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10
310회. 말의 무게
연적하는 점점 속도를 높였다.
등에 업은 구천노도 심통의 숨소리가 점점 약해져서 종국에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대형인 풍연초가 중독됐을 때보다 더 위중해 보였다.
연적하의 콧잔등과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극도로 신경을 쏟다 보니 진땀이 나고 있었지만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정신은 온통 해약에 쏠려 있었다.
허둥지둥 달려가는 그의 곁으로 십전무후 남궁연이 다가갔다.
그녀는 연적하를 힐끔 보았다.
평소에는 심통을 쥐 잡듯 하더니 지금은 하얗게 질린 얼굴이다.
그것만 봐도 그에게 심통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남궁연은 묵묵히 그의 속도에 보조를 맞췄다.
멀리 암자가 보이자 연적하의 걸음이 조금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연적하가 말했다.
“누님은 돌아가세요.”
유명교 교주인 팔황신모는 천하십대고수들조차 가지고 노는 고수였다. 그런 대마녀의 손에서 남궁연을 지켜 줄 자신이 없었다.
“너라면 나를 두고 갈 수 있겠니?”
“…….”
연적하는 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남궁연은 자신과 생사를 함께할 작정인 것 같았다.
‘하아!’
연적하가 속으로 탄식하고 있을 때 네 사람이 달려와 합류했다.
무상도제 장무덕과 곤륜삼선이었다.
연적하가 선녀암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순간 일곱 명의 고수들이 유령처럼 나타나 연적하 일행을 에워쌌다.
팔황 중에 일곱이 나타난 것이다.
칠성연혼진의 포진(布陣)을 마친 태백 선인이 웅혼한 음성으로 외쳤다.
“허락도 없이 선녀암에 오르다니!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태백 선인과 눈이 마주쳤지만 장무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들을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은 연적하였다.
연적하가 심통을 내려놓고 태백 선인에게 말했다.
“아이고, 힘들다. 사람이 보여야 허락을 받죠. 산 아래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녹림 총순찰 연적하가 교주님에게 해약을 얻으러 왔다고 전해 줘요.”
“…….”
연적하의 뻔뻔스러운 답에 태백 선인이 주춤할 때다.
덜커덩 소리와 함께 신당의 문이 열렸다.
순간 칠황이 머리를 조아리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교주님 만세! 만만세!”
팔황신모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되었다. 저 아이의 말도 맞다. 산 아래에 사람을 세워 두지 않았으니 도리가 없었겠지.”
팔황신모의 말에 칠황의 눈에서 살기가 사라졌다.
교주의 말속에서 불청객들에 대한 미약한 호의가 느껴진 탓이다.
팔황신모는 바닥에 누워 있는 늙은이를 슬쩍 보았다.
시커멓게 죽은 얼굴을 보니 팔문팔상진에서 중독이 된 모양이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걸 보니 기특했다.
그 정도로 빠르게 팔문팔상진에서 빠져나왔다는 뜻인 까닭이다.
“너희들의 재주가 실로 용하구나.”
눈치를 보고 있던 연적하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교주님, 칭찬은 감사한데 해약부터 좀 어떻게 안 될까요?”
팔황신모가 연적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연적하냐?”
“예.”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유명교 교주님?”
“그래, 그동안 네가 쳐 죽인 십두마병들은 모두 유명교 교도들이었다. 그런데 교주인 나에게 해약을 달라니 참으로 뻔뻔하구나.”
“변명 좀 해도 되나요?”
팔황신모는 기가 막힌 얼굴이었지만 연적하의 말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청하는 사람처럼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사실 모든 건 사고였어요. 어느 날 총채주님이 제안을 하더라고요. 십두마병들을 녹림에서 내보내면 제 복수를 도와주겠다고. 그 당시에 제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좀 복잡했거든요.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어요.”
연적하는 슬쩍 팔황신모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교주의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녹림 산채에 있는 십두마병들을 찾아갔죠. 저는 말로 하는 걸 좋아해서 ‘산채에서 나가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게 웬일? 저를 만만하게 봤는지 다들 죽이겠다고 달려들더라고요.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죽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다가 일어난 일이지 절대 유명교 사람이라 죽인 건 아니에요.”
팔황신모는 여전히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몸이 달아오른 연적하가 말을 보탰다.
“그 일로 백두마군들이 제 목에 포상금을 건 뒤로는 정말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너는 본교에 악감정이 없는데, 재수 없게 휘말려 들었다는 것이냐?”
“예.”
“네 집안이 월하선자의 손에 멸문당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악감정이 없다는 말을 믿으라고?”
“제 집안이라면 와룡장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다.”
“와룡장과 저는 원수지간인데요? 월하선자가 아니었어도 제 손으로 다 부숴 버렸을 거예요. 악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건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차마 자신의 손으로 끝장을 낼 수 없어서 내버려 둔 것이었으니까.
“…….”
팔황신모가 부드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연적하가 정주에서 삼장을 멸문시킨 이야기는 수하들에게 들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와룡장 무너뜨리려 했다.
십두마병들과 얽힌 것은 사실이지만 복수나 악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에게서 자신에 대한 적의나 원한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본교에 악감정이 없다는 말은 믿어 주마. 풍지산에는 왜 왔느냐?”
“천지맹 총사가 시키더라고요. 교주님이 왜 백마사로 가지 않고 이곳에 있는지 알아보라고. 말이 알아보라는 거지, 사실은 가서 죽으라는 소리죠. 저랑 총사 사이가 굉장히 안 좋거든요. 그 인간이랑은 원수나 다름없어요. 사람이 어찌나 얍삽한지.”
툴툴거리던 연적하가 얼른 말을 돌렸다.
“저어, 그런데 해약 먼저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사람 숨소리가 심상치 않은데…….”
가만히 연적하를 바라보던 팔황신모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냥은 줄 수 없고, 나도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마. 들어 볼 테냐?”
“예? 뭔데요?”
“네가 본교에 악감정이 없다니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천지맹에서 녹림을 탈퇴시키겠다고 약속해라. 그럼 해약을 내어 주겠다.”
뜻밖의 어리숙한 제안에 연적하는 눈을 끔뻑였다.
‘약속만 하면 준다고? 바보 아냐?’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연적하가 흔쾌히 ‘그러겠다’고 답하려는 순간이다.
남궁연의 전음이 들려왔다.
-총채주의 뜻에 달린 일이니 약속할 수 없다고 거절해.
연적하는 남궁연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순순히 따랐다.
“저어, 그건 총채주님이 결정하는 거라 제가 약속하나 마나예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연적하의 답에 팔황신모가 돌연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홋! 네 대답이 옳다. 말의 무게를 아는 아이로구나. 그렇다면 바꾸도록 하마. 백두마군인 적월을 내게 데리고 오거라. 반드시 살려서 데리고 와야 한다. 그 정도라면 할 수 있겠지?”
“그 한 사람이면 되나요?”
“후후,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겠다고 약속하겠느냐?”
“그럴게요.”
그제야 팔황신모는 품에서 괴황지 한 장을 꺼냈다.
그녀가 괴황지를 노려보며 주문을 외우자 괴황지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화르륵-.
괴황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홀랑 타 버렸다.
팔황신모가 괴황지에서 손을 떼며 입으로 가볍게 ‘후’ 하고 불었다.
새카맣게 탄 괴황지가 찻잔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나를 찾아온 것은 잘한 일이다. 해독하겠다고 의원에게 갔다면 가는 도중에 죽었을 것이다. 나 외에 이매망량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말과 함께 팔황신모는 찻주전자를 집었다.
뒤이어 잔에 물을 부은 뒤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재를 풀어냈다.
그리고 반개한 눈으로 잿물의 냄새를 맡았다.
“흐음, 잘 만들어졌군.”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의 시선 속에 냄새를 음미하던 팔황신모가 밖으로 찻잔을 던졌다.
연적하는 둥둥 떠서 날아오는 찻잔을 잡았다.
콰득.
강한 힘이 손을 찍어 눌렀다.
연적하가 눈살을 찌푸리자 누르는 힘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팔황신모를 바라보았다.
부적을 태운 물로 해독이 될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연적하는 심통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시커먼 잿가루가 떠 있는 찻물을 심통의 입으로 흘려 넣었다.
순간 놀랍게도 심통의 숨소리가 편안해졌다.
시커멓게 죽어 있던 안색도 서서히 본래의 색깔을 되찾아 갔다.
잠시 후 심통이 자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눈을 떴다.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연적하는 신경질적으로 그에게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쿵.
뒤통수를 땅에 찧은 심통이 ‘악!’ 하는 비명과 함께 꾸물꾸물 일어났다.
“공자님, 사람을 그렇게 패대기치는 경우가 어딨습니까? 예에?”
“시끄러. 여기가 어딘지나 보고 말해.”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던 심통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다.
팔황신모의 시선이 장무덕에게로 향했다.
“오호! 눈빛을 보니 언령의 속박에서 벗어난 모양이로군. 무상도제라는 별호가 허명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덕분에 내 일행들이 마음고생을 좀 했소. 팔황신모가 술법에까지 능한 줄 알았다면…….”
“후후, 알면 피할 수 있었을 것 같은가?”
“그야 모를 일.”
장무덕은 짧게 답하고 아예 눈을 돌렸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팔황신모의 수작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후후후.”
팔황신모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녀는 천하십대고수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팔문팔상진에는 육정육갑의 신력이 깃들어 있어 천하십대고수라 해도 깨지 못해요. 선인들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와 달리 팔황신모는 정중했다.
그녀의 기준에서는 팔문팔상진을 깬 사람이 천하십대고수보다 더 윗줄이었다.
그녀의 돌변한 태도에 곤륜삼선은 잠깐 망설였다.
아무래도 교주는 팔문팔상진을 깬 사람이 자신들이라고 오해하는 것 같았다.
사제들과 잠깐 시선을 주고받던 태을 선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빈도들은 곤륜산에서 온 곤륜삼선이라 합니다. 대명이 쟁쟁한 팔황신모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명이라니 가당치 않아요. 이제 보니 새외제일이라는 곤륜파의 선인들이셨군요. 여러분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불로불사의 꿈을 가진 팔황신모에게는 곤륜삼선보다 더 귀한 손님도 없었다.
태을 선인은 요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잠시 멈칫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왔는데 도우(道友)를 대하듯 하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저 마녀가 왜 저러는 것일까?’
팔황신모를 믿지 못한 태을 선인이 남궁연을 힐끔 보았다.
남궁연이 괜찮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태을 선인은 마음의 짐을 덜어 냈다.
“교주님에게 다른 의도가 없다면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후후후, 고마워요. 마침 며칠 전에 당주들이 가져다준 차가 있어요. 선인들께서도 마음에 들 거예요.”
팔황신모가 손을 까딱이자 신당의 문이 활짝 열렸다.
잠시 눈치를 보던 곤륜삼선이 섬돌에 신을 벗고 신당으로 올라갔다.
곤륜삼선이 자리를 잡고 앉자 팔황신모가 장무덕과 연적하, 남궁연을 향해 말했다.
“이건 수도자들 간의 대화이니 너희들은 밖에서 기다리도록 해라.”
그녀는 일방적으로 말한 뒤에 문을 닫아 버렸다.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승려와 도사를 산 제물로 쓰는 사람이 곤륜삼선을 저렇게 친절히 맞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