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43
1443회. 나도 귀족인데?
히르헤라는 북부에서도 최북단에 있다.
연적하는 라미노프 왕국을 찾아 일단 남쪽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만나는 마수와 마물은 모조리 죽였다.
마수와 마물이 북부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꼬박 하루 동안 설원을 달리던 연적하가 멈춰 섰다.
광활한 눈밭 위로 파괴된 건물의 잔해들이 보였다.
쌓인 눈의 높이를 보니 최근에 저렇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이 마을의 생존자들이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기를 바랐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지자 연적하는 적당한 자리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어제처럼 천막 앞에 파이어 스톤으로 불을 피웠다.
낮에 쓸어 내서 그런지 오늘은 어제처럼 마물이 몰려오지 않았다.
그는 우두커니 흔들리는 불을 바라보았다.
폐허가 된 마을을 보았던 탓에 마음이 착잡했다.
이세계가 이렇게 된 데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우샤스 운드라를 죽이지 않았다면 검은 태양도 뜨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우샤스 운드라를 죽이라고 한 것은 창조신 마나 프트라스다.
“젠장.”
마나 프트라스는 창조신을 자처하면서 이런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것일까?
샤이틴에게 뒤통수를 맞은 걸 보면 마나 프트라스도 완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세계가 이렇게 된 게 자신의 잘못은 아니다.
그때의 자신은 단지 ‘마나 프트라스의 칼’에 불과했다.
물론 지금은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있지만 말이다.
연적하는 파이어 스톤이 내뿜는 따스한 열기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졸다가 깨기를 반복하다 날이 밝았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연적하는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
의자에 앉은 채로 잠을 자서 그런지 온몸이 뻐근했다.
그래도 잠을 잔 탓에 머리는 맑았다.
그는 솥단지에 이것저것 넣고 잡탕죽을 끓여 먹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 음식 냄새를 맡고 굶주린 늑대들이 몰려왔다.
가장 먼저 덤벼든 놈을 검면으로 후려쳐 날려 보냈다.
그러자 늑대들은 더 이상 덤비지 않고 멀찍이서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눈에 처박혔던 늑대가 꿈틀거리더니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정신을 차린 늑대는 재빨리 무리들에게 돌아갔다.
연적하는 늑대들에게 눈 한번 주지 않고 천막과 장비들을 거두었다.
잠시 후 정리를 끝낸 그는 늑대들을 한번 쳐다본 뒤, 질풍처럼 내달렸다.
늑대들이 그를 뒤쫓았지만 둘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한참을 달리던 연적하는 뒤를 확인한 후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자식들, 운 좋은 줄 알아라.”
늑대가 아니라 마물이었으면 단칼에 쳐 죽였을 것이다.
그는 해가 머리 위에 떠오를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마주치는 마물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건 어쩌면 당연했다.
같은 북부라도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기후가 온화했으니까.
설원 지대가 끝나고 이끼와 초목으로 뒤덮인 땅이 나왔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파괴된 마을과 도시에 어슬렁거리는 건 마물뿐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몸도 마음도 지친 연적하는 더 이상 경신술을 펼치지 않았다.
가도 가도 폐허뿐이라 의욕을 상실한 것이다.
길을 따라 무지성으로 터덜터덜 걷던 연적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멀리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람일까?
연적하는 저 연기가 사람이 피운 것이기를 바랐다.
멈칫했던 연적하의 걸음이 빨라졌다.
“뭐 하는 거야! 연기만 더 나고 있잖아!”
“죄, 죄송합니다.”
“닥치고 연기가 나오지 않게 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
청년이 낮은 소리로 야단치자 중년 남자는 필사적으로 손을 놀렸다.
그는 두 손으로 주변의 흙을 박박 긁어모아 연기를 덮었다.
연기를 본 지휘관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라미노프 왕국군 제3총병대 백곰 중대 중대장 골란 밀로스 남작이었다.
“미드에지 소위! 지금 뭐 하는 거야!”
부하를 닦달하던 졸라트 미드에지가 황급히 돌아섰다.
“죄송합니다. 불이 번져서 끈다는 게…….”
“미친! 뭘 하고 있었기에 불이 번지는 것도 몰랐나!”
“죄송합니다.”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던 중대장은 연기가 수그러들자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작전 중에 야전에서 불 피우는 것은 금지 사항이지만, 어느 정도 묵인되고 있었다.
미련하게 추위를 참다가 자칫 동상에 걸리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다만 주간에는 연기, 야간에는 불빛이 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불 관리가 필수다.
그런데 불이 번져서 끄려다가 연기를 피웠다니?
빙벽이 건재하던 때에야 별일 아니지만, 지금은 미친 짓이었다.
‘저놈이 라미노프 왕국군 사령관의 아들만 아니었어도…….’
중대장은 소대장의 병신 짓에 이가 갈렸지만 꾹 참았다.
중대장이 떠나자 미드에지 소대장은 부하에게 화풀이를 했다.
“사르냑! 나 엿먹으니까 좋냐?”
“아닙니다.”
중년의 기수 사르냑이 고개를 숙였다.
불을 피운 것도 소대장이고, 졸다가 불을 번지게 한 것도 소대장이다.
하지만 계급이 깡패니 어쩔 수 없었다.
소대장의 집안을 생각하면 때리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할 판이다.
“너 이 새끼, 지금 속으로 욕했지?”
“아닙니다!”
사르냑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중대장에게 욕까지 먹은 미드에지는 분풀이를 할 대상이 필요했다.
미드에지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부하에게 다가갈 때다.
경계를 서고 있던 초병 하나가 미드에지에게 소리쳤다.
“소대장님! 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김이 팍 새 버린 미드에지는 서둘러 초병에게 다가갔다.
과연!
길을 따라 한 청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드에지는 기수인 사르냑과 함께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사르냑.”
소대장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사르냑은 낯선 이방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추시오!”
중년 남자의 일갈에 연적하는 걸음을 멈췄다.
어느 왕국인지는 모르겠지만 복장을 보니 왕국군이 틀림없었다.
연적하가 빤히 쳐다보자 사르냑은 소대장을 힐끔 돌아보았다.
순간 사르냑이 짜증 어린 얼굴로 말했다.
“총은 장식이냐! 기수라는 놈이 그것밖에 안 돼?”
“하지만 상대가 사람이잖습니까?”
“사람인지 마족인지 어떻게 알아? 마족이면 어쩌게?”
“…….”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이지만 틀린 말도 아닌지라 사르냑은 슬그머니 총구를 들어 올렸다.
연적하가 상관으로 보이는 청년을 보며 말했다.
“내가 마족이면 마력총 한 자루로 막을 자신은 있고?”
허를 찔린 미드에지는 반박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사르냑의 총구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재빨리 청년을 훑어보던 미드에지의 입이 열렸다.
“처음 보는 복장인데, 어디 출신이냐?”
“처음 보는 복장이라며? 어디 출신인지 말한다고 알아듣겠냐?”
“말장난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울컥한 미드에지가 마력총으로 이방인을 겨누었다.
연적하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했다.
“나? ‘굳센 숲[武林]’ 출신인데?”
처음 이세계에 왔을 때의 일이 떠오른 연적하는 빙그레 웃었다.
야인으로 오해를 받고도 베르나르도 후작군에 들어갔으니 운이 좋았다.
이세계에서 야인의 지위는 노예보다 못했으니까.
순간 대귀족가의 일원인 미드에지의 눈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야인이냐? 어쩐지.”
중얼거리던 미드에지가 살벌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야인 놈 따위가 라미노프 왕국의 귀족에게 반말을 해? 세상이 완전히 망한 것 같지? 아니거든? 야인 새끼가 어디서!”
미드에지가 기수를 지나쳐 야인 청년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싸대기를 날리려는 듯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미드에지가 뒤로 나뒹굴었다.
미드에지가 야인 청년에게 다가가고, 뒤로 나뒹굴기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기수인 사르냑도 막지 못했다.
깜짝 놀란 사르냑이 마력총으로 청년을 겨누었다.
그러나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사르냑은 청년과 소대장을 번갈아 바라보다 소대장에게 다가갔다.
“소대장님!”
“으윽, 저 새끼, 저 새끼 체포해!”
미드에지의 말에 사르냑은 마력총을 앞세우고 청년에게 다가갔다.
“소대장님 말씀 들었지? 움직이지 마라. 우리 소대장님은 미드에지 백작가의 자제시다. 귀족을 상해한 죄로 너를 체포하겠다.”
“나도 귀족인데?”
“…….”
뜻밖의 말에 사르냑은 쓰러진 소대장을 돌아보았다.
“소대장님. 이분도 귀족이시랍니다.”
“거짓말이다! 멍청아! 조금 전에 제 입으로 ‘굳센 숲’ 출신이라고 했잖아! 당장 체포하라고!”
그러나 사르냑은 선뜻 청년에게 총구를 돌리지 못했다.
여유 자적한 청년의 모습은 평범한 야인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기수가 머뭇거리자 미드에지는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마력총으로 청년을 겨누며 소리쳤다.
“체포하라고! 이 개새끼야! 내가 책임진다고!”
소대장의 말에 사르냑은 다시 총구를 올렸다.
때마침 초병의 보고를 받은 중대장이 총병들과 함께 달려왔다.
“미드에지 소위! 무슨 일인가!”
밀로스 중대장의 말에 미드에지가 분노한 얼굴로 답했다.
“저 야인 새끼가 갑자기 저를 폭행하더니, 귀족을 사칭하며 저항하고 있습니다.”
미드에지의 증언에 총병들이 일제히 마력총으로 청년을 겨누었다.
밀로스 중대장은 청년을 찬찬히 살폈다.
가벼운 옷차림이지만 추위를 타지 않은 얼굴과 등 뒤에 비스듬히 메어져 있는 대검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손을 들어 총병들을 제지한 뒤 청년에게 물었다.
“나는 라미노프 왕국군 제3총병대 백곰 중대장 골란 밀로스 남작이오. 우리 미드에지 소위의 증언에 대해 할 말이 있소?”
“남작, 미드에지 소위의 말은 다 거짓이다. 저놈이 먼저 나를 때리려 해서 반격한 거다. 그리고 나는 귀족을 사칭하지 않았다.”
청년의 반말에 더욱 조심스러운 마음이 든 밀로스 중대장은 소대장과 함께 있던 기수 사르냑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대장의 눈치를 보던 사르냑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저는…… 미드에지 소위님이 맞아 쓰러지는 것만 보았을 뿐…… 전후 사정은 자세히 모릅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귀족이라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
결정적인 부분에서 모른다고 하자 밀로스 중대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기야 기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으리라.
평소 미드에지 소위의 건방진 언행을 생각하면 안 봐도 뻔하다.
낯선 청년에게 손찌검을 하려다가 맞은 것이리라.
이제 공은 다시 이방인에게 넘어갔다.
골치가 아팠지만 밀로스 중대장은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운을 뗐다.
“스스로 귀족이라고 했다는데…….”
“나는 에스카토스 왕국의 백작이며, 로렌 공국 라티누스와 북부 슬래시 랜드의 영주인 엘리오 라고아다.”
상상하지도 못한 이름 앞에 한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던 밀로스 중대장이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귀하……께서 그랜드 마스터인 엘리오 라고아 백작 각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상대가 반신반의하자 연적하, 엘리오 라고아는 마하담에서 작위 증명서를 꺼내 보였다.
아공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모습에 반쯤 넘어갔던 밀로스 중대장은, 작위 증명서 앞에 허리를 접었다.
“라고아 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