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4
24회. 인생의 변곡점(變曲點)
두 여자가 구천세법의 일식을 배우는 데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무학에 갓 입문한 이들의 속도치고는 엄청나게 빠른 편이다.
연적하는 내친김에 ‘구천구검’의 일식인 ‘현녀강림’도 가르쳐 보았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겼다. 그가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해도 여자들이 익히지를 못했다.
뒤늦게 그는 구천세법에 통달해야 구천구검의 입문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연적하는 두 여자에게 구천세법의 일식을 전수하는 선에서 끝냈다. 와룡장도 마음에 걸렸지만 선녀의 무공을 도적들에게 가르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한채연과 하소백은 ‘백자구결’과 항마도법, 그리고 한 개의 초식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
꽃 피는 오월이 됐다.
그동안 오봉산채의 살림은 더욱 풍족해졌다. 오봉산을 오고가는 상인들이 늘어나서다.
오봉산에 녹림의 산채가 들어섰음에도 상인이 늘어난 건 이유가 있다.
다른 녹림도들은 재물을 탈탈 털어 가는 건 물론 심심풀이로 목숨까지도 빼앗았다.
흉신악살 같은 그들과 비교하면 오봉산채는 보살이었다. 상인들에게-짐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딱 은자 한 냥만 걷어 갔으니 말이다.
하남성 남부의 상인들은 안전하고 저렴한 오봉산을 거쳐 가길 원했다.
물론 수주의 만수상방은 예외였다.
***
수주 만수상방.
천지상인은 만수상방에 도착한 뒤로 무려 칠 일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광풍검객 상무천이 먼저 여독부터 푸시라고 강권한 때문이다.
상방의 방주 곽자의는 그를 지극히 모실 뿐 오봉산 토벌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천지상인을 만난 날 ‘토벌은 이제 끝났다’고 믿은 까닭이다.
팔 일째 되던 오월 오 일.
아침 일찍 점괘를 뽑아 보던 천지상인이 ‘길하다’고 일갈한 뒤 방을 나섰다.
얼마 후 만수상방의 정문으로 인마(人馬)가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천지상인과 상방의 무사 칠십여 명이 토벌에 나선 것이다.
만수상방 무사들은 자신들이 무당파의 제자라도 된 듯 목에 잔뜩 힘을 주고 걸었다. 좋게 말하면 위풍당당, 나쁘게 말하면 호가호위(狐假虎威)다.
만수상방의 움직임은 목격자들의 입을 통해 널리 전파됐다.
“만수상방이 오봉산채의 토벌에 나섰다!”
“총대주 광풍검객 상무천이 그의 스승인 천지상인을 모시고 왔다!”
***
소문은 하루 만에 오봉산채에도 전해졌다.
얼마 전에 완공된 상화각(相和閣)으로 도적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 나온 소처럼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봤다.
상석에 앉아 있던 채주 풍연초가 입을 열었다.
“형제들, 만수상방이 우리를 치러 오는 중이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무당파의 천지상인까지 끌어들였다고 한다.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천지상인이라는 엄청난 별호 앞에서 도적들은 말없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넷째인 허임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큰형님, 당장 내일이면 상방 놈들이 도착할 텐데……. 다른 곳으로 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풍연초는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상화각이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머리를 긁적이던 풍연초의 시선이 문득 구밀복검 심양각을 향했다.
지난번 남양상방이 쳐들어 왔을 때처럼 그에게 묘수가 있을까?
“거기 심 노제, 좋은 수가 있으면 좀 알려 주게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심양각은 냉소를 쳤다.
“흥! 천지상인과 같은 노괴를 요행이나 꼼수로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턱도 없는 소리.”
화가 난 부채주 탁고명이 쏘아붙였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정말 몰라서 묻느냐? 오봉산채는 끝났다고 봐야 한다.”
이미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한 심양각은 속에 있는 말을 감추지 않았다.
심양각 정도 되는 마두가 끝났다고 하자 산적들이 웅성거렸다.
“이제 어떻게 하지?”
“어쩌긴 튀어야지.”
“어디로?”
“알 게 뭐야. 어디든 가야지.”
두런거리던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졌다. 어떤 이는 함께 달아날 사람을 모으기까지 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풍연초가 소리쳤다.
“자! 자! 조용! 조용!”
그제야 산적들이 하나 둘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아직은 풍연초가 채주였으므로 그의 지시를 따라야 했던 것이다.
“연 아우 생각은 어떤가?”
도적들의 눈이 일제히 연적하에게로 모아졌다.
그들은 어디로 가게 되는 연적하와 함께할 생각이었다. 연적하만 있다면 다른 곳에 가더라도 큰 어려움이 없을 테니까.
“모르겠는데요.”
나이도 어리고 세상 경험까지 일천한 연적하에게 묘수가 있을 리 없다.
그래도 막상 저런 한심한 소리를 듣게 되자 도적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실망한 도적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할 무렵.
때를 기다리며 참아 왔던 무영신투 백교가 섭선을 펼쳐 흔들며 말했다.
“흐흐, 풍 채주. 뻔한 답을 앞에 두고 시간 끌지 맙시다. 서둘러 다른 곳으로 산채를 옮기든지, 쪼개지든지 이 자리에서 양자택일합시다.”
탁고명이 격앙된 음성으로 되받았다.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천지상인이 또 찾아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요?”
“헐! 산적질 하루 이틀 하나? 그런 걸 묻게. 다른 곳으로 또 옮겨야지.”
“아니 씨벌! 그러니까 천지상인을 피해 계속 떠돌아다니자는 거요? 다른 녹림 산채들도 그렇게 합디까?”
탁고명이 욕까지 하며 거칠게 항의하자 백교의 눈알에 살기가 감돌았다. 연적하만 아니었으면 달려가 주둥이를 찢어 버렸을 것이다.
“쯧쯧! 아무리 칠파이문이라 해도 유명한 산채는 건드리지 않는다. 나중에 복수한다고 물고 늘어지면 귀찮아지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복수할 능력도, 뒤를 봐줄 산채도 없다. 천지상인도 그걸 아니까 끼어든 거고. 주제를 모르고 설치다가는 비명횡사하느니라.”
이번에는 탁고명도 씩씩거리기만 할 뿐 반박하지 못했다.
분하지만 백교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길! 일 년만 시간이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산채에 고수가 별로 없다는 게 문제다. 아니, 하다못해 녹림대회에 참석해 인근 산채와 안면만 텄었어도…….
두 사람의 설전을 보던 풍연초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새로 지은 집과 전각을 생각하면 남아야 하지만, 그랬다가는 죽을 게 뻔하다.
마음은 탁고명과 같은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백교의 말대로 비명횡사다.
달아날까? 아니면 버텨 볼까?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갈등하고 있는 풍연초를 지켜보던 독심낭인 황요명이 삐딱하게 말했다.
“거참! 고민할 게 뭐가 있나? 백 형님 말씀이 전부 맞구먼. 천지상인이 오고 있다는데 무슨 뜸을 그렇게 들여.”
황요명의 말은 갈수록 짧아졌다.
반말인지 혼잣말인지 애매한 상황이지만 그걸 따지고 들 도적은 없었다.
그때 셋째인 마형도가 탁고명의 편을 들었다.
“큰형님! 지난번처럼 입구를 틀어막고 천지상인의 면상이라도 한번 봅시다. 소문만 듣고 산채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억울하잖소?”
역시나 황요명이 바로 걸고 넘어갔다.
“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쇼. 그러다가 진짜 천지상인이 오면? 우리 같은 하수가 천지상인 앞에서 달아날 수나 있을 것 같소?”
황요명의 날카로운 지적에 도적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상석에 앉은 풍연초만은 예외였다.
그는 단지 소문에 넘어가 산채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오봉산채에 쏟아부은 정성이 너무 아까웠다. 기껏 달아났는데 천지상인이 오지 않으면? 그때는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풍연초는 저도 모르게 연적하를 바라보았다.
연적하가 잠깐이라도 천지상인을 막아 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달아날 시간을 벌 수 있을 텐데.
“연 아우, 혹시 말이야. 아니, 아니야.”
말하다 말고 풍연초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연적하라고 해도 천지상인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 그는 괜히 앞날이 창창한 연적하를 사지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뭔데 그래요?”
연적하가 관심을 보이자 풍연초는 그만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천지상인이 올라온 걸 확인하고 달아나도 괜찮겠다 싶어서. 아우가 잠시 뒤를 막아 줄 수 있을까? 무리하면서까지 할 생각은 하지 말고.”
잠시 생각하던 연적하가 되물었다.
“형님, 그 천지상인이라는 도사요. 풀잎으로 사람을 벨 수 있어요?”
고수냐는 질문이다.
하지만 풍연초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정도는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천지상인이 유명하지만 ‘풀잎으로 사람을 벴다’는 소문은 아직 없었다.
“그렇다면 잠깐 정도는 막을 수 있어요.”
“정말?”
풍연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연적하가 시간을 벌어 준다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까닭이다.
다소 들뜬 풍연초에게 심양각이 찬물을 끼얹었다.
“풍 채주! 그의 무공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달아날 만큼의 시간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 생각이냐?”
백교도 냉소를 쳤다.
“흥! 반각(약 7-8분)이나 버티면 다행이지. 도망갈 수 있으면 내가 개새끼다.”
그러나 마음을 정한 풍연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형제들! 나는 소문만 듣고 산채를 버릴 생각이 없다. 끝까지 남아서 적의 면상을 확인할 것이다. 강요하지는 않겠다. 나와 함께 남을 사람은 남고, 떠날 사람은 떠나라.”
풍연초의 선언에 상화각이 발칵 뒤집혔다.
“남으면 죽습니다. 그냥 갑시다.”
“가야 돼. 무당파는 상방 나부랭이들과 달라.”
“젠장, 누가 채주님 좀 말려 봐.”
“몰라. 난 갈 거야.”
시간이 지나자 도적들은 자연스럽게 두 패로 나뉘었다.
남겠다는 풍연초보다, 떠나겠다는 심양각과 백교 쪽으로 훨씬 더 많은 도적이 몰렸다.
심양각의 눈이 풍연초의 옆에 꽂혀 있는 오봉산채 깃발로 향했다. 깃발에 욕심이 났지만 풍연초가 저것까지 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쯧! 우리가 오봉산채의 주력이라고 내세우려면 저게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깃발은 나중에 다시 챙기러 와야 할 것 같다.
심양각은 풍연초 일행이 토벌대의 손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무당파 고수들은 사파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으니까.
패가 완전히 갈리자 황요명이 심양각과 백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형님들, 가시지요.”
심양각과 백교를 필두로 이십여 명의 도적들이 상화각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천기덕이 친구 이철산의 팔뚝을 툭 건드렸다.
“가자.”
“…….”
그런데 웬일인지 이철산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해? 안 가?”
“……어.”
“무슨 소리야? 안 가면 죽어, 새끼야. 너도 눈이 있으면 남아 있는 사람들을 좀 봐. 연 형님 하나 빼면 죄다 별 볼 일 없잖아. 어리바리하게 굴 때가 아냐.”
그래도 이철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시선은 한채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제야 천기덕은 이철산이 한채연 때문에 남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너 혹시…….”
“걱정 마.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튈 거니까. 난 막거나 버틸 생각이 전혀 없거든.”
“와! 이 새끼. 여자한테 미쳤네. 난 갈란다. 따라오든 말든 알아서 해라. 세상에 여자가 저년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미쳤어. 미쳤어.”
천기덕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떠났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철산은 한채연의 곁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짝사랑에 눈이 먼 이철산은 몰랐다. 지금의 선택이 남은 그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거란 걸. 산적 이철산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왔지만 그의 눈은 한채연을 좇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