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62
462회. 왕부(王府)와 풍지산
남직례성.
합비.
남궁세가.
정오 무렵.
남궁세가의 연무장에 두 남자가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청운검 남궁천과 연적하다.
“적하야.”
“예, 형님.”
곧 가족이 될 거라 생각해서 그런지 남궁천의 음성은 꽤나 은근했다.
“연이가 좋으냐?”
“예.”
“내 동생이긴 하지만 그렇게 무뚝뚝한 애가 좋아?”
“안 무뚝뚝한데요?”
“하아! 아니라고? 합비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해 봐라, 아무도 안 믿는다.”
“진짜예요.”
“거, 참.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그래서 언제 혼인할 건데?”
“남궁세가에서 연 누님의 역할이 끝나면 슬슬 하려고요.”
“그런 날이 올 것 같냐?”
“예?”
연적하가 놀란 눈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그러자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십 년이 지나 봐라. 남궁세가에서 연이가 할 일이 줄어드나. 늘면 늘지.”
“정말요?”
“당연하지. 그러니까 아버지께 너희가 원하는 날을 알려 드려. 그래야 혼인할 수 있다.”
“그래도 어떻게…….”
“안 그러면 몇 년 훌쩍 지나간다. 나중에 내 말 안 들은 거 후회하지 말고 연이나 잘 설득해. 연이도 너처럼 기다리자고 할 테니까.”
평소 웃음기 가득하던 남궁천의 얼굴에 공허함이 깃들었다.
동생은 자기가 남궁세가와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궁세가가 이전의 성세를 되찾을 때까지 세가에 남으려 할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천재라 해도 뚝딱 해낼 수 없는 일이 있다.
예컨대 사람을 키워 내는 일이 그렇다.
제자들을 이전 수준으로 육성하려면 최소한 십수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연 누님이 기다리자면 기다리는 게 맞지 않을까요?”
남궁연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연적하가 슬쩍 반론을 제기했다.
“적하야. 중도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지금 연이가 그래. 그 애는 남궁세가를 이전의 모습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최소한 십 년 이상 걸린다. 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냐? 자신 있으면 기다리고. 나는 남궁세가의 소가주라서 그래도 좋다면 안 말린다.”
“제가 설득할게요.”
“그래. 지금이 문제를 이성적으로 풀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잘 해 봐.”
“예! 믿고 맡겨 주세요.”
연적하가 결의에 찬 어조로 답했다.
십 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그건 절대로 사양이었다.
***
삼월로 접어들자 날씨는 완연하게 풀렸다.
연적하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혼자서 비가산을 올랐다.
겨우내 시커멓게 죽어 있던 나무들이 파릇파릇 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야트막한 산이라 순식간에 정상이 나타났다.
그래도 산이라고 남궁세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월의 때가 낀 주변 건물들과 달리 남궁세가는 눈에 띄게 깨끗했다.
유명교에 홀랑 타 버린 것을 새로 지어서 그런 것이리라.
지금도 짓고 있거나 짓다가 만 전각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대단하네.”
저걸 고집이라고 해야 할까?
남궁세가는 완전히 잿더미가 된 땅 위에 수백 채의 전각을 다시 세웠다.
그야말로 무림세가의 저력이 뭔지 제대로 보여 준 것이다.
저 남궁세가의 재건을 진두지휘한 사람이 백부가 아니라 남궁연이라는 건 최근에 알았다.
남궁천이 혼례식 날짜 문제로 자신을 압박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너무 능력 있는 누님이라니까.”
좋으면서도 괜히 심술이 난다.
남궁연에게 듬직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하아!”
남궁연을 생각하니 한숨이 난다.
남궁세가에 온 지도 벌써 칠 일이 지났다.
그동안 백부나 남궁연에게 혼례식 날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혼례를 치르고 난 이후의 계획이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다.
백부와 남궁연이 원하는 것은 ‘와룡장’의 재건.
남궁세가를 보니 그들이 ‘와룡장’의 재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게 이해가 된다.
남궁세가에 비하면 와룡장은 새 발의 피다.
남궁연이라면 분명히 며칠 만에 뚝딱 세울 수도 있을 터였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지만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낯이 뜨거워서다.
배다른 형제들이 세운 걸 두 번이나 망쳐 놓고 이제 와서 재건이라니.
철면피가 아닌 다음에야 고민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백부와 남궁연이 추천하는 걸 보면 해도 손가락질받을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백부와 남궁연이 하라고 할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자신이 원망하지 않는 유일한 혈육인 친모의 소원이기도 하다.
“어쩐다.”
답은 정해져 있지만 그걸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그렇죠? 스승님?”
이럴 때는 청불노가 그립다.
스승이라면 지금의 자신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를 많이 해 줬을 것이다.
비가산을 내려온 연적하는 발길 닿는 대로 합비를 돌아다녔다.
날씨가 좋은 것도 있었지만 볼 것이 많아서다.
휘적휘적 다관(茶館) 앞을 지나던 연적하의 걸음이 느려졌다.
다관에서 흘러나오는 설화인(说话人, 전문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다.
“……자, 그럼 이 서안(西安)이라는 곳이 어떤 곳이냐? 전한(前漢)과 수나라 당나라의 수도로 고대 왕국의 비밀이 묻힌 곳이라는 거지. 아무 곳이나 파면 조상들의 유물이 툭 튀어나오는 곳이 서안이야. 그런데 최근 서안의 대자은사(大慈恩寺)가 발칵 뒤집혔어. 왜? 대안탑(大雁塔)을 청소하던 중에 이상한 책들이 나왔잖아. 무슨 책이냐고? 대안탑에서 나왔으면 뻔하잖아. 현장 법사가 서역에서 가져온 책들이야. 현장 법사 모르는 분 없지? 유명교 현장 법사 말고.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 서유기 원형) 기억들 나셔? 내가 며칠 전에도 이야기해 줬잖아. 제천대성 손오공을 제자로 둔 현장 법사. 그래, 바로 그 현장 법사가 남긴 책을 불목하니가 주운 거야. 이쯤에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 없으셔?”
설화인의 질문에 다관에서 차를 마시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툭툭 던졌다.
“스쳐 지나가긴 무슨 새도 아니고.”
“바람이지.”
“고상들 하네. 스쳐 지나가면 바람둥이지.”
“양상군자(梁上君子) 아닌가?”
여자들이 ‘꺄르르’ 웃었다.
뒤이어 늙수그레한 설화인의 말이 들려왔다.
“절간에서 불목하니가 책을 주웠다고 하면 떠오르는 고수가 있잖수. 녹림의 총채주 파천마군.”
순간 왁자지껄하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뜬금없이 파천마군의 이름이 나오니 그럴 만도 하다.
심지어 길에서 듣고 있던 연적하도 슬금슬금 다관으로 가까이 갔다.
그러다 더 자세히 들어 볼 양으로 아예 다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관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그래도 드문드문 빈자리가 보였다.
그가 빈자리를 찾아가 앉자 안쪽에 있던 여자 점원이 쪼르르 다가왔다.
“공자님, 어서 오세요. 혹시 찾으시는 차가 있으신가요?”
연적하는 잠시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술이라면 ‘향설주’라고 했겠지만 차에는 아직까지 즐긴다라고 할 게 없었다.
그때 문득 최근에 남궁연과 ‘월락정’에서 마신 차 이름이 떠올랐다.
“오룡화차(烏龍花茶)요.”
“아, 좋은 차를 드시네요. 곧 준비해 올게요.”
눈웃음을 치던 점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이 있음 직한 안쪽으로 사라졌다.
연적하는 슬쩍 설화인을 보았다.
고희(古稀)는 됨 직한 백발의 노인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봐서는 설화인이 아니라 그림 속의 신선이다.
얼굴만 봐도 신뢰가 간다고 생각하던 연적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보살 같은 얼굴의 마부에게 마차를 도둑맞고 아직도 이 모양이라니!
설화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양상군자가 제일 비슷했수. 거기 아가씨, 근접하게 갔으니 나중에 내가 선물 하나 드리리다.”
“고마워요. 후훗!”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늙은이가 간도 크지. 파천마군이 녹림이라고 양상군자를 가져다 붙이다니.
파천마군이 들었으면 늙은이는 제삿밥을 먹게 되었으리라.
“생각들 해 봐. 파천마군도 소림사의 불목하니로 있다가 전설의 무경을 발견하고 녹림의 총채주가 되었잖아. 대안탑을 청소하던 불목하니도 파천마군처럼 될 수가 있는 거라고.”
그러자 남자 손님 하나가 딴지를 걸었다.
“파천마군이 주운 건 천하제일의 무경이니 그런 거고. 대자은사의 불목하니가 주운 책이 뭐라고.”
“손님, 나도 얘기 좀 합시다. 내가 설화인이지 댁이 설화인이우?”
설화인의 농담에 사람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자아, 이 불목하니가 대안탑에서 나온 고서를 어떻게 했느냐? 여기서 팔자가 갈린 거야. 파천마군은 불목하니인데 글월을 아는 사람이었어. 보물을 알아본 거지. 그래서 그는 소림사를 나가서 무경을 익혔고, 녹림의 지존이 되었어. 그런데 대자은사의 불목하니는 까막눈이야. 하얀 건 종이고 검은 게 글자라는 것밖에 몰라. 그러니 어쨌겠어? 고서를 들고 냅다 튄 거지. 어디로? 서안에 있는 금일상방(今日商房)으로 간 거야. 둘이 잘 만났지. 오늘만 사는 불목하니가 금일상방으로 갔으니.”
‘금일’이라는 말을 가지고 한 농담에 여자들이 또 한 번 ‘꺄르륵’ 웃었다.
설화인은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 금일상방의 방주가 누구냐? 바로 백담 만수귀라는 유명한 문장가야. 백담이 고서의 가치를 알아본 거지. 그래서 일부는 응천부(應天府, 남경)의 왕부(王府)로 보내고, 일부는 풍지산으로 보내. 여기서 백담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아야 하는 거야. 몰라? 모르면 어깨 위에 달린 건 장식인 거지.”
사람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머리가 장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설화인이 히죽 웃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왕부와 풍지산. ‘천하의 주인’과 ‘강호의 주인’에게 뇌물을 쓴 거야.”
설화인이 유명교주를 ‘강호의 주인’이라고 하는데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연적하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머나먼 남직례성에서도 유명교의 힘을 인정하는 분위기라니.
“그런데 뇌물은 상대에게 가치가 있어야 통하는 거잖아. 아니면 그게 뇌물인가? 그냥 머리에 베고 자는 목침(木枕, 나무 베개), 아니 책침(冊枕, 책 베개)이지.”
점원이 연적하 앞에 오룡화차가 든 잔과 끓는 물이 든 찻주전자를 내왔다.
연적하는 찻잔에 뜨거운 물을 가득 붓고 찻물이 우러나길 기다렸다.
한창 이야기를 풀어 나가던 설화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연적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려 설화인을 보았다.
때마침 설화인이 메마른 입술을 혀 끝으로 훔치며 말했다.
“아이고.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데, 수중에 차 한잔 마실 돈이 없네.”
땡그렁. 땡그렁.
설화인 주변으로 동전이 떨어졌다.
설화인은 두 손으로 알뜰하게 동전을 주운 뒤에야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이고, 고마우신 선남선녀들이 많으셔. 복받으실 거야. 그런데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더라?”
연적하가 한마디 던졌다.
“뇌물은 상대에게 가치가 있어야 통하는 거라고 했어요.”
설화인이 연적하를 힐끔 보고는 가볍게 눈을 찌푸렸다.
귀담아듣고 있는 놈이 동전 한 문 보태 주지 않으니 야박하지 않은가.
“어허, 짜다 짜.”
설화인이 쏘아붙였지만 그런 쪽으로 둔한 연적하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결국 눈싸움에서 진 설화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두꺼운 놈에게는 답이 없어. 그래 뇌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 ‘왕부’와 ‘풍지산’에도 공통점이 있어. 그게 뭔지 말아? 불로장생(不老長生)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