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78
1478회. 누가 그대를 인간족 대전사로 임명했나?
경계병의 외침은 차분했다.
거리가 원체 멀기도 하거니와 위험 요소가 눈에 띄지 않은 까닭이다.
엘리오는 유심히 검은 산 일대를 살폈다.
방향 감각이 없을 뿐 기억력은 오히려 남들보다 나은 편이라 자부할 수 있다.
과연! 몇 군데가 눈에 익었다.
곧이어 오래전 기간타스의 대족장 헤카론을 만나러 가던 일이 하나씩 떠올랐다.
기간타스의 카락 족장과, 쿰…….
그리고 아스타로이드 족장의 딸이라던 아네트의 이름까지 생각났다.
‘조금 전에 아네트도 왔었을까?’
그녀가 왔다면 살아서 돌아갔기를 바랐다.
과거에 만난 기간타스와 아스타로이드의 이름까지 기억나자 그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내 머리가 나쁜 건 아니란 말이지.”
이세계에서야 겨우 5년이지만, 그에게는 팔십 년쯤 전의 과거니 큰소리칠 만했다.
싱크레어와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검은 산을 보다 말고 갑자기 머리 타령이니 그런 것이다.
싱크레어가 슬쩍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 검은 산을 보니까 예전의 일들이 떠올라서.”
“5년 전의 모험요?”
“어.”
“그런데 갑자기 머리 얘기는 왜 하신 거예요?”
“생생하게 떠오르니까 새삼 감탄한 거지.”
“…….”
싱크레어는 기막힌 눈으로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50년쯤 전이면 모를까? 5년 전의 일이면 당연한 건데 감탄까지?
둘의 대화가 끝나자 안나 사도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곳이 저 검은 산인가요?”
“예. 사도님이 신탁을 받은 곳과 닮았습니까?”
“아직 모르겠네요. 조금 더 가까이 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멀어서 아직은 산봉우리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니 그럴 만도 했다.
검은 산이라는 말을 들은 기사와 총사 들이 갑판으로 몰려 나왔다.
모두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고 있을 때다.
검은 산 앞쪽에서 뭔가가 마치 벌 떼처럼 솟구쳐 올랐다.
바아라크와 아스타로이드를 경험한 인간은 그들이 마족임을 알아차렸다.
경계병의 비명 같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마족! 마족이 몰려옵니다!”
이번에는 방향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이미 비공정에 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갑판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미친 듯 종을 쳤다.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약속한 타종 횟수를 넘어서도 멈추지 않는 걸 보니 꽤나 놀란 모양이다.
기사와 총사 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진 얼굴로 앞만 바라보았다.
뒤따르던 비공정이 어느새 앞으로 나와 일렬로 길게 늘어섰다.
전투에 대비해 진형을 갖춘 것이다.
선실에서 대기하던 마법사가 수정구를 들고 튀어나왔다.
“라고아 백작 각하, 총사령관께서 저 검은 산이 계시의 산이냐고 물으십니다.”
엘리오가 안나 사도를 대신해 답했다.
“안나 사도께서 거리가 멀어 아직 확인하기 어렵다고 하셨다.”
마법사가 수정구를 향해 라고아 백작의 말을 전했다.
수정구를 들여다보던 마법사가 다시 라고아 백작에게 물었다.
“각하께서 말씀하신 산이 저곳이냐고 물으십니다.”
“그건 맞다.”
마법사가 수정구를 향해 ‘맞으시답니다.’라고 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수정구를 응시하던 마법사가 엘리오에게 다가갔다.
“각하.”
“왜?”
“총사령관님께서 이번 전투를 각하께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해.”
엘리오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갔다.
자신은 정벌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맡긴다고 하니 부아가 난 것이다.
마법사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선실로 돌아갔다.
주변의 기사와 총사 들 역시 말없이 라고아 백작의 안색만 살폈다.
엘리오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아라크와 아스타로이드를 합친 숫자만큼이나 많은 마족이 몰려오고 있었다.
크나우프 대공이 힘든 전투를 이끌어 왔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직책만 참모일 뿐, 아무 권한도 없는 자신에게 이제 와서 전투를 맡긴다?
그것도 패할 것이 분명한 전투에서?
어쩌면 이 전투에서 인간은 몰살당할지도 모르는데?
헛소리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엘리오가 불쾌함을 감추지 않자 싱크레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짢아하지 마세요. 스승님 외에 희망이 없어서 그랬을 거예요.”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하지만 정벌군은 자신을 따돌렸다.
제국군의 신무기면 어비스를 정벌할 수 있다 믿었을 게다.
어비스가 악신 샤이틴의 근거지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계획대로 됐을 터였다.
하지만 어비스는 알려진 것처럼 단지 우샤스 운드라의 거처가 아니다.
어비스의 주인은 악신 샤이틴이다.
물론 마나 프트라스를 믿는 제국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상이겠지만, 손바닥으로 언제까지나 태양을 가릴 수는 없다.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는 법.
지금쯤이면 크나우프 대공도 어비스가 우샤스 운드라의 거처가 아님을 알았으리라.
어쩌면 어비스 정벌의 실패를 직감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크나우프 대공이 더 얄미웠다.
싱크레어라는 공동의 제자를 사이에 두고 자신과 말이 통할 줄 알았다.
실제로 그는 출정식 전에 찾아와 이런저런 주의를 해 주기도 했다.
그랬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참모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의 의견을 묻지 않았고 지휘권도 없었다.
심지어 같은 비공정에 타고 있는 제국군조차 그의 지휘를 받지 않았으니 말 다했다.
황제가 싫어하니 어쩔 수 없었을까?
자신에게조차 그렇게 대하면서 싱크레어의 권익은 어떻게 지켜 주려고?
이를 악물고 있던 엘리오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사와 총사 모두 자신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싱크레어와 안나 사도를 본 엘리오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저 두 사람만이라도 어비스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엘리오는 천천히 선수의 난간 위로 올라섰다.
크나우프 대공은 전투를 자신에게 맡긴다고 했지만 그건 의미 없는 소리였다.
지휘권이 없는데 맡기면 또 뭘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처럼 알아서 싸워 달라’는 말을 고상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엘리오는 토르누비스(운종술)로 만들어진 구름 위로 한 걸음 내디뎠다.
순간 기사와 총사 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윽고 엘리오를 태운 구름이 비공정 앞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엘리오는 최대한 앞으로 나아갔다.
비공정과 마족의 거리는 멀수록 ―포격이 가능한― 비공정에 유리한 까닭이다.
마족들에게 다가가던 엘리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뜻밖에도 마족들 사이로 마물들이 보였다.
상위 마족인 아스타로이드를 물리쳤으니 또 다른 상위 개채가 왔으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다.
살아남은 아스타로이드는 물론 바아라크까지 다시 왔다.
그들 사이로 자이언트 와이번과 와이번, 그리고 어마어마한 숫자의 팔렉스 멘티(거대 사마귀), 블랙 벌처(검은 독수리) 따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비행형 마족이 드무니 이해한다 쳐도 의외였다.
검은 산을 지척에 두고 있으니 마지막 전투라 생각해도 무방한데 마물이라니?
그때 아스타로이드 무리를 가르며 두 마족이 앞으로 나섰다.
아스타로이드와 드라고니안 족이었다.
‘군주들이구나.’
상급 마족인 아스타로이드에 비할 수 없는 존재감은 마족 군주가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스타로이드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키네로트 비슈니치 군주다. 그리고 내 옆은 히드록시 메네로제스 군주. 그대가 타메이온에서 온 군주인 엘리오 라고아인가?”
“그렇다.”
“이스칸다르에게 들으니 인간족 대전사라고?”
“그것도 맞다.”
“누가 그대를 인간족 대전사로 임명했나? 설마 마나 프트라스는 아니겠지?”
“나 자신이다.”
“…….”
키네로트와 히드록시가 기막힌 눈으로 엘리오를 보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인간족 대전사가 되었다니?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엘리오가 물었다.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이 근방에 다른 마족이 없나? 왜 아스타로이드와 바아라크뿐이지?”
히드록시가 되물었다.
“무슨 뜻으로 묻는 건가?”
드라고니안족인 히드록시의 얼굴에는 표정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엘리오가 파충류의 얼굴을 한 히드록시를 빤히 보며 말했다.
“바아라크와 아스타로이드는 어제오늘 비공정과 싸우다가 달아났다고.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상위 마족들이 몰려왔으려니 생각했거든. 그런데…….”
엘리오가 손으로 뒤를 가리켜 보였다.
히드록시가 차갑게 말했다.
“달아난 아스타로이드와 바아라크가 다시 왔다?”
“그렇지. 그 외의 마물들은 머릿수만 많을 뿐 존재감이 없잖나.”
엘리오의 말투에 여유가 묻어 나왔다.
마물이 새까맣게 몰려왔지만 제국군의 개량 마력포 한 방이면 가루가 될 터였다.
물론 마족 군주들과 아스타로이드, 바아라크족만 해도 어마어마한 전력이긴 하다.
그럼에도 예상보다 덜한 것은 분명했다.
이게 전부라면 정벌군에 희망이 있다.
어쩌면 비공정 한두 대는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참 희망찬 미래를 그리고 있는 엘리오에게 키네로트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대의 말대로다. 이 근방에서 비행 능력을 갖춘 상위 마족은 아쉽게도 아스타로이드와 바아라크 족뿐이라서. 거룩한 산에 있는 마족 군주도 나와 히드록시뿐이고. 저 비공정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거룩한 산 근처에도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부라퀴족 같은데……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구나.”
키네로트는 믿는 게 있는지 오히려 구름에 관심을 보였다.
“토르누비스라고 하는데…… 아마 처음 볼 거야. 나도 쓸 때마다 속으로 감탄하는 기술이라고.”
“놀라운 것을 보여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마지막 기회를 주지. 인간족을 데리고 돌아가라. 이곳은 인간족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엘리오가 단호하게 답했다.
“나도 인간족과 이곳에 살 생각은 없다. 검은 산에서 마력석만 부수면 돌아가도록 하지.”
“미쳤군. 설마했는데 정말 샤이틴님의 정수를 노리고 있다니. 마지막 경고다. 비록 그대의 능력이 마족 군주들 중에 뛰어나다고 하나…… 포기해라.”
“이봐. 여기까지 오는 동안 비공정 열두 척 중에 아홉 척이 파괴됐다. 검은 산을 눈앞에 두고 내가 돌아갈 것 같은가? 나도 경고하지. 나는 마족이나 군주 들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 살고 싶다면 비켜라.”
키네로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키네로트가 아홉 쌍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히드록시 또한 폴리모프를 이용해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했다.
먼저 화염검을 든 키네로트가 엘리오를 향해 날아갔다.
키네로트가 검을 휘두르자 화염과 벼락이 엘리오에게 떨어졌다.
엘리오는 공허의 검으로 화염을 박살 내고, 벼락은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피했다.
서로를 향해 날아가던 엘리오와 키네로트가 맞부닥쳤다.
곧이어 둘 사이에 검격이 오갔다.
공허의 검과 화염검이 부닥칠 때마다 천둥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꽝! 꽝! 꽝! 꽈앙―!
둘의 싸움이 어찌나 격렬했던지 히드록시는 멀찍이서 빙빙 돌기만 했다.
과거 아스타로이드 초월자와 싸운 적이 있던 엘리오는 군주를 상대로 방심하지 않았다.
어비스의 군주답게 키네로트는 강했다.
타메이온에서 만났던 마족 군주들보다 한 단계 더 높았다.
그 한 단계의 차이는 너무도 커서 엘리오조차 단숨에 상대를 제압하지 못할 정도였다.
놀라기는 키네로트도 마찬가지다.
아스타로이드족의 권능은 날개에서 나온다.
한 쌍의 날개마다 지고의 권능이 담겨 있는데, 무려 아홉 쌍을 다 썼음에도 버티기에 급급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저 타메이온의 군주가 자신보다 강함을 알아차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는 화염검으로 상대의 검을 쳐 낸 후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엘리오가 따라붙을 때, 기회를 엿보던 히드록시의 입에서 브레스가 쏟아져 나왔다.
화르르르륵―!
키네로트를 노리던 엘리오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브레스에 휩쓸리고 말았다.
비공정에서 지켜보던 기사와 총사 들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