하워드와 크레아도 한마디씩 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요.”
엘리오가 애매한 얼굴로 하워드와 크레아를 보았다.
가겠다는 사람이 늘어나면 역마차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말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오마르 백작까지 가세하자 엘리오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 같이 역마차를 이용하기로 하죠.”
그렇게 해서 엘리오 일행의 페로무로스행이 확정됐다.
다음 날.
엘리오 일행이 쿠스코 성을 떠나자 집사장은 급히 왕궁으로 달려갔다.
집사장에게 엘리오 일행의 행보를 들은 라울 브로스넌 국왕은 급히 재상을 불러들였다.
“어젯밤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클라우드 남작이 쿠스코 성을 찾아왔다는군. 정보부를 통해 소피아 남작의 전사 소식을 전한 지 반나절도 안 되는데……. 클라우드 남작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마법의 경지가 보통이 아니야. 메가 텔리포트를 쓸 정도면 최소한 7서클이라는 소린데……. 끔찍하군, 끔찍해.”
라울 브로스넌 국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국 황제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백작 작위를 하사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재상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고아 백작이 쿠스코 성에 있습니까?”
“아침 일찍 쿠스코 성의 손님들과 페로무로스행 역마차를 탔네. 페로무로스 전투의 전사자 묘지를 찾아가고 있다는군. 재상은 사이하 자작만 조심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클라우드 남작은 물론이고, 라고아 백작과 오마르 백작까지 무덤을 찾아가고 있어. 이제 어쩔 셈인가?”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들의 행보는 예상하지 못했으나, 소피아 남작의 전사에는 한 점의 의혹도 없습니다.”
“사이하 자작은? 그의 입단속을 하지 않아도 되겠나?”
“소피아 남작을 사지로 넣은 사람이 사이하 자작입니다. 처벌이 두려워서라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처음부터 그 계획을 반대했네. 그걸 밀어붙인 건 그대일세.”
위기를 느낀 라울 브로스넌 국왕은 모든 걸 재상의 탓으로 돌렸다.
그런 국왕의 태도에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은 화가 났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자칫 국왕과 척을 지게 되면 자신이 정말 모든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 페로무로스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명씩 전사자가 쏟아져 나옵니다. 설사 라고아 백작의 재주가 하늘에 닿았다 해도 그 이상은 알아낼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마옵소서.”
“나는 모르는 일이니 알아서 하게. 다만 사이하 자작이 목 안의 가시처럼 자꾸 신경 쓰이는데, 이대로 방치해 둘 생각인가?”
그 또한 죽이라는 소리였다.
뻔뻔한 국왕의 말에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아니 씨발! 누굴 병신으로 아나. 반대했다, 모른다고 하면서 왜 자꾸 죽이라 하십니까!’
하지만 재상은 그 말 대신에 국왕이 원하는 답을 했다.
“라고아 백작 일행이 돌아가는 대로 깔끔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참,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네. 마젠타에게서 연락이 왔어. 엑시티움과 비슷한 성능을 가진 무기를 완성했다는군. 남부 왕국들에 연락해 재정을 확보해 두게.”
“양산은 언제 된다고 합니까?”
“제작 설비를 미리 해 두었다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제국군의 보급이 거의 다 끝나 간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제국군이 다시 움직이면 크라시온 성까지 금방 도달할 겁니다.”
“무기 인수에 비공정을 동원한다 해도 두 달은 걸릴 걸세. 안타깝지만 지금은 제국군을 저지할 수단이 없어. 크라시온 성을 비울 준비를 해 두도록 하게.”
“예…….”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은 침통한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
페로무로스 북서부.
소도시 세르보.
크라시온 성을 출발한 역마차는 닷새 후 세르보에 도착했다.
역마차 사무소에서 내린 엘리오 일행은 물어물어 스컬 군단 주둔지를 찾아갔다.
엘리오는 감회가 새로웠지만 파비안을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르보는 파비안과 소피아 남작이 처음 만난 도시인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파비안의 표정은 전에 없이 어두웠다.
스컬 군단 주둔지는 한눈에 보아도 피폐했다.
찢어진 막사에, 길에는 마력포 떨어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초소의 연락을 받았는지 지휘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가장 선두에 있던 디폰 코넬리아 군단장이 반색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라고아 백작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마르 백작님도 함께 오셨군요.”
엘리오와 오마르 백작이 미소 지으며 가볍게 묵례를 했다.
디폰 코넬리아 군단장은 이내 흥분을 가라앉혔다.
“저희 군단 상황이 좋지 못해서……. 면목 없게 되었습니다. 일단 지휘 본부로 안내하겠습니다.”
돌아선 디폰 코넬리아 군단장이 반파된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입구에서 참모들이 파비안과 하워드, 크레아의 앞을 막았다.
그러자 파비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입니다.”
그 말에 참모들은 멈칫하더니 이내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소피아 남작과 클라우드 남작의 관계는 스컬 군단에서 유명한 때문이다.
그러나 하워드와 크레아는 입장을 허락받지 못했다.
남겨진 두 사람은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분위기에 눌려 툴툴거리지 않았다.
엘리오와 오마르 백작, 파비안이 자리에 앉자 디폰 코넬리아 군단장은 참모장 이코프 사이하 자작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코프 사이하 자작이 앞으로 나와 ‘소피아 남작 전사 경위 보고서’를 또박또박 읽어 나갔다.
큰 맥락에서 내용에 변화는 없었다.
“……소피아 남작의 시신은 합동 장례식 후 다른 귀족들과 함께 세르보의 공원에 매장되었습니다. 세르보 공원은 잠시 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소피아 남작을 지켜 주지 못한 것에 다시 한번 송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혹시라도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질문해 주십시오.”
엘리오가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궁금한 거 있냐?”
“없습니다.”
파비안은 자신도 영지군 출신이라 사적인 감정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무덤만 확인하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도시에 들어서면서부터 소피아 남작과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녀와의 추억이 짜증스러울 줄만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래서 더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소피아 남작과 배 속의 아기 생각으로 마음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코프 사이하 자작과 엘리오 일행은 도시 공원으로 이동했다.
앞서 걷던 이코프 사이하 자작이 거대한 봉분 앞에서 멈춰 섰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매장할 장소가 없어, 귀족들만 따로 합장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국왕 전하께서 이곳을 호국 성지로 선포하여 특별히 관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파비안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소피아 남작의 무덤이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이건 좀 그러네.”
“클라우드 남작. 소피아 남작보다 더 높은 작위를 가진 귀족들도 합장을 했소. 전시라 그런 것이니 다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해해 주시오.”
“……”
파비안은 괜히 숙연한 분위기를 깨기 싫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말했다.
“사이하 자작이 소피아 남작의 직속상관이라고 했지? 솔직히 말해서 파비안 남작을 제외하고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네. 그대가 추모의 의미로 한마디 해 줬으면 하는데,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