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3
23회. 중요한 거라서 강조한 것뿐이야.
광풍검객 상무천이 면목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제자가 불민하여 스승님께 폐만 끼쳐 드리는군요. 그래도 내일이면 수주에 도착할 겁니다. 그곳에서 며칠 푹 쉬시면서 여독 먼저 푸십시오.”
스승을 모시고 가는 상무천에게 오봉산채의 토벌은 고민거리도 아니다. 그의 머릿속은 ‘토벌이 끝나면 어디를 모시고 다녀야 하나?’로 가득했다.
“허허, 폐라니.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방바닥 삼아 떠돌던 때를 생각하면 호사니라.”
천지상인이 인자한 미소로 상무천을 바라보았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 오히려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할 판에 무슨 불평이란 말인가.
두 사제(師弟)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상무천의 안색이 찡그려졌다.
바로 옆자리에서 사내 셋이 떠드는 소리가 영 귀에 거슬려서다.
“이번에는 만수상방이 벼르고 있다면서?”
“나는 힘들 거라고 봐. 남양상방이나 만수상방이나 거기서 거기잖아. 톡 까놓고 남양상방이 안 되면 만수상방도 안 되는 거지. 안 그래?”
“그렇기는 한데…….”
“어허! 이 사람들 아직 소식 못 들었나 보네. 만수상방에서 무당파에 쪼르르 달려간 거 몰라? 무당파가 개입하면 그까짓 산채 하나가 문제일까.”
“헐! 정말? 그런데 무당파가 도와주겠어?”
“도와주겠지. 만수상방의 총대주가 무당파 출신이라잖아.”
“뭘, 그래 봤자 속가인데. 속가제자가 한둘도 아니고.”
“이 사람아. 만수상방에서 수가 있으니까 달려갔겠지. 장사꾼들 수단이 보통이야?”
“하긴.”
“좋은 시절도 다 간 거지. 무당파가 나서면 오봉산채의 풀뿌리까지 뽑힐걸?”
“난 그게 알고 싶어. 산채 하나를 토벌하겠다고 무당파 손을 빌려야 할 정도면 말야, 만수상방이 약한 거야? 아니면 오봉산채가 강한 거야?”
“어?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만수상방이 하남성에서 최고라고 큰소리 빵빵 쳤잖아. 거기 무사들이 얼마나 어깨에 힘주고 다녔어? 그런데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오봉산채가 무서웠다는 거 아냐?”
“거품이었던 거지.”
‘거품’이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상무천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 모습에 천지상인이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다니, 마음의 공부가 멀었구나. 이번 일을 수습하고 나면 폐관 수련이라도 하거라.”
“송구합니다.”
“그나저나 도적들 중에 제법 무공이 뛰어난 자가 있다는 게 사실이더냐?”
“남양상방의 총대주 경천검객 이무량은 화산파 유운 진인의 속가제자이옵니다. 그가 직접 토벌을 나섰는데도 실패한 것으로 보아…….”
“흐음, 신비 고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고?”
“별로 없습니다. 십 대의 소년이라고 하지만 나이를 직접 확인한 사람이 없습니다.”
“스승이 누군지도 모르겠구나?”
“만수상방에서는 혹시 파천마군의 제자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파천마군의 별호 앞에 천지상인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간단히 생각하고 따라나선 일이 어째 조금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아닐 것이다. 파천마군에게 그런 제자가 있었다면 벌써 소문이 났을 테니까.”
파천마군의 성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천지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랑하기 좋아하는 그가 뛰어난 제자를 꼭꼭 숨겨 뒀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녹림에서 그만한 고수를 키워 낼 수 있는 자가 달리 없지 않습니까?”
“글쎄다.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많으니…….”
“만에 하나 도적이 파천마군의 제자라면 살수는 피하시는 게 좋겠지요?”
“그건 상방을 위해서냐? 아니면…….”
천지상인이 돌연 상무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심유한 눈빛에 상무천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고 깜짝 놀랐다. 여기서 무당파의 무자라도 꺼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았다.
“저어 그게, 녹림과 척을 지면 아무래도 상행이 불편해져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냐? 고려하마. 나 때문에 상 행이 불편해지면 안 되지. 암…….”
그제야 상무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방의 방주와 달리 스승은 속한 세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편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사실을 깜빡하고 실언할 때가 있다.
***
하남성.
보봉현 하가촌.
‘찬모를 구해 달라’는 채주 풍연초의 부탁을 촌장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건 하가촌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마을의 원로들은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들을 산채에서 돌봐 주겠다니 오히려 감사하다’고까지 했다.
‘제정신 가진 여자가 찬모로 오겠냐?’던 부채주 탁고명의 염려와 달리 찬모는 금방 구해졌다. 날품팔이로 근근이 연명하던 과부가 많았던 까닭이다.
최근 오봉산채의 호걸들이 하가촌에서 돈을 펑펑 쓴 것도 한몫했다. 만약 지난해에 ‘의식주 제공에 월봉까지 준다’는 소리를 했으면 헛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하가촌 사람들은 오봉산채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도 산채에서 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촌장은 지원자들 중 아이가 많이 달린 과부 다섯을 골라 산채로 올려 보냈다. 마을에서 걷어 먹일 입을 줄이겠다는 속셈에서다.
늘어난 군식구들 때문에 집을 세 채나 더 지어야 했지만 풍연초는 오히려 좋아했다. 삭막하기만 하던 산 채가 이제 겨우 사람 사는 곳같이 변했다나 뭐라나.
과부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은 모두 열두 명이나 됐다.
딱 하루가 지나자 아이들은 ‘꺄르르’거리며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마당 한구석에서 한채연과 하소백을 가르치던 연적하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쳤다.
“저리 가지 못해! 이놈 새끼들!”
아이들은 연적하의 사나운 눈빛에 찔끔 놀라 얼른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박도를 휘두르던 한채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오라버니는 애들이 싫은가 봐요?”
“어.”
“어머, 왜요? 귀엽지 않아요?”
“별로.”
연적하의 탐탁지 않아 하는 눈빛을 본 한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퇫!”
심지어 연적하는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 침까지 뱉었다.
한채연은 의외로 거친 연적하의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시비를 걸지 않으면 순둥이인 연적하에게 저런 모습이 있을 줄이야!
같은 마을 출신의 아이들이라 연민을 가지고 있던 하소백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아이들이 정말 싫으신가 보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세요?”
순간 연적하의 눈썹이 실룩거렸다.
유랑 걸식할 때 마을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피를 흘리던 게 떠올랐다. 지난여름 하가촌을 지날 때도 그랬다. 저 애새끼들 중에도 그날 돌 던진 놈이 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짜증 나지만 과거 일을 시시콜콜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 얘긴 그만하고, 이번에 배울 건 숨 쉬는 법이야. 그 전에 우선 삼백 자 법문을 외워야 해.”
이어 연적하의 입에서 구천여일진경 구백 자 법문 중 전반부 삼백 자가 흘러나왔다.
“구천기를 얻으려는 자는 스스로의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한다[九天氣得者 應如是降伏其心]. 구천기는 실도 없고 허도 없다[九天氣 無實無虛]…….”
한채연과 하소백은 정신을 집중했지만 반나절이 지나도록 백 자밖에 외우지 못했다.
연적하는 누굴 가르쳐 본 경험이 없는지라 더 이상 법문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을 다음 단계인 숨 쉬는 법으로 인도했다.
백 자 법문 덕분인지 첫 내가 공부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이내 깊은 호흡에 빠져들었다.
다른 사람이 무아지경에 든 모습은 연적하에게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무가에서 자랐지만 내가 기공의 수련 과정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 연적하다. 그런 그에게 여자들의 모습은 충격과 감동이었다.
물아일체가 된 인간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 모호하던 구절들이 좀 더 구체화됐다. 진즉 체득했어야 할 기본기를 거꾸로 배운 셈이다.
연적하는 여자들의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구천여일진경의 구결을 외웠다.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가장 먼저 눈을 뜬 사람은 무술의 기본기가 전혀 없는 하소백이었다.
그다음으로 한채연이 명상에서 깨어났다.
하소백이 반가운 마음에 소리치려 하자 한채연이 ‘쉿’ 하고 입 막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하소백은 연적하가 수련 중인 걸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고오오-.
한순간 연적하의 주변 공기가 진동했다.
곧이어 연적하의 몸이 한 뼘가량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머리 위로 청(靑), 적(赤), 백(白), 흑(黑), 황(黃)색의 꽃 다섯 개가 나타났다가 스르륵 사라지더니, 이내 황금색으로 빛나는 꽃 세 개가 피어 났다.
그러더니 이내 모든 기화(氣花)가 안개로 흩어져 사라지고, 연적하의 몸은 점차 있는 듯 없는 듯 허허로운 상태로 바뀌어 갔다.
처음 보는 기사에 두 여자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휘이이잉-.
연적하의 몸 주변으로 바람이 맹렬하게 휘도는가 싶더니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번쩍.
연적하가 눈을 뜨자 한순간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가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눈빛은 평범하게 가라앉았다.
두 여자는 그 놀라운 광경에 입을 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연적하의 몸에서 일어난 현상은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연적하는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계면쩍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아침저녁으로 법문을 암송하며 숨 쉬어야 해. 알겠지?”
“네!”
“네! 오라버니!”
두 여자가 결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열심히 하면 자신들도 강호의 여협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다.
흥이 오른 연적하는 두 여자에게 구천세법의 일식인 비룡승천을 가르치기로 했다.
“하나 더 가르쳐 줄게. 잘 봐. 이건 전에 배운 항마도법보다 복잡해. 구천세법의 일 초식 비룡승천이라는 건데. 먼저 기운을 끌어 올려서 손끝으로 보낸다고 생각해. 그다음 칼끝을 바닥으로 향하게 늘어트리는 거야. 기운이 손끝에서 칼로 흘러가는 게 느껴지는 순간 좌에서 우로, 다시 우에서 좌로 비스듬하게 베어 올리는 거야. 이렇게!”
말과 함께 연적하의 박도가 갈지자[之]형태로 솟구쳤다.
뒤이어 박도가 상단에서 부드럽게 반원을 그리더니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박도에서 쏟아져 나온 도풍이 정면으로 휘몰아쳐 갔다.
두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자루 박도가 만들어내는 신기한 광경에 빠져 들었다.
이 순간 연적하는 구천세법이 와룡장의 비전절기라는 생각은 까맣게 잊었다.
“검결에 보면 건과 곤, 음양이 바뀌고 어쩌고 하는 말이 있어. 그런데 그런 건 몰라도 돼. 그냥 기운을 끌어 올린 뒤에 쏟아붓는다고 생각해. 나도 처음에는 잘 몰랐거든. 그런데 어느 날…….”
연적하는 자신의 심득을 아낌없이 전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드러났다.
예컨대 연적하는 십 년 동안 창고에 갇혀 홀로 지냈다. 그러다 보니 말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무공 전수를 계기로 말문이 터져 버린 것이다. 십 년간 참고 있던 말은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 연적하의 숨겨진 무위에 놀란 두 여자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집중에도 정도가 있다.
지루한 설명이 무려 일다경(약 30분)을 넘기자 처음에 들은 말조차 가물가물해졌다.
참다못한 한채연이 끼어들었다.
“오라버니, 설명은 됐고 동작을 다시 보여 주세요. 너무 많은 말을 들어서 다 잊어버렸어요.”
그제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던 말이 뚝 끊어졌다.
“아, 그래. 그렇구나. 내가 좀 흥분했었나 보네. 구천기를 배우려는 자는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해 놓고. 아까 열심히 외운 백 자 구결 생각나지? 구천기는 실도 없고 허도…….”
“네, 네, 알죠. 제발 비룡승천을 다시 보여 주세요. 너무 어지러워요.”
“저도요. 오라버니. 머리가 막 아파 오려고 해요.”
얌전한 하소백까지 울상을 짓자 연적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중요한 거라서 강조한 것뿐이야. 지금부터 천천히 다시 보여 줄게.”
연적하는 초식을 펼치며 쉬지 않고 구결과 그 속에 담겨진 오의에 대해 설명했다. 두 여자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어려워서 그런 거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