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77
1377회. 내정 간섭을 멈춰 주시오
엘리오는 파비안을 힐끔 보았다.
소피아 남작의 발령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의심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잘된 일이니까 고민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아드리아 왕국은 왜 소피아 남작을 제거한 것일까?
그들은 소피아 남작과 파비안을 짝지어 주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소피아 남작이 임신을 했다.
아드리아 왕국이 바라던 대로 됐는데, 그들은 돌연 소피아 남작을 버렸다.
‘그것도 파비안이 깊게 파고들지 않을 거라는 것까지 예측하면서 말이지.’
궁금하지만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크라시온 성에 가서 재상을 만나면 알게 될 터였다.
***
왕성 크라시온.
중앙 홀.
아드리아 왕국 국왕 라울 브로스넌이 긴급 초대에 응한 국왕과 국왕의 대리인 들을 둘러보았다.
쉐이드 왕국과 우름 왕국은 국왕이 직접 참석한 반면, 타밈 왕국과 아스타니아 왕국은 ‘왕의 전권 대리인’을 보냈다.
쉐이드 왕국 국왕이야 크라시온에 머무르고 있었으니 당연하지만 우름 왕국 국왕이 조금 의외였다.
라울 브로스넌 국왕은 우름 왕국도 타밈이나 아스타니아처럼 대리인을 보낼 거라 생각했었다.
어쨌든 아드리아 왕국의 사정으로 긴급하게 요청한 것치고는 좋은 결과다.
라울 브로스넌 국왕은 재상인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에게 눈짓을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왕들과 ‘왕의 전권 대리인’들에게 묵례를 올린 뒤 소피아 남작의 전사에 얽힌 마탑과의 비밀 거래와 그것이 몰고 온 파국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하여 라고아 백작이 크라시온 성으로 올라오는 중입니다. 클라우드 남작의 아이를 임신한 소피아 남작을 폐기 처분한 것에 화가 난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 중인 아드리아 왕국의 내정까지 간섭하는 것은 지나친 행위가 아닙니까? 아드리아 왕가는 물론 저희 혈족들에서도 전사자가 여럿 나왔습니다. 여러 남부 왕국의 왕가와 대귀족들 가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귀족들의 당연한 의무라 생각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재상은 잠시 말을 끊고 분위기를 살폈다.
왕들과 ‘왕의 전권 대리인’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한 재상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랜드 마스터인 라고아 백작은 자신의 가신이 남부 왕국 왕가나 대귀족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가신의 여자가 전사한 일을 따지겠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라고아 백작은 아드리아 왕국군과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스컬 군단 참모장을 즉결 처형했고, 군단장을 직위 해제시켰습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재상인 저와 아드리아 왕국의 국왕이십니다.”
“…….”
무거운 침묵이 중앙 홀을 찍어 눌렀다.
“국왕 전하들과 전권 대리인분들께 간곡히 청을 드립니다. 우리 아드리아 왕국의 편에 서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아드리아의 강철 골렘을 네 왕국과 공유하겠습니다.”
재상의 처음 계획은 강철 골렘의 분배였다.
그러나 강철 골렘을 너무 흩어 놓으면 힘이 약해진다는 지적에 공유로 변경한 것이었다.
‘강철 골렘을 공유하겠다’는 말에 국왕들과 국왕의 전권 대리인들의 눈이 번득였다.
“엑시티움이 보급된 뒤로 제국은 더 이상 라고아 백작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남부 왕국에는 아직 그랜드 마스터의 전횡을 견제할 수단이 없습니다. 라고아 백작도 그걸 알고 저렇게 나오는 것일 테지요. 하지만 우리도 조만간 제국군처럼, 전략 무기를 손에 넣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더 이상 라고아 백작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까지 남부 왕국들은 단결된 힘으로 라고아 백작의 횡포에 맞서야 합니다. 제국과의 관계가 틀어진 지금, 라고아 백작에게 우호적인 곳은 우리 남부 왕국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한목소리를 내면, 라고아 백작도 더는 제멋대로 날뛰지 못할 겁니다. 지금까지 라고아 백작의 행보를 보아 아드리아 왕국에서만 내정 간섭이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이 기회에 우리 남부 왕국들이 라고아 백작에게 우리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남부 왕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아드리와 왕국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국왕들과 ‘왕의 전권 대리인’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라울 브로스넌 국왕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어렸다.
사실 이건 어느 정도 예견된 결말이었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은 기사의 정점인 그랜드 마스터다.
하지만 엑시티움이 풀리면서 기사와 마법사는 몰락하는 중이다.
남부 왕국에 엑시티움과 비슷한 전략 무기가 보급될 날이 머지않았다.
그때부터는 남부 왕국들도 그랜드 마스터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
다가오는 세상은 강한 기사가 아니라, 강한 군대를 가진 자가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될 터였다.
***
다음 날 정오.
세르보를 출발한 엘리오 일행은 마침내 크라시온 성에 도착했다.
엘리오 일행은 휴식의 시간도 없이 곧바로 왕성을 찾아갔다.
중앙 홀에 들어선 엘리오는 가볍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라울 브로스넌 국왕과 재상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재상인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이 엘리오 일행에게 두 명의 왕과 두 명의 ‘왕의 전권 대리인’들을 소개했다.
서로 간에 인사가 끝나자,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부 왕국 연합의 이름으로 라고아 백작님을 모시려 했습니다. 때마침 늦지 않게 잘 찾아오셨습니다.”
“무슨 일로요?”
그러자 아드리아 왕국의 라울 브로스넌 국왕이 나섰다.
“백작이 세르보에서 저지른 일 때문이오. 백작이 스컬 군단 군단장을 직위 해제시키고, 참모장을 즉결 심판했다고 들었소. 모두 사실이오?”
“그런데요?”
“남부의 어느 왕이 라고아 백작에게 그럴 권한을 주었소? 그것이 심각한 내정 간섭임을 모르시오?”
“아하!”
경박한 탄성과 함께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라울 브로스넌 국왕과 재상은 소피아 남작의 사건을 내정 간섭으로 몰아갈 생각인가 보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은 남부 왕국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으니까.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반응을 살피던 우름 왕국 국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백작, 소피아 남작에 대해서는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전사한 것이 어디 소피아 남작 하나뿐이겠소? 브로스넌 왕가와 블라스 후작가에도 열 명 이상의 전사자가 나왔다 들었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전사한 것을 두고 문제 삼지 않소. 다른 왕가와 대귀족들이 소피아 남작만 못하다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덮으십시다. 이런 문제로 우리가 내부 분열을 하면 제국군만 좋아할 게요.”
“전하, 소피아 남작은 전사한 게 아니라 살해당한 겁니다. 재상이 소피아 남작을 죽이라고 한 탓에, 군단장과 참모장이 그녀를 사지로 내몰아 죽게 했습니다. 남부 왕국에서는 그런걸 전사라고 합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타밈 왕의 전권 대리인이 나섰다.
“백작, 지금 우리 남부 왕국들은 제국군과 전쟁 중입니다. 재상의 그런 결정에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습니까?”
“왕국에 충성하는 귀족을 사지로 내몰아 죽일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재상께서 대답해 보십시오. 사사로운 감정으로 소피아 남작을 죽이라 했습니까?”
그러자 재상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소피아 남작과 저는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데,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타밈 왕의 전권 대리인이 라고아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는군요.”
엘리오가 재상을 노려보며 말했다.
“좋아. 그렇지 않아도 오는 내내 궁금했다. 왜 소피아 남작을 죽이라 지시했는지 말해 봐라. 죽일지 살릴지는 그 대답을 듣고 결정하겠다.”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이 혀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은 왕들 앞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였다.
“제국군이 총병을 중심으로 편제를 마치고, 엑시티움을 총병들에게 보급했습니다. 그 뒤로 남부 왕국은 단 한 차례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한 적이 없습니다. 강철 골렘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작동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서론이 길군.”
“남부 왕국군도 엑시티움과 비슷한 신무기의 개발 완료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부 왕국은 신무기를 사용할 마력총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러던 차 마탑에서 마력총을 판매하겠다고 연락을 해 왔습니다. 소피아 남작의 처리를 조건으로…….”
“어느 마탑이 그런 사악한 조건을 내걸었지?”
“그건 왕국의 안위와 관계된 일이므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행여나 라고아 백작이 마탑에 찾아가 문제를 일으킬까 봐 재상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아스타니아 왕의 전권 대리인이 말했다.
“우리 남부 왕국들은 아드리아 왕국의 결정을 존중하고 지지합니다. 라고아 백작은 더 이상 남부 왕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아 주십시오.”
엘리오가 황당한 얼굴로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오마르 백작은 난감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라고 뾰족한 해결책이 있을 리 없다.
‘꽤나 일이 꼬였군.’
피치 못할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했지만 그게 마탑의 요구였을 줄이야!
오마르 백작에게서 기대한 답을 얻지 못한 엘리오는 다시 재상에게 고개를 돌렸다.
뻔뻔한 얼굴로 서 있는 재상을 보니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니까 ‘마탑과의 관계를 위해서, 나와의 관계를 파탄 냈다’ 이거네?”
“…….”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은 변명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보다 마탑이 무서워서, 파비안의 부인을 죽였다?”
“헉! 그건 아닙니다. 게다가 클라우드 남작과 결혼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까?”
“미래는 모르겠고, 당신들이 소피아 남작을 죽일 공모를 할 당시에, 파비안은 소피아 남작과 결혼을 하려 했다. 그렇지? 파비안?”
엘리오의 물음에 파비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합니다.”
대화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자 우름 왕국 국왕이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남부 왕국들은 아드리아 왕국이 내린 결정을 지지하오. 남부 왕국들의 이름으로 부탁하건대, 아드리아 왕국에 대한 내정 간섭을 멈춰 주시오.”
“그렇게 못 하겠다면요?”
엘리오의 반문에 우름 왕국 국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아무리 그랜드 마스터라 해도 선을 넘는 행위인 까닭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오는 돌아서 재상과 마주 보았다.
“내 가신의 부인을 죽인 건 나를 모욕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당신은 마력총이 필요해서 그랬다지만, 실은 나를 만만하게 봤던 거야. 기사의 검보다 마력총이 더 대우받는 시대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이럴 때 가만히 있으면 나는 진짜 병신이 되는 거라고.”
라고아 백작의 의미심장한 말에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은 뒷걸음질 쳤다.
“라고아 백작님, 진정하십시오. 나를 죽인다면 아드리아 왕국과 남부 왕국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카를로만 블라스 후작은 연신 국왕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공모자인 라울 브로스넌 국왕은 애써 그의 시선을 피했다.
유일한 구명줄인 국왕이 외면하자 재상은 돌아서 달아났다.
체면이고 뭐고 지금은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엘리오가 가까이 있던 은촛대를 집어 던졌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에 은촛대가 박힌 재상이 쓰러졌다.
분노한 라울 브로스넌 국왕이 의자 손잡이를 힘껏 움켜잡고 맹세했다.
‘내 언제고 반드시 너를 죽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