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94
294회. 어머니, 합일과 바치는 것은 달라요.
최근 무상도제 장무덕과 곤륜삼선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인생무상에 빠져 있던 장무덕에게 비슷한 연배의 곤륜삼선은 좋은 말동무였다.
그건 곤륜삼선도 마찬가지다.
강호 사정에 어두운 그들에게 장무덕의 조언은 큰 도움이 됐다.
소란을 지켜보던 태령 선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 대협, 십이마군이 본래 저런 사람들입니까?”
“저렇다는 게 무슨 말이오?”
“명성에 비해 언행이 가벼운 것 같아서요.”
“그건 아니오. 십이마군들은 일제를 풍미하는 마두들이오. 연 공자의 앞이라 몸을 사리는 것뿐이외다.”
“저건 사리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종인데…….”
“지은 죄가 있으니 더 그러는 게 아니겠소. 파천마군도 흑수선이 태어난 뒤로는 강제로 여자를 취하지 않는다고 하더이다. 이번에는 귀영자군이 무리수를 둔 것 같소.”
“무리수요?”
“강제로 여자를 범하게 만들었으니 파천마군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는 소리요. 이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파천마군도 많이 변해서.”
“정말 연 공자가 귀영자군을 죽일까요?”
“모르겠구려.”
장무덕도 그게 궁금하기는 했다.
연적하는 손속이 악랄하지만 쉽게 살인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간 저 둘에게 한 행동을 보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죽여 달라면서 손은 칼자루에 가 있네? 나하고 한번 해보자는 거지?”
연적하의 말에 귀영자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그냥 버릇일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귀영자군의 손은 검 손잡이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여차하면 발검을 할 기세다.
“그거 나쁜 손버릇이야. 죽고 싶으면 목을 늘이고 있어야지 안 그래?”
말과 함께 연적하가 귀영자군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귀영자군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딜 가? 죽여 달라면서.”
‘씨벌, 젓 됐다.’
귀영자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하게 나가면 타협할 줄 알았는데 연적하는 살인도 불사할 기세였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그가 떠올린 것은 습관처럼 입에 달고 있던 ‘사생결단’이었다.
‘해볼까?’
그의 눈이 번득였다.
사실 그는 연적하의 무위를 본 적이 없다.
음풍묘군이 연적하에게 패했지만, 음풍묘군은 자신의 아래였다.
십두마병의 척살은 제대로 된 법보만 있으면 술사들도 가능한 일이었다.
왠지 자신이 그에게 일방적으로 깨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순간이다.
시산마도 혁무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와 머리를 땅에 처박고 소리쳤다.
“아이고! 총순찰님!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뭐야? 왜 이렇게 질척거리는…….”
연적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다.
기회를 엿보던 귀영자군이 마침내 검을 뽑아 연적하를 베었다.
슈각-.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연적하가 당했다고 생각했다.
죽여 달라던 귀영자군이 뻔뻔하게 기습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영자군의 검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연적하의 몸이-마치 뒤에서 누가 잡아끌기라도 한 것처럼-뒤로 날아갔다.
양손이 옆구리에 붙은 걸 보니 저도 모르게 비연보를 펼친 모양이다.
검 끝에 잘려 나간 상의 틈새로 팔주령이 언뜻 보였다.
“씨발! 깜짝이야!”
욕설과 함께 연적하는 황급히 가슴을 더듬었다.
팔주령 한가운데 세로로 길게 패인 상흔이 만져졌다.
뼈가 잘린 게 아니라 팔주령이 긁히면서 기이한 소리를 냈던 모양이다.
귀영자군은 일검이 빗나갔음에도 연적하를 따라붙지 않았다.
그와 자신의 거리가 무려 오 장(약 15미터)이나 벌어진 까닭이다.
‘미친! 저건 무슨 보법이지?’
찰나지간에 벌어진 거리를 보니 이형환위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속도다.
어차피 연환 공격은 물 건너간 상황.
귀영자군은 검 끝으로 연적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연적하! 너는 총채주님의 대제자이자 순찰인 나를 욕보였다. 그건 총채주님을 능멸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후로 십이마군은…….”
“지랄!”
귀영자군의 말을 끊고 연적하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뒤이어 연적하와 귀영자군의 검이 빠르게 얽혔다.
차차차차창-.
귀영자군은 태풍처럼 몰아쳐 오는 검을 미친 듯 걷어 냈다.
어찌나 빠르고 무자비한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쩡-.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귀영자군의 몸이 서너 걸음 뒤로 밀렸다.
귀영자군은 어깨를 들썩이며 격하게 숨을 내뱉었다.
“헉헉!”
문득 손아귀가 따끔거려서 내려다보니 길게 찢어져 있다.
연적하의 검에 실린 힘이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미처 숨이 가라앉기도 전에 연적하가 거리를 좁혀 왔다.
그의 입은 조개처럼 꾹 닫혀 있었다.
자신과 달리 아직 체력에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어린놈의 공력이 어떻게…….’
없던 힘까지 억지로 쥐어짜 내서 그런지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그때 연적하가 허공으로 도약하며 검을 치켜세웠다.
‘죽는다.’
감히 맞받아치는 것은 물론, 저 검 끝에서 달아날 자신도 없었다.
철퍼덕.
“살려 주십쇼! 쓸모없는 몸이지만!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모시겠습니다!”
귀영자군이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했다.
뒤이어 연적하가 그의 앞에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지금 장난해? 나한테 먼저 칼질을 하고서 뭐가 어쩌고 어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같이 비천한 놈을 죽여 봤자 총순찰님의 명성에 누가 될 뿐입니다! 자애로우신 총순찰님께서 적선한다 생각하시고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쿵. 쿵. 쿵.
귀영자군은 이마가 터져 나가도록 땅에 머리를 찧었다.
지면이 귀영자군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 즈음 연적하가 말했다.
“큰일을 앞두고 재수에 옴 붙을까 봐 봐준다. 와! 내가 보살이다. 보살이야.”
“보살이라니요! 총순찰님은 부처보다 더 대자대비하신 분이십니다!”
귀영자군은 작심한 듯 아부를 했다.
하지만 연적하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똑바로 해. 지켜볼 거야.”
“예, 예.”
귀영자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이마에 피와 함께 엉겨 붙어 있던 흙덩이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다.
애처롭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도 연적하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흥!”
연적하는 냉소를 날린 뒤에 십전무후 남궁연과 구천노도 심통에게 돌아갔다.
그렇게 귀영자군의 반란은 시작과 함께 끝났다.
***
교구현.
풍지산.
선녀암.
신당.
명상에 잠겨 있던 팔황신모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품 안에서 명주(明純)에 싸 두었던 금황자(金晃子, 방울)를 꺼냈다.
헝겊을 벗기자 열 개의 방울이 고개를 내밀었다.
공들여 만든 염매답게 작은 방울마다 요요한 기운이 맺혀 있다.
“청류신…….”
팔황신모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본래 염매에 깃든 사령(死靈)은 주인을 거역하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술사는 염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팔황신모는 청류신에 대한 믿음보다 의심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대체로 사령이 원하는 것은 ‘제물’이다.
그런데 청류신은 사십구 일이라는 ‘시간’을 요구했다.
술사에게 시간을 달라고 한 사령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술사와 사령의 관계에서 ‘특별함’은 좋지 않다.
사령이 술사의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술사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령에게 술사는 주인인 동시에 원수였으니까.
“흐음!”
팔황신모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청류신은 어느 쪽일까?
단지 통제를 벗어나고 싶은 걸까?
혹시 주인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어느 쪽이든 유쾌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팔황신모는 가볍게 웃음으로 불쾌한 잡념을 떨쳐 버렸다.
“그래 봐야 염매에 불과하지.”
중얼거리던 팔황신모는 나직이 ‘육명진언’을 읊조렸다.
“옴 나넨 카야 네바타 데 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서 청류신의 소리가 들려왔다.
-부르셨어요? 어머니.
팔황신모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청류신 음성이 어째 쾌활한 것 같아서다.
사령은 즐거움을 모르니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왠지 찜찜했다.
“네가 가르쳐 준 대로 했지만 실패했다.”
-네? 천자마가 강림하지 않았다고요?
“아니, 그는 강림했지만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상하네요.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는 대가로 내 영혼을 원했다. 나는 허락했지만, 이미 염마왕의 것이라 가질 수 없다고 하더구나. 그 말을 끝으로 천자마는 사라졌다.”
-그랬군요. 한번 왕들에게 바쳐지면 번복할 수 없어요.
“천자마는 염마왕보다 상위의 존재인 것 같았다. 그와 합일할 다른 방법이 없겠느냐?”
천두마왕인 팔황신모는 ‘영혼을 바치는 행위’를 ‘합일’로 이해하고 있었다.
-어머니, ‘합일’과 ‘영혼을 바치는 것’은 조금 달라요.
“다르다고? 나는 염마왕과 합일했을 뿐이다. 그런데 천자마는 내 영혼을 염마왕의 것이라고 했다. 무엇이 다르다는 것이냐?”
-합일은 한 몸을 이루는 것이지만, 바치면 왕의 소유물이 되거든요.
“그럼 나는 왜 염마왕의 소유물이 된 것이냐?”
-천두마왕의 진언 속에 ‘바친다’는 말이 숨어 있었을 거예요. 영혼은 스스로 바치지 않으면 줄 수 없거든요. 어머니가 ‘염매’를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
‘염매’라는 단어에 팔황신모의 눈꼬리가 한차례 실룩거렸다.
맞다.
염매는 죽어 가는 사람의 간절한 바람을 이용한다.
음식이든, 호흡이든, 그 한 가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염매가 완성된다.
죽을 만큼 굶주리던 소천은 음식에, 대롱으로 숨을 쉬던 청류신은 숨 쉬는 것에 매몰되었다.
그렇듯 염매는 피술자가 스스로 원해야 성공할 수 있다.
팔황신모는 청류신의 말을 통해 합일과 바치는 것의 차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응? 내가 염매를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마 청류신은 자신이 염매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일까?
염매는 자신이 염매라는 걸 모른다.
그게 정상이다.
천하의 모든 비밀을 알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만은 모르는 게 염매다.
팔황신모가 착잡한 눈으로 방울을 바라보았다.
미치도록 진실이 궁금했지만 그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속은 것이다. 천자마에게 되돌릴 방법이 있겠느냐?”
염마왕과 하나가 되기를 바란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영혼을 염마왕에게 바치는 것인 줄은 몰랐다.
진언의 뜻이 무엇이든지 말이다.
-시간을 주세요.
‘망할 년.’
팔황신모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물론 청류신에게 ‘왕들의 하늘’은 미지의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염매 주제에 대놓고 시간을 달라니, 울화통이 터졌다.
“얼마면 되겠느냐?”
-사십구 일요.
‘흥!’
팔황신모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네년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다.’
염매는 제작 과정의 사악함만큼이나 해주법(解呪法)도 까다롭다.
더구나 염매는 자신의 힘으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려무나.”
-고마워요, 어머니.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굳어 있던 팔황신모의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염매의 말은 예언과도 같으니 불로불사의 방법을 얻게 된다는 소리였다.
대화를 끝낸 팔황신모는 방울을 명주로 돌돌 말아 품에 넣었다.
그때 문밖에서 육통존자(팔황의 하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교주님. 네 명의 당주들이 교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어찌할까요?”
“누가 왔다고?”
“혼세검마와 혼천혈귀, 악불, 적월이옵니다.”
“들라 해라.”
팔황신모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들의 돌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돌려보내기도 뭐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