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47
1447회. 너는 인간이냐? 부라퀴족이냐?
시에라 산맥.
에스카토스 왕국군 서부군 숙영지.
서부군 참모장 오스카 아비드 자작이 사령관의 숙소로 찾아갔다.
“사령관님.”
“무슨 일인가?”
참모장이 들어오자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엘리오는 탁자로 자리를 옮겼다.
“쉬고 계신데 죄송합니다.”
아비드 참모장이 계면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백야가 시작된 뒤로 휴식과 취침의 구별도 무의미해져 지금처럼 애매한 상황이 많이 생겼다.
“죄송은 무슨. 취침 시간도 아닌데.”
마물들과 한바탕 싸운 뒤로 서부군은 휴식과 정비 시간을 갖고 있었다.
“생존자들을 면담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참모장이 쉬지도 못할 정도의 정보라……. 뭔가?”
“시에라 산맥에 마족 군주로 보이는 존재가 있다고 합니다.”
“마족 군주?”
엘리오의 눈이 번득였다.
탈린 왕국을 지나는 동안에도 만나지 못한 마족 군주가 시에라 산맥에 있다니?
마족 군주들의 절대적인 위치를 생각하면 다소 의외의 일이었다.
“예, 코끼리보다 큰 붉은 말을 타고 금관을 써서 눈에 띄었다 합니다. 그가 날개가 달린 마족(아스타로이드)들을 부리는 걸 봤답니다.”
“날개 달린 마족이면 아스타로이드를 말하는 건가?”
“예, 상급 마족을 종처럼 부렸다면…… 마족 군주가 틀림없다는 게 참모들의 의견입니다. 다만…….”
“다만?”
“마족 군주가 왜 풍요로운 탈린 왕국을 마다하고 시에라 산맥에 웅크리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시에라 산맥은 사시사철 눈에 덮여 있어서 생명체가 살아가기 어려웠다. 그건 설사 상대가 마족이라 해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마족 군주가 목격된 곳은?”
“시에라 산맥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알려진 발도 디아노 협곡입니다.”
“서부군이 가기는 어렵겠군?”
“그렇습니다. 자칫 마력총 소리에 눈사태라도 나면 서부군의 무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발도 디아노 협곡까지 길 안내할 사람을 물색해 둬. 서부군이 시에라 산맥을 빠져나가면, 그때 발도 디아노 협곡으로 가 볼 테니까.”
“혼자서 마족 군주를 토벌할 생각이십니까?”
“그렇게라도 해야지. 마족 군주를 뒤에 남겨 두고 갈 수는 없잖아.”
“특무대라도 조직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더 이상 마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 안 나온다면서? 기사와 마법사를 아껴야지.”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직 참모장이 몰라서 그러는데, 난 지는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아.”
“알겠습니다.”
아비드 참모장은 군례를 올린 뒤 사령관의 막사에서 물러났다.
***
시에라 산맥.
발도 디아노 협곡.
머리에 금관을 쓴 거인이 협곡 가장 안쪽의 얼음 동굴로 들어갔다.
얼음 동굴은 극한의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냉기는 더욱 강해져 거인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얼음 가루가 흩날렸다.
사람은 물론 마족들조차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얼어 죽을 냉기였다.
그래도 거인은 꿋꿋하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한참을 빠르게 걷던 거인, 마족 군주 베리스의 걸음이 느려졌다.
마침내 얼음 동굴의 끝에 도달한 것이다.
투명한 얼음 벽 앞에 은빛으로 빛나는 직사각형의 금속 기둥이 서 있었다.
금속 기둥 앞에 서니 베리스가 난쟁이처럼 작게 여겨졌다.
베리스가 손가락으로 금속 기둥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대단하군. 나의 연금술로도 결계를 풀 수 없다니……. 그냥 부숴 버릴까?”
베리스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금속 기둥을 긁었다.
끼이이이―!
듣기 거북한 마찰음과 함께 금속 기둥에 길게 손톱자국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자국은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걸 본 베리스의 눈에 탐욕의 빛이 어렸다.
“부숴 버리기엔 아깝단 말이지.”
금속 기둥은 태고 시대 티탄족의 유물이었다.
티탄족의 유물은 마족들 사이에 ‘불멸의 사다리’라는 이명으로 불린다.
저 금속 기둥 속에 악신 샤이틴마저 굴복시킨 티탄족의 능력이 담겨 있어서다.
강철도 두부처럼 갈라 버리는 손톱으로 겨우 흔적만 남길 수 있는 걸 보면 금속 기둥 안에 있는 것은 아마도 ‘에테르눔’일 게다.
흔적마저도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에테르눔 특유의 재생 효과.
마족 군주인 자신이 에테르눔을 얻으면 어쩌면 군주들의 왕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입속에 침이 고였다.
베리스는 이내 손바닥에 어둠의 에테르를 모은 뒤 금속 기둥을 매만졌다.
순간 금속 기둥 표면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티탄족의 문자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뒤이어 방출된 강한 반탄력에 베리스는 뒤로 밀려났다.
베리스의 몸에서 ‘퍼엉!’ 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보통의 마족이었으면 몸이 터져서 죽었을 정도로 강한 충격파다.
그러나 베리스는 세 걸음 뒤로 밀려난 것에 그쳤다.
“감히!”
자존심이 상한 베리스가 허공을 움켜잡는가 싶더니, 금속 기둥을 향해 뭔가를 던졌다.
콰콰콰쾅―!
묵직한 폭발음이 금속 기둥에서 연속으로 들려왔다.
금속 기둥의 표면에 균열이 갔지만 이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금속 기둥 앞에서 씩씩거리던 베리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몇 시간이나 꼼짝도 않던 베리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기다.”
3년간의 연구 끝에 알아낸 것은 하나다.
그것은 금속 기둥이 마족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이다.
티탄족이 악신 샤이틴과 싸웠으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건 없애 버려야 돼.”
에테르눔이 욕심나는 건 사실이지만, 불가능하다면 깨끗이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없애 버려야 한다.
베리스는 아공간 창고에 모아 두었던 필생의 역작들을 꺼냈다.
“냉기가 보호하고 있으니 불로 지져 버리면 되겠지.”
그는 금속 기둥 주변에 연금술로 만든 온갖 화기(火器)들을 쌓았다.
자신이 가진 화력을 다 꺼냈으니 금속 기둥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녹아 사라질 터였다.
화기를 작동시키기 직전 베리스는 다시 한번 금속 기둥을 매만졌다.
티탄족의 유물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야 하다니 미치도록 안타까웠다.
그런 애절한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어둠의 에테르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돌연 금속 기둥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떠올랐다.
그 문양은 이전처럼 섬뜩한 붉은 빛이 아니라, 온화함이 느껴지는 초록색이었다.
‘응?’
베리스가 멍한 눈으로 초록색 문양을 응시했다.
금속 기둥의 첨단에서 시작된 초록색 문양이 금속 기둥을 빙그르르 돌며 바닥까지 내려왔다.
이윽고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듯 초록색 문양이 맨 밑바닥에서 깜빡깜빡 점멸했다.
베리스의 목울대로 마른 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본능적으로 그는 지금이 마지막 선택의 시간임을 알 수 있었다.
처음 결심대로 불태워 버리든지, 금속 기둥의 안배를 받아들이든지 말이다.
티탄족은 악신 샤이틴의 권속인 마족에게 적대적이다.
그런 티탄족의 안배를 받아들여야 할까?
하지만 성난 듯 번쩍이던 붉은빛이 아니라, 이전에 본 적 없는 초록빛이다.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개 같은 결계가 풀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제작한 화기를 작동시키고 떠나느냐, 티탄족의 안배를 받아들이느냐의 갈림길에서 베리스는 한참을 망설였다.
고뇌하던 그가 막 금속 기둥에 한 걸음 다가갈 때다.
쿠쿵―!
동굴 밖에서 은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멈칫한 베리스가 동굴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3년 동안 잠잠하더니 하필 지금 협곡에 외부 세력이 침입한 모양이다.
상급 마족인 아스타로이드들이 협곡을 지키고 있으니 곧 잠잠해지리라.
쿠쿠쿠쿵―!
베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폭발음은 가라앉는 게 아니라 점점 커지고 있었다.
“미친…….”
협곡 좌우편 산에 수십만 년 동안 쌓인 눈을 생각하면 저러면 안 된다.
그 많은 눈이 무너지면 아스타로이드들이라고 해도 위험해진다.
게다가 그 아래 마물과 마수는 반드시 죽는다.
쿠쿠쿠쿠쿠쿵―!
“무슨 짓을!”
참다 못한 베리스는 동굴 밖으로 번개처럼 달려 나갔다.
막 동굴을 벗어난 베리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동굴 앞에 상급 마족인 아스타로이드의 시체가 즐비했다.
“누구냐!”
베리스가 호통치자 아스타로이드 족장이 벼락처럼 그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군주님! 인간 하나가 난입해 아스타로이드를 죽이고 있습니다!”
“벨라토는 어디에 있느냐!”
벨라토는 베리스의 챔피언으로 베리스 다음으로 강한 존재였다.
“죽었습니다.”
“인간 따위가 챔피언을 죽였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게, 틀림없이 인간처럼 보였습니다.”
아스타로이드 족장이 억울하다는 눈으로 베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쿠쿠쿠쿵―!
또다시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아스타로이드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아스타로이드 족장을 노려보던 베리스가 물었다.
“그 인간은 어디에 있느냐?”
때마침 산 정상에서 뭔가 번개처럼 날아와 동굴 앞에 떨어져 내렸다.
한 손에 공허의 검을 든 엘리오였다.
“네가 마족 군주냐?”
눈치를 살피던 아스타로이드 족장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쳐 둘에게서 멀어졌다.
인간의 가슴 어림에서 반짝이는 검은 수정을 본 베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부라퀴족의 아티팩트로군. 너는 인간이냐? 부라퀴족이냐?”
“마족 군주냐고 물었다!”
베리스가 황당한 얼굴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당장 저 대가리를 부수고 싶지만 왠지 대답부터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나는 헬무트의 군주 베리스다. 너는 인간이냐? 부라퀴족이냐?”
베리스가 뚫어져라 상대를 보았다.
자신이 양보를 했으니 이제 상대가 답할 차례였다.
“베리스? 알레크스나 탈린을 두고 왜 설산에 틀어박혀 있었던 거냐?”
계속된 질문에 베리스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질문에 나는 대답했다. 이번에는 네 차례다. 너는 인간이냐? 부라퀴족이냐?”
잠시 생각하던 엘리오가 답했다.
“나는 모쿠바스의 군주다.”
“역시 부라퀴족이었군. 그런데 왜 내 챔피언과 종들을 죽였나?”
엘리오가 검지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까딱였다.
“아니지, 아니지. 잘 생각해 봐. 이번에는 네가 답해야 할 차례야. 알레크스나 탈린을 두고 왜 설산에 틀어박혀 있었던 거냐?”
“아, 그거?”
“그래, 그거.”
베리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적당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특히나 부라퀴족처럼 잔머리를 쓰는 마족이라면 절대 넘어가지 않을 터였다.
“솔직하게 말해 주지. 시에라 산맥을 지나던 중에 오니스토스 신전을 발견했다. 그래서 잠시 머물며 신전을 조사하던 중이다. 이제 내 차례지? 왜 내 챔피언과 종들을 죽였나?”
“그들이 먼저 나를 죽이려고 해서 반격한 것뿐이야. 나는 평화주의자라고. 오니스토스 신전이 뭔데 조사까지 하는 거야?”
상대의 뻔뻔한 대답에 베리스는 입술을 악물었다.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참았다.
모쿠바스의 군주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게 들은 바 있기 때문이다.
모쿠바스 전 군주인 몰록은 자신보다 강했다.
상대는 그 몰록을 쳐 죽이고 모쿠바스를 장악한 악독한 놈이었다.
“부라퀴족 출신의 군주가 오니스토스 신전을 모르다니 놀랍군.”
“놀라지만 말고 가르쳐 줘 바.”
“오니스토스는 티탄족의 신전이다.”
“아하! 티탄족의 신전에 대단한 게 있었나 보네? 맞지? 눈빛이 흔들리는 거 보니 맞네. 여기서 뭘 발견한 거야? 어차피 털어놓을 거 시원하게 말해 봐.”
엘리오는 빙글빙글 웃으며, 고압적인 눈빛으로 상대를 찍어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