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5
25회. 누구 앞에서 약을 팔아!
상화각에 남겨진 사람은 열 명.
채주인 풍연초와 여섯 의형제, 한채연과 하소백, 그리고 이철산이 그 들이다.
머리를 긁적이던 풍연초가 계면쩍은 얼굴로 말했다.
“고집부려 미안하고, 남아 줘서 고맙다.”
격동에 찬 풍연초는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의형제들과 연적하에게 무공을 배우는 여자들은 그렇다 쳐도 이철산이 좀 의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자신의 곁에 남은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서 풍연초는 이철산에게 더 고마움을 느꼈다.
“철산이……. 의리 있는 놈이었구나.”
풍연초의 감동 어린 눈빛에 이철산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잠시 후 감정을 수습한 풍연초는 사람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지난번 남양상방 때처럼 산채로 통하는 입구를 틀어막기 위해서다.
한 번 경험을 해서 그런지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풍연초와 남겨진 산적들은 입구는 물론 두 번째 벽까지 세울 수 있었다. 산채에 건축 자재가 남아 있어 시간이 단축된 것이다.
밤이 되자 오봉산채는 어둠에 잠겼다.
아침만 해도 사람들로 복작거렸는데 지금은 공동묘지처럼 조용했다. 찬모와 아이들까지 모두 내려 보낸 산채는 적막 그 자체였다.
풍연초는 마당에 모닥불을 피웠다.
잠자리가 뒤숭숭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하나 둘 모닥불 주위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풍연초가 자기 생각을 밝혔다.
“오늘부터 돌아가며 경계를 서는 게 좋을 것 같다. 내일쯤 도착할 테지만 급습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의 말에 도적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주까지 보통 이틀 정도 걸리지만 작정하고 서두르면 하루 만에도 갈 수 있었다.
“늙은 도사가 보이면 뒷길로 달아날 거니까 마음의 준비들 단단히 하고.”
“예, 형님.”
“두 눈 크게 뜨고 보겠습니다.”
풍연초가 착잡한 눈으로 아우들을 둘러보았다.
한때 중이었던 탁고명, 탈옥한 강도 마형도, 좀도둑 허임달, 화전민 출신의 곡산청과 장소봉. 돌이켜 보니 함께 어울린 세월이 벌써 오 년이다.
연적하를 이용하기 위해 의형제까지 맺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참 잘한 것 같다. 이들이 끝까지 자신의 곁에 남아 줄 줄은 몰랐다.
“내가 운이 좋은 사람 같다.”
풍연초의 마음을 알아챈 도적들이 피식 웃었다.
나뭇가지로 불더미를 헤집던 한채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큰 오라버니.”
“왜?”
“사람 차별하지 말고 우리도 의형제에 끼워 주세요. 어차피 죽든 살든 함께해야 하잖아요. 네에?”
잠시 생각하던 풍연초가 다른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너희들도 채연이와 뜻이 같으냐?”
“네!”
“예.”
하소백이야 평소 원하던 바였지만, 이철산은 분위기에 휩쓸려 냉큼 대답했다. 이런 자리에서 혼자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흠! 그래? 나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아우들 생각은 어떠냐?”
여섯 명의 의형제들은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저 셋은 산채에 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형제가 될 자격이 있었으니까.
“좋아, 좋아. 앞으로 철산이가 여덟, 채연이가 아홉, 소백이가 막내다.”
그렇게 해서 의형제는 열 명으로 늘어났다.
거창하게 의형제를 맺는 의식도 없었지만 한채연은 싱글벙글 했다. 풍연초와 여섯 의형제도 이런 식으로 대충 뭉쳤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격식을 아는 도적이 있었다면 삼국지의 도원결의(桃園結義) 흉내를 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풍연초는 물론 다른 도적들도 수준이 낮아 부족함을 몰랐다.
연적하도 늘어난 의형제들이 싫지 않았다.
그에게 의형제란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 친한 사람이었다. 도적들이 습관적으로 말하는 형제, 식구 따위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 말이다.
***
다음 날 저녁, 만수상방의 토벌대가 하가촌에 도착했다.
총대주 광풍검객 상무천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숙소를 구하는 것이었다. 하가촌의 객점이 토벌대 칠십 명을 수용할 수 없어서다.
그는 일단 객점의 빈 방을 천지상인과 대주들에게 배분했다. 그리고 다른 무사들의 잠자리를 위해 촌장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녔다.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상무천과 두 명의 대주들은 숙소 배치를 가까스로 마무리하고 객점 식당에 모였다. 뒤로 미루었던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숙소에서 쉬고 있던 주방장은 세 사람을 위해 다시 불려 나왔지만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만수상방이 객점의 큰 손님인 까닭이다.
소박한 저녁을 앞에 두고 백랑대 대주 강무덕이 말했다.
“동 대주님, 아까 촌장의 얼굴 봤습니까? 완전히 똥 씹은 표정이던데…….”
흑웅대의 대주 대력권 동학수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산적들을 토벌해 주러 왔는데 왜 그렇게 불퉁스러운지 원.”
두 사람이 툴툴거리자 총대주 상무천이 피식 웃었다.
“그야 늦게 찾아와 집을 빌려 달라고 하니 난처했겠지. 우리를 안내한다고 촌장도 늦게까지 고생했으니 너무 뭐라 하지 마시게들.”
“누가 공짜로 쓴답니까? 돈도 넉넉히 쥐어 줬는데…….”
“배가 부른 거지요, 배가.”
총대주의 만류에도 두 대주는 촌장의 뒷담화를 멈추지 않았다. 만수상방의 대주로 다니면서 푸대접은 처음이라 충격이 컸던 것이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누군가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힐끔 돌아보던 상무천이 알은척을 했다.
“백 대주? 반갑소이다.”
인근 동백현 백화상방의 화풍대주 백안기가 세 사람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늦은 시간에 누구신가 했더니 만수상방의 분들이셨군요.”
네 사람은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최고 연장자인 상무천이 먼저 운을 뗐다.
“오늘 상방이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예까지는 어쩐 일이시오?”
상무천은 ‘백화상방이 염탐을 하러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양상방이 하가촌에 토벌대를 보냈을 때 만수상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건 상무천의 오해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백안기가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주님의 지시로 새로운 상로를 알아보러 다니는 중입니다. 아, 만수상방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염탐 따위를 위해 온 게 아니라는 소리다.
상무천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백화상방에서 오봉산로를 염두에 두고 있었구려. 내일 좋은 소식이 들려올게요.”
“아무쪼록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만.”
백안기는 읍을 하고 돌아섰다.
숙소로 걸어가는 그의 표정은 어딘지 착잡해 보였다. 정말 괜찮은 상로라기에 확인하러 왔다가 토벌대를 만났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 속도 모르고 강무덕이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재주는 우리가 부리고 돈은 백화상방이 벌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무천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말게. 어차피 우리는 상단 호위만 책임지면 되니까. 장사는 상인들의 몫이 아니던가. 상로의 문제는 방주들이 알아서 잘 풀어 나갈 걸세.”
묵묵히 차를 마시던 대력권 동학수가 강무덕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강 대주님, 오봉산채의 그 어린 도적 말입니다.”
“예”
“천지상인 선배님의 손에서 몇 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상무천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강무덕의 입을 주시했다.
오봉산의 어린 도적과 직접 칼을 맞대 본 그의 평가가 궁금해서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무덕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글쎄요. 오 초? 십 초? 이십 초?”
한참 만에 답하는데 그나마도 계속해서 의문형이다.
그 말은 얼마나 오래 싸울지 가능할 수가 없다는 소리다.
상무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강무혁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답답하던 속은 조금씩 불편함으로 바뀌어 갔다. 저건 존경하는 스승님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무덕은 끝내 상무천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잠자리에 든 강무덕은 식당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엎치락뒤치락했다.
물론 자신도 총대주의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어린 도적의 무위를 알아야 대충 짐작이라도 할 게 아닌가 말이다!
***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만수상방의 토벌대는 대오를 갖추고 기세등등하게 오봉산을 올랐다.
한 시진쯤 지났을까?
이미 중턱을 넘어선 지 오래건만 산적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흑웅대 대주 동학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푸허헛! 도적들이 벌써 다 내뺀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요?”
백랑대 대주 강무덕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토벌대의 위세에 눌린 도적들이 산채를 버리고 달아나는 일은 종종 일어나니까.
상방 무사들 사이에서도 두런두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흐트러지는 듯하자 총대주 상무천이 가볍게 주의를 주었다.
“경계를 늦추지 말게. 지금까지 녹림이 싸우지도 않고 산채를 비운 일은 없었네.”
동학수와 강무덕이 뻘쭘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건 맞는 말이다. 그게 녹림도가 일반의 산적들과 다른 점이다. 녹림 채주들은 무림의 명숙들만큼이나 체면을 중시 여겼다.
토벌대의 기나긴 행렬이 멈췄다.
잠시 후 선두에 있던 무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길이 통나무로 막혀 있습니다.”
두 명의 대주들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던 상무천이 앞으로 나섰다.
과연 좁은 오르막길이 통나무들로 꽉 막혀 있었다.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통나무로 쌓은 목책 위로 다섯 자루의 날선 극(克)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가소롭게도 오봉산채의 도적들은 달아나는 대신 싸우기로 한 모양이다.
상무극이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노부는 만수상방의 총대주 상무이오! 달아나지 않은 용기는 가상하나 오늘 부득이 살계를 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오.”
무당파 속가제자답게 상무극의 인사는 살벌한 가운데 정중했다.
잠시 후 목책 위로 풍연초의 머리가 올라왔다.
“나는 오봉산채의 채주 풍 모라고 하는 분이시다! 상무천 이 후레자식아! 무당파에 울고불고 매달려 천지상인을 데리고 왔다는데 사실이냐!”
큰소리와 달리 풍연초의 두 눈은 부지런히 토벌대를 훑고 있었다.
그런데 몇 번을 다시 봐도 도사로 보이는 이가 없다.
‘만수상방의 거짓말에 속았다’고 생각한 풍연초는 바로 욕을 쏟아 냈다.
“이런 개만도 못한 새끼들아! 지금 누구 앞에서 약을 팔아! 우리가 그 노망난 늙은이에게 쫄아서 달아날 것 같더냐! 아서라! 병신들아! 천지상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놈이 와도 끄떡없다!”
천지상인이 없다고 생각한 풍연초는 토벌대를 향해 ‘껄껄’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풍연초의 망발에 놀란 상무극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스승의 청명(淸名)에 똥물이 뿌려졌다’고 생각하니 손이 덜덜 떨렸다.
녹림의 거마들도 감히 저런 짓은 하지 않는데, 이 무슨 벼락 맞아 죽을 소리란 말인가! 살려 달라고 눈물을 쏟아야 할 놈이 대체 무슨 깡으로?
‘헉! 안 계신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있던 스승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기는 두 명의 대주들도 마찬가지.
천지상인이 귀신처럼 사라져 버리자 대주들의 머리가 빠르게 좌우로 돌아갔다.
그때다.
“갈(喝)!”
천지를 뒤흔드는 웅혼한 호통과 함께 통나무 벽 위로 누군가 떨어져 내렸다. 단숨에 오 장(약 15미터)여 거리를 날아간 무당파 장로 천지상인이었다.
그가 가볍게 손을 떨치자 다섯 개의 극이 뎅겅 잘려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천지상인의 발이 목책에 닿았다.
꽈르릉.
무지막지한 내가진력에 통나무가 터져 나가며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모두 풍연초가 단 한 번 호흡할 동안에 생긴 일이다.
천지상인과 눈이 마주친 풍연초는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어 버렸다.
젓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