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22
522회. 진선(眞仙), 참신선
공지섭은 연적하의 안색을 살폈다.
‘소요종’ 고수가 왔다고 했으니 ‘천지종’ 사람이라면 크게 당황해야 하는데.
“그래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덤덤한 그의 반응에 공지섭이 오히려 안달을 냈다.
“소요종이 왔습니다. 소요종!”
“네, 들었어요.”
연적하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귀를 후볐다.
그는 공지섭이 왜 그토록 흥분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공지섭은 주위를 한 번 살핀 후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건 순전히 연 소협께서 생명의 은인이라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우리 문주님께서는 연 소협이 ‘천지종’의 제자라 믿고 계십니다.”
“내가요?”
태연자약한 그의 반문에 공지섭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까지는 그가 구주나 종문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담담해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설마 지금까지 모른 척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를 믿은 자신과 조원들이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갈등하던 공지섭은 까놓고 물었다.
“연 소협, 정말 ‘천지종’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까?”
“몇 번을 말해요? 난 거짓말하면 안 되는 사람이거든요? 진짜 ‘천지종’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요? 천관산맥에서 지유가 구주와 종문에 대해 알려 드린 것 같은데?”
공지섭이 황당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그러자 연적하가 당당하게 답했다.
“아, 그때? 난생처음 듣는 얘기를 한 번 듣고 어떻게 기억해요? 말했잖아요. 십 년 동안 집 안에 갇혀 지냈다고.”
연적하는 문득 큰어머니 백미주를 떠올렸다.
그녀가 자신을 십 년간 창고에 가둔 게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이야.
“끙! 알겠습니다. 여하튼 우리 문주님과 ‘소요종’ 고수가 연 소협을 의심하고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조심한다고 뭐 달라질 게 있나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공지섭은 말을 흐렸다.
사실 그의 말대로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주야 그렇다 쳐도 소요종 제자는 지켜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닌 까닭이다.
그때 현천문 문도, 송안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연 소협, 문주님께서 찾으십니다.”
공지섭이 슬쩍 물었다.
“소요종에서 온 고수는 아직 ‘순우각’에 있느냐?”
“예, 두 분 모두 문주님과 함께 계십니다.”
‘두 분’이라는 말에 공지섭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둘이나 왔을 줄이야!
연적하는 조금 부담이 됐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
순우각.
현천문 문주의 집무실에 문주인 소천우와 소요종의 고수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말석에 앉은 소천우가 두 사람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평생을 가도 만나기 어렵다는 종문 고수와 마주 앉아 있으려니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렇게 발 빠른 대처라니!
어제 인편에 편지를 보낼 때만 해도 당장 오늘 찾아올 줄은 몰랐다.
‘천지종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는 편지의 힘이 이렇게나 클 줄이야.
부지런히 눈알을 굴리고 있는 소천우의 귓가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 문주는 그자가 어디 출신인지 아시오?”
소천우는 급히 고개를 들어 소요종의 고수 원상한과 눈을 맞췄다.
이십 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벌써 ‘연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던가.
“스스로 말하기를 석경장의 장주라고 했습니다.”
“석경장? 조양성에 석경장이 있던가?”
나이는 어리지만 원상한은 스스럼 없이 말을 내렸다.
소천우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수약주는 모르겠으나, 조양성에 석경장이라는 장원은 없습니다.”
“그런가. 사람을 시켜 오라고 했으니 곧 알게 되겠지. 그나저나 여기가 순우각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도우려는 마음을 잊지 말자고 그리 지었습니다.”
“아까부터 좋은 기운이 느껴지던데. 귀한 ‘영지 선초’라도 보관하고 있나 보군. 그렇지 않습니까? 스승님?”
제자의 질문에 은하고검 천승학이 답했다.
“약초학의 공부가 부족하구나. 이것은 ‘천년화령적지’의 영기(靈氣)니라. 소문주가 복을 받았던 게지.”
순간 원상한의 눈이 번득였다.
영기가 깃든 ‘영지 선초’는 종문 제자에게 보물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복용하면 상승의 경지로 나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소 문주 축하드리오.”
원상한의 말투가 하오체로 살짝 바뀌었다.
나름 대우를 한답시고 말을 올렸는데 소천우는 오히려 가슴이 철렁했다.
‘천년화령적지’는 소요종에 공물로 바치려 했는데 아무래도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소요종에 바치면 종문 소유물이 되니 원상한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고 만다.
그걸 아는 그가 순순히 구경만 하고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괜히 시치미 떼다가 화를 입느니 천승학에게라도 잘 보이는 게 백번 낫다.
“문도들이 천관산맥에서 얻은 것입니다. 조만간 소요종으로 가져가려던 참인데, 오늘 천 노야(老爺)를 뵈었으니 천 노야께 드리겠습니다.”
말과 함께 소천우는 뒤편 가구의 서랍에서 작은 목함을 꺼냈다.
내심 아까웠지만 목숨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미련을 버렸다.
그는 목함을 천승학에게 공손히 바쳤다.
천승학은 당연하다는 듯 목함을 받아 품에 갈무리하고 한마디 했다.
“소 문주가 성의를 보였으니 나도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지. 언제고 내 도움이 필요할 때 연락해라.”
“감사합니다.”
소천우는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비록 소요종의 인정은 못 받았지만 천승학과 같은 고수를 뒷배로 두었으니 나름 성공한 셈이다.
이제 연적하의 문제만 정리하면 더 이상 골치 아플 일은 없었다.
소천우가 속으로 현천문의 앞날을 구상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송안군의 음성이 들려왔다.
“문주님, 연 소협을 모셔 왔습니다.”
“들라 하시게.”
“예.”
연적하가 들어오자마자 원상한의 눈에서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데 벌써 ‘연허’의 경지라니 묘한 기분이다.
연적하는 일단 문주인 소천우에게 묵례를 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 두 분은 소요종의 천 노야와 노야의 제자이신 원 대협이십니다. 연 소협에 관한 이야기를 했더니 두 분이 관심을 보이셔서요.”
소천우는 연적하에게 두 사람을 소개하고 빠졌다.
솔직히 자신으로서는 ‘연허’에 이른 연적하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다.
그제야 연적하는 노인과 청년에게 인사를 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석경장의 장주인 연적하라고 합니다.”
비굴하지 않은 당당한 자기소개에 천승학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소요종 앞에서 저런 의연한 태도라니?
종문의 제자가 된 지도 어언 이백 년, 그 긴 세월 동안 저런 사람은 처음이다.
그와 반대로 원상한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자신보다 젊어 보이는 연적하가 ‘연허’라니 은근 질투심이 생긴 탓이다.
종문의 제자라 해도 최소한 십 년을 수련해야 도달하는 게 ‘연허’다.
물론 자신은 칠 년 만에 달성해 천재 소리를 듣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일반인이 ‘연허’라니?
“석경장은 어디에 있느냐?”
문초라도 하는 듯한 원상한의 물음에 연적하가 답했다.
“내 마음속에요.”
“…….”
한순간 원상한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음속에 있다니?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란 말인가!
“너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흰소리냐!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하지만 연적하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어차피 말로 넘어가지 않을 상황에서 굽실거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원 형, 석경장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가 천지종의 제자인지 아닌지만 알면 되는 거 아냐? 피차 바쁜 사람들 같은데 빙빙 돌리지 말자고.”
“네놈이 정녕…….”
원상한은 당장이라도 손을 쓸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상대가 다른 종문의 제자인지 아닌지만 확인하면 될 일인 까닭이다.
분위기가 싸해지자 천승학이 입을 열었다.
“네 말이 옳다. 너는 종문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누구의 제자냐?”
“구천현녀요.”
연적하가 천 노야라고 불린 노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무공 내력을 밝히라면 ‘구천현녀’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에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듣는 ‘진선(眞仙)’의 이름이로군. 설마 그분에게 직접 배웠느냐?”
천승학의 물음에 오히려 연적하가 더 놀랐다.
구천현녀를 알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구천현녀에게 배울 수도 있는 것처럼 말하다니?
“구천현녀님을 아세요?”
“알다마다. 진선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명한 분들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느니라.”
“그런데 진선은 뭔가요?”
연적하의 질문에 천승학이 피식 웃었다.
“구천현녀에게 배웠다면서 진선을 모르다니 기이한 일이로다. 진선은 말 그대로 참된 신선을 의미하느니라. 더 알고 싶으면 비승과해를 통해 소요종에 들거라. 물론 네가 종문 제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천승학의 설명은 거기에서 끝났다.
표정을 보니 그 이상은 말해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원상한은 스승이 연적하의 언행을 용인하자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기야 저처럼 젊은 나이에 ‘연허’라니 욕심이 나지 않을 리가 있나.
이윽고 천승학이 원상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쯧쯧! 어리석은 녀석. ‘소요종의 원한을 갚는 것’과 ‘좋은 제자를 얻는 것’ 중에 어느 하나라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느니라.”
“예.”
원상한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스승에게 자신의 마음이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길게 숨을 내뱉어 분노를 가라앉힌 뒤,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적하. 네 말이 옳다. 네가 종문의 제자인지 아닌지 알아야겠으니 밖으로 나가자. 설마 이것도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말과 함께 연적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그의 말투도 다시 점잖게 바뀌어 있었다.
***
현천문 연무장.
연적하와 원상한이 연무장 한가운 데 마주 보고 섰다.
둘 다 ‘연허’의 고수인지라 비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나운 기파(氣波)가 휘몰아쳤다.
원상한이 먼저 칼끝으로 천중(天中)을 가리켰다.
소요종의 중급 검공 천동굉지(天動轟地)다.
검 끝을 중심으로 창천 하늘의 구름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심장이 쪼그라들 광경이다.
곧이어 구름을 뚫고 검기가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검기가 바닥에 박힐 때마다 ‘쿠쿵!’ 하고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무려 백여 개에 달하는 검기였다.
‘보았느냐! 이것이 나의 천동굉지다!’
원상한은 스승 앞에서 자신의 최고 절기를 아낌없이 펼쳤다.
연적하의 생사는 관심 밖이었다.
재주가 있으면 살고 아니면 이 자리에서 그냥 죽으라는 심보다.
천승학은 제자의 생각을 읽었음에도 제지하지 않았다.
같은 ‘연허’가 펼친 검공에 죽는다면 쭉정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다.
쿠쿠쿠쿵-.
폭음과 함께 자욱하게 일어난 황토색 먼지가 연무장을 뒤덮었다.
결과가 궁금해진 천승학은 눈에 힘을 주고 흙먼지를 노려보았다.
곧이어 천승학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연적하의 몸 주위로 한 가닥 검기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흙먼지를 차단하고 있었다.
저 기이한 검기로 천동굉지를 막아 낸 것이다.
더 이상 검기가 떨어지지 않자 연적하는 청사를 앞으로 곧게 내뻗었다.
청사(靑蛇)를 중심으로 흙먼지가 빨려드는가 싶더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운룡풍호(雲龍風虎)다.
콰아아아-.
용의 형상을 한 흙먼지가 소용돌이치며 원상한을 향해 밀려갔다.
깜짝 놀란 원상한은 지체 없이 검을 세 번 휘둘렀다.
그가 얼떨결에 펼친 검공은 입문해서 배운 초급 검공 일파장천(一派長天)이었다.
펑! 펑! 펑!
일파장천에 적중당한 흙먼지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원상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한 줄기 사나운 바람이 그를 덮쳤다.
지금까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던 풍호(風虎)였다.
그 섬뜩한 기운에 원상한은 ‘악!’ 소리와 함께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