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68
268회. 욕을 먹고 살아남는다.
대체로 도둑들은 촉이 발달되어 있다.
좀도둑도 그럴진대 하물며 무영신투 백교는 하남성에 이름난 대도다.
그는 본능적으로 저 중년의 사내가 이상함을 알았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자 비무장을 했음에도 오싹 소름이 끼쳤다.
어쩌면 그는 권법이나 장법의 고수일 수도 있었다.
단지 상대가 도검을 들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되는 것이다.
백교는 마루에서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더불어 저 정체불명의 사내를 실내에 들이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내려가지 않겠지만, 네가 가까이 오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허! 보기보다 담이 작으시군요.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이만 냥은 없던 일로 할까요? 그걸 원한다면 나는 이대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상대의 도발에 백교는 잠시 망설였다.
이만 냥을 포기하느냐 마저 받느냐의 기로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때 사내가 몸을 슬쩍 틀었다.
때로는 이런 작은 몸짓이 대답을 재촉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역시나 백교가 곧바로 반응했다.
“잠깐!”
“마음이 다시 변하신 겁니까?”
사내의 능글맞은 질문에 백교가 실실 웃으며 답했다.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래. 전표는 그 자리에 두고 가야지. 안 그래?”
“아!”
짧은 탄성을 흘리던 사내가 품에서 전표를 꺼내 지면에 내려놓았다.
“자아, 해 달라는 대로 했습니다. 이후로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당에 덩그러니 놓인 전표가 아니라면 꿈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행동 전환이 빨랐다.
그러나 백교는 사내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마루에 서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마치 마루를 떠나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일각(15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안전을 확신한 백교가 조심 스럽게 마당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곧바로 전표를 낚아채 눈앞으로 가져왔다.
액수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순간 전표에서 야릇한 냄새가 맡아졌다.
“이런 씨벌…….”
불길한 예감에 백교는 전표를 내던졌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머리가 띵해지더니 사지가 마비됐다.
제갈가의 사자가 독을 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게 실수였다.
이윽고 백교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가 쓰러지자 기다렸다는 듯 사내가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사내는 백교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 전표를 회수했다.
“아슬아슬했군. 늙은 여우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곤란할 뻔했어.”
일단 공기 중에 노출된 독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진다. 백교가 일각만 더 시간을 끌었더라면 결과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윽고 사내는 전표를 가죽 주머니에 담은 뒤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이제 끝난 건가.”
씁쓰름한 눈빛으로 백교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무심코 귀밑을 긁적였다.
그의 손끝에 쓸린 인피면구가 가볍게 달싹였다.
사내, 신기수사 제갈승운은 방으로 들어가 요란하게 뒤집은 뒤 조용히 사라졌다.
***
정오 무렵.
시골길 위로 이백여 명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호두산을 향해 가고 있는 천지맹 주작대의 고수들이다.
길잡이로 고용된 촌민, 오삼이 요두촌이라 적힌 표시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요두촌이면 호두산 아래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제 한 식경(약 30분) 정도만 가면 호두산이 보일 겁니다. 호두산이 보이는 곳까지만 안내하면 된다고 하셨지요?”
오삼은 천지맹 사람들의 길 안내가 부담스러운 표정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검왕 남궁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호두산이 보이면 돌아가셔도 좋소.”
관도를 따라갔다면 길잡이는 필요 없었다.
길잡이를 고용해 알려지지 않은 길로 갈 것을 권유한 사람은 화용독심 남궁연이다.
덕분에 조금 돌기는 했지만 적의 허를 찌르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선우세가 가주 환우검 선우담이 남궁벽에게 다가갔다.
“남궁 가주, 이번 출정이 영 마음에 걸리는데 묘수가 있소?”
“저야 연아가 하자는 대로 할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제 머리에서 묘수는 무리인지라.”
선우담의 나이가 많아 남궁벽은 존대를 했다.
“훌륭한 딸을 둬서 부럽소. 그래서 말인데 내 아들 녀석이 부족하지만 어떻소?”
“하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혼사만큼은 자식들의 뜻에 따를 생각입니다. 어른들 뜻에 따르다가 실패한 사람을 보아서요.”
물론 참월검객 연무룡의 삶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연무룡이 사랑하는 여자와 혼인했다면 한눈파는 일도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도 죽은 부인만 생각하듯 말이다.
“어허. 다시 생각해 보시오. 자식들 혼사는 부모가 정해야지.”
호형호제가 실패한 뒤로 선우담은 혼례로라도 남궁세가와 엮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남궁벽은 요지부동이었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다른데 어찌 제 뜻대로 자식들의 짝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어허. 혼인이 뭐 별거라고. 대충 한 이불 덮고 자면서 자손이나 생산하면 그만인 것을.”
“선배님이 우리 연이를 씨받이 정도로 생각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차가운 남궁벽의 말에 선우담은 제 입을 후려쳤다.
“어이쿠! 주절주절 떠들다 보니 말이 헛나왔소. 천하의 십전무후를 씨받이로 생각하면 미친놈이지. 그냥 혼인이 대단한 게 아니라는 뜻에서 말하다 보니 그리된 것이오.”
남궁벽 역시 선우담의 본심을 아는지라 더 뭐라 하지 않았다.
민망해진 선우담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십전무후가 연적하와 늘 붙어 다니는 것 같던데. 둘이 어떤 사이요?”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사이좋은 의남매지요. 적하의 선친이 제 의제(義弟)가 아닙니까? 어릴 때부터 둘의 인연이 좀 남달랐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꽤나 잘 어울려 보이는데. 혹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그런 거라면 미리 말해 주시오. 아들 녀석에게 꿈도 꾸지 말라고 할 테니.”
선우담의 말에 남궁벽은 힐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궁연과 연적하가 나란히 걷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딸의 얼굴을 보니 전에 없이 환하고 밝았다.
연적하와 함께 있으니 비로소 그 나이 또래의 아가씨들처럼 보였다.
‘연이가 적하와?’
물론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것도 두 사람이 남녀의 정으로 서로를 대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자신의 눈에 딸은 가족처럼 적하를 대하고 있었다.
그의 불운한 과거를 알기에 더 연민을 느껴 잘해 주는 것이리라.
“선배님,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자식들의 혼사에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습니다. 사윗감으로 누군가를 생각해 본 적도 없고요. 지금의 남궁세가는 한가하게 그런 일에 관심을 둘 상황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남궁벽이 정색을 하자 선우담은 더 이상 자식들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의 남궁세가에 자식들의 연애사는 사치라 할 수 있었다.
‘쩝. 그래도 십전무후는 정말 욕심이 나는데…….’
지금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더더욱 남궁연이 탐난다.
그는 남궁연의 옆에서 재잘대고 있는 연적하를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저놈은 뭔데 저렇게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건지 원.’
녹림도라 그런지 연적하는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기는 남궁연도 마찬가지다.
천하에서 가장 지혜로운 여자이니 둘의 사이가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임을 알 것이다. 그런데 왜 저놈과 거리를 두지 않는지 모르겠다.
‘거참. 누구 말이 맞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선우담의 눈에 기이하게 생긴 산이 들어왔다.
때마침 길 안내를 하던 오삼이 말했다.
“어이쿠! 이제야 잘 보이네. 나리님들. 저 앞에 있는 산이 바로 호두산입니다. 얼핏 보면 호랑이 머리를 닮지 않았습니까? 그놈 잘생겼다.”
오삼이 호두산을 가리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남궁벽이 뒤따르던 창천대 대주 척사검 남궁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진은 지니고 있던 전낭(錢囊)에서 은자 세 냥을 꺼내 오삼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허리를 굽실거리던 오삼은 누가 잡을세라 후다닥 왔던 길로 달려갔다.
막상 호두산에 이르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총사는 호두산에 십두마병이 몇이나 있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저 ‘일부가 옮겨 갔다’고 했다.
십두마병의 무위를 경험한 사람들은 특정되지 않은 숫자에 큰 부담을 느꼈다.
유명교와 싸워 본 적이 없는 인대(人隊)만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남궁벽은 남궁연을 가까이 불렀다.
“연아야.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호랑이를 잡기 위해 굳이 호랑이 굴로 갈 필요는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주작대와 인대 고수들이 하나 둘 남궁벽과 남궁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아버지는 살아남아서 욕을 먹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명예롭게 죽기를 바라시나요? 그건 여러분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에요. 욕먹더라도 살고 싶으세요? 아니면 오늘 깨끗하게 죽고 싶으세요?”
남궁연의 돌발적인 질문 앞에 고수들은 눈만 끔뻑거렸다.
사파인 인대 고수들이 가장 먼저 답했다.
“당연히 살아야지요!”
인대의 대주 경혼사군이 스산한 눈빛으로 주작대를 둘러보았다.
“남궁 소저, 웬만하면 함께 사는 길로 갑시다. 그래도 꼭 죽고 싶어 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소.”
“옳소!”
“죽고 싶으면 혼자 죽으라고 하십쇼! 우리는 살아야겠습니다!”
“씨벌! 살려 줘요!”
인대의 고수들은 필사적으로 악다구니를 썼다.
행여나 정파 특유의 대의(大義) 어쩌고에 휘말려 사지로 걸어 들어갈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남궁연이 남궁벽에게 다시 물었다.
“아버지의 뜻은요?”
삽시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정사파 고수들은 대주의 결정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는 걸 알고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남궁벽이 물었다.
“명예로운 길로 가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이냐?”
“네.”
망설임 없는 남궁연의 대답에 주변에서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불통지, 십전무후의 확언인지라 모두가 절망했다.
더구나 자신의 부친인 남궁벽에게 하는 말이니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살기 위해 호두산의 적을 치지 않겠다는 소리면, 듣지 않겠다.”
대협객인 남궁벽은 그렇게까지 비겁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적과 틀림없이 싸울 거예요. 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욕을 먹게 될 뿐이죠.”
“그런 거라면 상관없다. 적과 싸우다가 욕먹는 거라면 두렵지 않다.”
남궁벽의 결정에 정사파 고수들은 일제히 ‘와아!’하고 환호성을 터뜨렸다.
정파의 고수들도 어지간히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욕을 먹으면서 싸워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이냐?”
순간 이백여 명의 정사파 고수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남궁연의 입에 주목했다.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를 쓰세요.”
남궁벽과 선우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로부터 벼슬아치는 인장(印章)에 의지하고 호랑이는 산에 의지한다는 말이 있다.
관리들의 힘은 인장에서 나오고, 호랑이의 힘은 산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조호이산지계는 ‘호랑이를 산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적을 유리한 지형에서 끌어 내려 싸우기 위함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조금 뜬금 없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호두산은 유명교나 자신들에게 유불리를 따질 만한 곳이 아닌 까닭이다.
이리저리 경우의 수를 따져 보던 선우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저, 우리같이 칼질이나 하는 사람들은 더 쉽게 설명을 해 줘야 알아듣는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