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34
1434회. 쳇! 선생님이 호랑이는 아니잖아요
연적하의 시선이 문득 무당산을 향했다.
지금이라면 왠지 구천현녀가 자신의 부름에 응할 것도 같았다.
근거는 없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무당산을 오르지 않았다.
노파의 가족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다.
노파는 자신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여남은 인생의 깨달음을 나누어 주었다.
노파가 자신을 신선으로 믿고 있어서 그런 것은 정말 아니다.
가볍게 집 근처를 한 바퀴 돈 연적하는 노파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번에는 소옥이 슬쩍 다가왔다.
“왜 안 자고 나와 있느냐?”
연적하의 물음에 소옥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도 밤바람을 좀 쐬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좀 괜찮아지셨어요?”
“응? 뭐가?”
“아버지 말씀을 들으니 실연의 상처가 크시다고…….”
“실연이라…….”
연적하는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
실연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거라면, 실연을 한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십팔 세 여소옥이 젊은 글 선생님을 힐끔거렸다.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글 선생은 그녀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실연을 했으면 이젠 홀몸이라는 뜻.
그런 생각을 하자 글 선생님과 한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저어, 선생님은…….”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파가 튀어나와 손녀의 말을 잘랐다.
“늦은 시간에 뭘 하고 있는 거야? 얼른 들어가지 않고. 자네도 그만 들어가게. 괜히 멀쩡한 애 허파에 바람 집어넣지 말고.”
“히잉! 할머니…….”
“뭐 해? 안 들어가고?”
노파가 눈을 부라리자 여소옥은 마지못해 마루로 올라섰다.
노파의 매 같은 시선이 이번에는 서생을 향했다.
“자네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
노파는 서생이 버티자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다 홱 돌아섰다.
이윽고 방으로 들어간 노파는 들으라는 듯 손녀를 야단쳤다.
“다 큰 처녀가 사내 앞에서 왜 살랑거려? 네가 그런다고 저 서생이 이런 촌구석에 눌러앉을 것 같아? 저런 놈은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누, 누가 살랑거렸다고 그러세요?”
“한 번만 더 내 눈에 걸리기만 해. 아주 머리를 밀어 버릴 테니까. 저런 놈은 옆에도 가지 말어. 모진 놈 옆에 있다가 같이 벼락맞는 법이야.”
“글공부…….”
“하지 마! 내일부터 너는 안 해도 돼. 소룡이만 배우게 할 거야!”
“할머니, 저도 천자문은 떼고 싶다고요.”
“계집애가 더 배워서 뭐 하려고?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 할미가 두 번 말 안 한다. 내일부터 너는 글공부 그만두고 어미나 도와.”
“아, 할머니.”
“내가 네 속을 모를 줄 알아? 제사에는 관심 없고 젯밥에 눈이 멀어 있잖아.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자꾸 고집부리면 저놈을 아예 내쫓아 버리는 수가 있어! 네 동생이라도 글공부시키려면 더 이상 나불대지 마.”
독한 할머니의 태도에 여소옥은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았다.
천자문을 더 못 배우게 된 건 아쉽지만, 할머니 말대로 글공부보다 글 선생에게 더 관심이 있던 것도 사실인 까닭이다.
마당에서 조손의 대화를 듣던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꽃다운 나이의 연심도, 그걸 보는 노파의 마음도 훤히 눈에 들어왔다.
‘쯧! 달걀을 보고 벌써부터 닭이 울기를 바라는 건가[見卵求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한편으로 입맛이 쓰다.
세상은 이처럼 홀로 된 사람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자신도 그렇지만, 신선이 된 남궁연의 장구한 삶도 마찬가지일 터.
여남의 말처럼 빨리 놓아 버리지 않으면 자신만 병들 게 분명하다.
문득 구주(九州)에서 만났던 괴팍한 종문 사람들이 떠올랐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인간성 상실은 불로장생의 부작용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성이란 ‘짧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도덕이다.
인간이 불로장생하게 되면, 인간성 역시 그에 맞게 변하기 마련.
돌이켜 보면 구주의 ‘팔왕’과 ‘아홉 군주’ 들은 인간성과 거리가 멀었다.
딸이 수도를 거부하고 인간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런 게 싫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자신과 남궁연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대열에 들어섰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는 말은 진리다.
남궁연을 잃어버린 상처가 아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연적하는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다음 날.
글공부 시간이 되자 역시나 여소룡만 찾아왔다.
노파가 기어코 손녀의 천자문 공부를 막은 것이다.
여소룡은 글 선생의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연적하는 무덤덤했다.
“선생님, 누이는 오늘부터 글공부를 못 하게 됐습니다.”
“알고 있다.”
어젯밤에 노파가 그렇게 큰소리로 야단을 쳤는데 모를 리 있나.
“저어, 선생님이 할머니에게 한 말씀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예, 아무래도 할머니가 선생님과 누이의 관계를 오해한 것 같습니다.”
“흐음! 내가 오해 살 만한 행동을 했더냐?”
“어이쿠! 전혀요. 저희 할머니가 좀 까탈스러운 분이시라 그렇습니다.”
솔직히 여소룡은 자기 누이와 글 선생이 사랑한대도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봐도 누이는 이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 선생이 마을에 있는 남자들보다는 몇 배 나아 보인단 말이지.’
그런데 왜 할머니가 그렇게 반대를 하는지 모르겠다.
“네 할머니와 나는 말이 통하질 않는다. 내가 뭐라고 하면 오히려 더 역정을 내실 게다.”
“그건 선생님이 남천 신선을 너무 개무시하시니까 그런 게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남천 신선을 조금만 띄워 주면, 할머니 마음도 돌아설 겁니다.”
여소룡은 확신했다.
남천 신선의 문제가 아니면 글 선생과 할머니가 부딪칠 일이 없어서다.
애초에 글 선생을 좋게 본 사람은 할머니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집에까지 데리고 와서 걷어 먹일 리 없으니까.
할머니와 글 선생 사이가 엇나가기 시작한 것은 분명 남천 신선 때문이었다.
“남천은 신선이 아니니 그를 신선이라 부르지 마라.”
“하! 참! 답답하시네. 선생님의 그 꽉 막힌 고집 때문에 우리 누이가 글공부를 못 하고 있다고요. 우리 누이에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울컥한 여소룡은 막가는 심정으로 눈까지 부라렸다.
글 선생에 대한 호감과 별개로 누이는 글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게 글 선생 때문에 막혔다 생각하니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새파랗게 어린 소룡이 혈기를 부리자 연적하는 그를 빤히 보았다.
“소룡아.”
“왜요.”
“너 내가 만만하게 보이냐?”
“만만하게 보이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선생님 말하는 게 답답해서 그럽니다.”
“너 산길을 가다 호랑이를 만났어. 호랑이가 길을 꽉 막고 있으면 답답하냐?”
“쳇! 선생님이 호랑이는 아니잖아요.”
“네 말이 맞다.”
연적하는 이내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자신은 본능대로 행동하는 호랑이가 아니라 사람이다.
고손자뻘 되는 핏덩어리와 감정 대립을 했다는 게 순간 부끄러웠다.
글 선생이 눈에서 힘을 빼자 여소룡은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책임지고 누이가 다시 글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네 할머니가 나를 싫어한다는 걸 너도 알 텐데?”
“선생님이 남천을 신선이라고 하면 다 풀릴 겁니다. 그럼 어쩌면 누이를…… 하여튼 그렇게만 하세요.”
여소룡은 말을 급히 얼버무렸다.
본래 그가 하려던 말은 ‘누이를 선생님에게 줄지도 모릅니다’였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글 선생의 입장만 난처해질 것 같아서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여소룡은 펼쳐져 있던 천자문 책을 ‘탁!’ 소리가 나도록 덮었다.
“그럼 나도 안 배울랍니다.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어차피 어지간한 글자는 다 읽고 쓸 줄 아는데.”
여소룡이 ‘어떻게 할 테냐?’는 눈으로 글 선생을 쳐다보았다.
이제 겨울이 시작되어 아침저녁으로 서리가 내렸다.
집에서 쫓겨나면 오갈 데 없는 글 선생은 당장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무심한 눈으로 여소룡을 보던 연적하가 물었다.
“네 아버지는 어디에 있느냐?”
“지금쯤 집 뒤에서 장작 쌓아 둔 창고를 고치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요?”
“너도 안 배우겠다니 말을 해 줘야지.”
연적하는 여소룡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 내려선 연적하는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여자들은 단체로 일이라도 하러 갔는지 집 안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집 뒤편으로 돌아갔다.
창고 위에서 썩은 널빤지를 새것으로 교체하던 여남이 일손을 멈추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제 누이가 글공부를 못 하게 됐다고, 소룡도 그만두겠답니다.”
“잠시만 기다리게.”
여남은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정말 소룡이 글공부를 그만두겠다고 했나?”
“예.”
“허! 그놈의 자식. 청개구리가 따로 없네. 글공부하게 해 달라고 징징대서, 글 선생을 데려다 앉혔더니 그만두겠다고?”
“소옥이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혼자 배우려니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입니다.”
“소옥이는…… 하아!”
여남이 곁눈질로 서생을 힐끔거렸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셔도 됩니다.”
“어머니는 자네와 소옥이가 불장난을 할까 봐 걱정하고 계신다네. 그래서 글공부도 그만두게 한 거고.”
“…….”
“사내끼리 대화니 내 단도직입적으로다가 묻겠네. 자네 우리 소옥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착하고 총명한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로는?”
“그런 쪽으로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소옥이가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군. 맞나?”
“그건 아닙니다. 아직 다른 여자를 쳐다볼 마음이 없을 뿐입니다.”
연적하는 혼인을 핑계 삼지 않았다.
남궁연의 껍데기를 장사 지낼 때, 그녀와의 인연도 다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몇 년간 가슴이 불같은 화로 가득 찼던 것도 그래서다.
그걸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여남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생이 아직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니 강요하지는 않겠네. 그래서,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소룡이 글공부를 거부한다면 떠나야지요. 애초에 글을 가르치기로 하고 남아 있었던 거니까요.”
연적하는 촌부의 집안과 자신의 인연이 다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소룡이가 배우고 싶다면 더 남아서 가르쳐 주겠나?”
“그야 물론이지요. 소룡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 게 약속이었으니까요.”
“알겠네. 내 소룡이를 잘 타일러 보겠네.”
이윽고 집으로 돌아간 여남은 글공부를 거부하는 소룡에게 몽둥이 찜질을 했다.
매 아래 장사 없다고, 소룡은 일다경(약 20분) 만에 고집을 꺾었다.
다음 날 아침.
여남의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간밤에 소룡이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글을 남기고 가출한 때문이다.
그는 그냥 가출한 게 아니라, 부모가 모아 두었던 돈까지 싹 털어 갔다.
여소룡의 나이 십오 세.
어리다고 하기에는 머리가 굵지만, 컸다고 하기에는 아직 철부지였다.
“아이고! 내 새끼를 어쩌나! 내가 사람 하나를 잘못 들이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게 생겼네! 내가 진즉에 죽었어야 되는데! 너무 오래 살아 못 볼 꼴을 보는구나! 다 내 잘못이지!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노파는 오전 내내 마루에 앉아 비쩍 마른 제 가슴을 치며 울어 댔다.
보다 못한 연적하가 노파에게 말했다.
“노인장, 소룡이는 내가 찾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쇼. 먹을 거 준다는 말에 개처럼 따라온 내가 병신이지. 노인장 잘못은 아니오.”
노파의 곡소리에 짜증이 난 연적하는 사립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