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78
1378회. 사방에서 저희를 괴롭힐 겁니다
엘리오와 그의 일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중앙 홀에 있던 남부 왕국 국왕들과 ‘왕의 전권 대리인’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남부 왕들과 ‘왕의 전권 대리인’들의 반대에도 아드리아 왕국 재상을 살해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라울 브로스넌 국왕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에게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었더라면……. 제국과의 전쟁도, 라고아 백작에게 수치를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오.”
물론 그건 반만 맞는 소리였다.
제국과의 전쟁은 강철 골렘을 독식하려다가 생긴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걸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남부 왕국들의 힘이 막강했다면 설사 남부 왕국에서 어비스 출입을 막았다 해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생각했다.
제국군에 나라를 빼앗긴 쉐이드 왕국 국왕이 한마디 거들었다.
“옳으신 말씀이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전략 무기의 개발은 어떻게 되었소?”
왕과 ‘왕의 전권 대리인’ 들이 일제히 라울 브로스넌 국왕을 보았다.
“한 달 전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연락을 받았소. 조만간 우리도 엑시티움에 버금가는 무기로 무장하게 될 것이오.”
라울 브로스넌 국왕은 진행 상황을 감추지 않았다.
어차피 아드리아 왕국군만으로 제국군과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양측의 무기가 비슷하다면 결국은 머릿수와 전술, 전략에 따라 승패가 갈릴 테니 남부 왕국군 전체가 신무기로 무장을 해야 했다.
세 명의 남부 왕국 왕들과 두 명의 ‘왕의 전권 대리인’들은 제국과 라고아 백작의 처리 문제를 두고 회의를 지속해 나갔다.
***
왕궁을 나온 엘리오 일행은 크라시온 성내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전 같았으면 쿠스코 성으로 갔겠지만, 아드리아 왕국과의 관계가 껄끄럽게 되어 그냥 식당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던 엘리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어느 마탑에서 그런 요구를 했는지 알아낸 뒤에 죽일걸 그랬나?”
그러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말했다.
“어딘지 알 것 같습니다.”
“진짜요?”
“타불라 마탑일 겁니다.”
“왜 타불라 마탑일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리에트 알바노 양의 후원자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아!”
엘리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아리에트 알바노의 후원자가 타불라 마탑의 탑주라는 게 떠오른 것이다.
오마르 백작이 파비안을 힐끔 보고는 말을 이었다.
“아리에트 양과 파비안 남작의 결혼에 방해가 되니 정리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자 파비안이 반론을 제기했다.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소피아 남작의 전사가 계획된 것이라는 게 밝혀지면, 그 배후로 타불라 마탑이 의심받을 게 뻔한데……. 머리 좋은 마법사들이 꼬리가 밟힐 짓을 했을까요?”
“하지만 소피아 남작과 가장 가까운 사람인 파비안 남작 자네조차 전사를 의심하지 않았지.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이 많을수록 진실은 밝혀지지 않는다네.”
“제가 소피아 남작의 죽음을 바랐다는 말씀이십니까?”
“죽음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녀에게 발목이 잡혔다고 생각했을 게야. 탑주인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과 아드리아 왕국 재상은 거기까지 예측했을 걸세. 대귀족들의 생각은 늘 그런 식이거든.”
순간 파비안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아는 사실을 아니라고 부인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물었다.
“너, 오마르 백작님 말처럼 배후가 타불라 마탑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고작 남작에 불과한 저에게 뭘 바라십니까? 탑주가 손가락만 까딱여도 죽을 텐데.”
“탑주의 처리는 나에게 맡기고, 아리에트 양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거냐고.”
“…….”
파비안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소피아 남작이 전사한 뒤 그는 계속 아리에트 알바노와의 재결합을 꿈꿨다.
그런데 소피아 남작의 전사 배후에 타불라 마탑이 있다면?
그때도 아리에트 알바노와의 재결합을 추진할 수 있을까?
마음은 여전히 아리에트 알바노를 원했지만, 이성은 아니라고 했다.
“파비안?”
“어떻게 하긴요, 끝난 거죠.”
“잘 생각했다. 나는 네가 허튼소리 하면 다시 안 볼라고 했다.”
“저 그 정도로 생각 없는 놈 아닙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즈음, 하워드가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저어,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죠? 오마르 백작님과 저희는 계속 아드리아 왕국에 남아 있어야 합니까?”
잠시 생각하던 엘리오가 답했다.
“남부 왕국에 뭔가 있는 것 같아. 그게 뭔지 정도는 확인했으면 하는데, 오마르 백작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 생각도 같습니다. 비공정까지 동원해 데리고 갔던 소피아 남작을 갑자기 희생시킨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와 다른 기류가 느껴집니다. 그게 뭔지 알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까지처럼 오마르 백작님은 남부 왕국을 조사해 주세요. 저와 파비안은 제국으로 돌아가 일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타불라 마탑주를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순간 모두가 엘리오의 입에 주목했다.
생각해 보면 그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한 감이 없지 않다.
소피아 남작의 죽음으로 스컬 군단 참모장과 아드리아 왕국의 재상이 목숨을 잃었다.
라고아 백작과 소피아 남작이 친밀한 관계였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소피아 남작은 파비안이 잠깐 즐기던 여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라고아 백작은 대귀족들을 죽였다.
그런 그가 제국으로 돌아가 탑주를 어떻게 할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엘리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목숨에는 목숨이죠.”
“타불라 마탑주를 죽이면 다른 마탑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고 말 겁니다.”
“그래서 용서해 주자는 건가요?”
“자칫 온 세상이 라고아 경에게 등을 돌릴까 봐 그럽니다.”
제국에 이어 남부 왕국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여기에 마탑마저 적이 되면 라고아 백작은 외톨이가 되고 말 터였다.
“그러라고 해요. 난 아쉬울 거 없으니까.”
그러자 파비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라고아 경이야 그럴 테지만, 저희들 입장도 좀 생각해 주십쇼.”
“입장이 어때서?”
“사방에서 저희를 괴롭힐 겁니다.”
“그래서? 네 자식을 죽인 마탑주를 용서해 주자고? 말해 봐. 자식 잃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줄 테니까. 아무리 내가 화가 나도 아버지만큼은 아니겠지.”
엘리오가 파비안을 똑바로 쳐다보자, 파비안은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목숨에는 목숨이 맞는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로 가면, 몸이야 편하겠지만……. 결국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다.”
엘리오의 말에 일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엘리오 일행은 자신의 앞에 놓은 음식을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
론디니움 제국.
수도 페트로폴리스 중구.
타불라 마탑.
책상 위의 마법 수정구가 반짝이자 탑주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은 손을 뻗어 마법 수정구를 툭 건드렸다.
마법 수정구에 남부 아드리아 왕국 궁정 마법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타불라 마탑 탑주님께 긴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말씀하세요.”
이때까지만 해도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은 마력총에 대한 문의려니 생각했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소피아 남작의 전사 배후에 마탑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
깜짝 놀란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참모장이 자백했던 모양입니다. 그 일로 참모장과 재상이 라고아 백작의 손에 죽고, 군단장은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내 이름을 거론했다면 당신들은 평생 마력총 구경도 하지 못할 거예요!”
―재상은 죽었지만 마탑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참 불행 중 다행이군요.”
―라고아 백작과 클라우드 남작이 크라시온 성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제도로 돌아갔다면 마탑을 조사할 겁니다. 그것에 대한 대비가 필요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알았어요. 더 할 말 없다면 이만 끊겠어요.”
말을 마친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은 신경질적으로 마법 수정구를 후려쳤다.
큰 소리가 났지만 책상에 고정된 마법 수정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쯧! 모자란 것들과 거래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은 집무실을 빙빙 돌며 대책 마련에 고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탑이 배후임을 알았다면 타불라 마탑부터 찾아올 터였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정신 마법을 생각하니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의 앞에서는 부인은 물론, 거짓말도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탑주라 해도 그는 정신 마법을 사용할 게 분명하다.
‘어쩐다.’
머리를 쥐어짰지만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의 낯빛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 추진한 일이, 자신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똑. 똑. 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누구냐!”
마공학자 카비 크레이저 백작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탑주님, 총 일만 정의 마력총 중에 1차 판매분인 이천 정이 준비되었습니다. 이대로 발송해도 되겠습니까?”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이 눈을 찡그렸다.
‘하필 이런 때에…….’
아드리아 왕국에 판매하기로 한 마력총이었다.
아드리아 왕국이 소피아 남작을 처리했으니 계약은 지켜야 했다.
“보내고…… 아니, 가 보게.”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한순간 도움을 청할까 했지만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서다.
“예.”
카비 크레이저 백작은 탑주의 안색을 힐끔 살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우두커니 서서 입술을 물어뜯던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은 달아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당분간 나를 찾지 마라. 조용한 곳에서 연구를 하겠다’고 적은 종이를 책상에 올려 두고, 아무도 모르게 마탑을 떠났다.
그날 저녁.
탑주를 만나러 온 엘리오에게 카비 크레이저 백작이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를 읽은 엘리오는 뒤늦게 탑주가 달아났음을 알고 펄펄 뛰었지만, 그런다고 달아난 탑주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한참 만에 노기를 가라앉힌 엘리오가 카비 크레이저 백작에게 물었다.
“탑주가 갈 만한 곳을 압니까?”
“모릅니다. 제가 알기로 외부에 탑주님의 개인 연구실은 없습니다.”
앞뒤 재지 않고 그냥 튀었다는 소리다.
병법 중에 으뜸가는 게 삼십육계 줄행랑[走爲上策]이라더니 그 말이 맞다.
직접 당하고 보니 속은 뒤집어지는데 손을 쓸 수가 없다.
허탈한 얼굴로 서 있던 엘리오는 맥없이 돌아섰다.
***
같은 시간.
페르모사 에스텔라에 남아 있는 파비안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인기 절정의 바르도스 아리에트 알바노였다.
파비안에게 눈인사를 건넨 그녀는 파비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랫동안 안 보이시던데 어디 다녀오셨나 봐요?”
“아드리아 왕국에 갔다 왔습니다.”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을 떠올린 아리에트 알바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잠잠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리에트 알바노에게 파비안이 말했다.
“소피아 남작은 페로무로스에서 전사했습니다.”
“…….”
아리에트 알바노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파비안을 보았다.
소피아 남작이 전사했다니?
안됐으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계속된 파비안의 말에 아리에트 알바노의 표정이 굳었다.
“아드리아의 재상이 자백했습니다. 제도의 마탑에서 마력총 판매 조건으로 소피아 남작의 죽음을 요구했다고. 언젠가 탑주인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라고 하시더군요. 오마르 백작님은 당신의 후원자인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을 배후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라고아 백작님이 타불라 마탑에 갔으니 곧 결과를 알 수 있을 겁니다.”
“…….”
“타불라 마탑이 아드리아의 재상에게 그런 요구를 했다면, 나는 영원히 당신을 만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살해당한 소피아 남작과 저의 아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 생각합니다.”
파비안은 놀라서 넋이 나간 아리에트 알바노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