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32
532회. 진경(眞景), 시공을 초월한 공간
독안귀마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연적하는 문득 금사를 떠올렸다.
금사의 그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는 것 같지 않은 비현실적인 존재감.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태풍으로 변해 몰아칠 것 같은 섬뜩한 고요함.
눈만 마주쳤는데 죽음을 내려도 달게 받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겨난다.
이제야 비로소 사람들이 말하는 입신(入神)의 경지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독안귀마는 과거 신수(神獸) 즉, 신이었다.
‘신격을 잃은 게 저 정도라니…….’
입신의 경지를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십두마병의 몸에서 나온 마물이 반딧불이라면 독안귀마는 태양이었다.
푸륵-.
독안귀마의 투레질에 연적하는 정신을 차렸다.
투레질이 아니라면 상대가 말이라는 것도 잊을 정도로 독안귀마의 존재감은 컸다.
그는 강적 앞에서 멍하니 서 있던 자신을 자책하며 청사를 빼 들었다.
그때 머릿속으로 기이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누구냐.
연적하가 흠칫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독안귀마를 제외하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올 만한 존재는 없었다.
“나는 석경장의 장주 연적하다. 너는 누구냐.”
-나는 초원의 바람, 화풍(和風)이라고 한다.
“화풍?”
의아해하는 그의 머릿속으로 다시 소리가 울렸다.
-인간은 나를 독안귀마라고 부르더군.
“…….”
연적하가 독안귀마를 응시했다.
‘혜광심어’처럼 머릿속으로 말하다니!
독안귀마가 특별한 걸까? 신수가 되면 만물과 뜻을 통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래서 뭐라고 불러 주기를 바라는데?”
-독안귀마.
대답과 함께 독안귀마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연적하의 머리 위로 말발굽이 떨어져 내렸다.
‘은급’의 야수인 백호를 단숨에 찍어 눌렀던 바로 그 수법이다.
순간 연적하는 구천구검 이 식 행지무강(行之無疆)으로 청사를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청사와 말발굽이 부딪쳤다.
꽈광!
우렛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경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콰지직! 쿵!
아름드리나무가 맥없이 부러져 나갔다.
그제야 둘의 싸움을 멍하니 지켜보던 사람들이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독안귀마는 이내 한 줄기 검은 바람[黑風]으로 변했다.
흑풍은 돌풍이 되어 연적하를 집어삼킬 듯 몰아쳐 갔다.
그럴 때마다 연적하는 구천구검으로 흑풍을 쳐 냈다.
독안귀마의 흑풍은 구천구검에 번번이 막혔다.
쿠르르릉! 쿠쿵!
견고한 검공에 막힌 흑풍이 잦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독안귀마로 돌아갔다.
푸륵-.
가볍게 투레질하던 독안귀마는 하나뿐인 눈으로 연적하를 노려보았다.
-너는 누구냐?
“말했잖아. 석경장의 장주 연적하라니까.”
-고작 ‘연허’의 경지로는 내 암흑기를 막아 낼 수 없다. 나는 ‘현인’과도 싸웠지만, 너와 달랐다.
“뭐가 다른데?”
그러나 독안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싸우면 싸울수록 영기가 엉클어져 은근 불쾌했다.
마물은 물론, 과거 신수일 때도 이런 건 느낀 적이 없다.
수천 년 전 자신을 조련하겠다는 ‘현인’과 싸울 때도 이러지 않았다.
부닥치면 부닥칠수록 존재가 부정 당하는 느낌이랄까?
독안귀마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남자는 위험하다.
신격을 얻은 뒤로 신수 외에 위험하다고 생각한 존재가 없었다.
그런데 겨우 ‘연허’의 경지에 불과한 인간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다니?
아직 연허일 때, 죽여야 한다.
본능의 가르침에 독안귀마는 응답했다.
독안귀마가 훌쩍 뒤로 물러나 연적하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신수 시절에 우연히 터득한 ‘진경(眞景)’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인’도 당해 내지 못한 ‘진경’이니, ‘연허’쯤은 죽일 수 있으리라.
한편 연적하는 독안귀마가 갑자기 물러나자 싸움을 포기한 것으로 착각했다.
말이 통하는 상대라 그렇게 생각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 뿐, 독안귀마의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는데 살기만 강해지다니?
그는 눈을 찌푸리고 독안귀마를 응시했다.
그때 본능이 위기를 알려 왔다.
연적하는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몸을 피했다.
이윽고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가 갈기갈기 찢기며 뒤집혔다.
콰르르-.
“무슨 꿍꿍이 짓이냐!”
연적하는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청사를 날려 보냈다.
쉬이익-.
화살처럼 날아간 청사가 독안귀마의 몸을 관통했다.
“어?”
연적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청사에 관통당한 독안귀마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뭔가를 관통한 느낌도 없었다.
어딘가에 맞으면 미미하게 반발력이 전해지는데 마치 신기루를 때린 기분이다.
다시 한번 살기가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뭔가 있다는 뜻이다.
순간 연적하는 검결지를 관자놀이에 대고 통천안(通天眼)의 주문을 외웠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변해 갔다.
‘헉! 저건 또 뭐지?’
또 한 마리의 독안귀마가 자신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지금의 독안귀마는 굳어 있는 독안귀마보다 빨랐다.
‘어떻게?’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반응했다.
연적하는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여러 차례 위치를 바꿨다.
그럴 때마다 그가 서 있던 자리가 쩍쩍 갈라지고 숲이 짓뭉개졌다.
처음에는 피하기에 급급했지만 짐승은 짐승이다.
연적하는 독안귀마의 단순한 공격에 적응되자 반격의 기회를 엿보았다.
독안귀마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흑풍으로 변했다.
콰콰콰콰-.
연적하는 흑풍을 피해 낸 뒤에 거 두어들인 청사로 스쳐 지나가는 독안귀마를 찔렀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청사가 독안귀마의 몸을 관통했지만 아무것도 와 닿는 느낌이 없었다.
푸르륵-.
독안귀마가 비웃듯 투레질을 했다.
과거 ‘현인’도 저러다가 끝내 자신에게 머리를 바쳤다.
‘현인’도 속수무책으로 당한 ‘진경’을 고작 ‘연허’가 당해 낼 리가 있나.
한편 공지유는 허공을 향해 헛손질만 계속하는 연적하와, 엉뚱한 곳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는 독안귀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의아하기는 금단문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일도가 동방유에게 물었다.
“스승님, 독안귀마가 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겁니까?”
“모르겠다. 연 대협의 이기어검에 관통당하고도 멀쩡한 걸 보면 뭔가 있는 모양인데.”
어느새 동방유의 호칭은 변해 있었다.
‘의기발현’에 천지사방을 날아다니는 ‘이기어검’까지 보았으니 당연하다.
구석정이 슬쩍 끼어들었다.
“독안귀마가 연 대협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틈에 암습을 해 볼까요?”
“암습을?”
“예, 연 대협과의 싸움으로 독안귀마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눈이 없는 쪽에서 접근한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이기어검에도 멀쩡한 걸 보고도 그런 소리냐?”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이대로 구경만 하다가 연 대협이 덜컥 죽기라도 하면 우리도 싹 다 죽습니다. 독안귀마는 바람보다 빠릅니다. 결국 우리도 모두 잡아먹히고 말 겁니다. 백호처럼.”
“…….”
고민하던 동방유는 다시 한번 연적하와 독안귀마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지금의 싸움은 이상했다.
연적하는 계속 허공에 칼을 휘두르고, 독안귀마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만약 독안귀마가 술법 같은 걸 사용하느라 움직이지 못하는 거라면?
고민하던 동방유가 말했다.
“나 혼자 할 테니 너희는 꼼짝도 하지 마라.”
제자들을 남겨두고 동방유는 빠르게 독안귀마의 눈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거참, 기이한 일이로고.’
독안귀마는 마치 선 채로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성한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니 더 그랬다.
심지어 숨소리마저 편안했다.
독안귀마만 보면 연적하와 싸우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가까이 붙었음에도 독안귀마는 반응하지 않았다.
순간 동방유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독안귀마를 죽일 흔치 않은 기회가 눈앞에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동방유는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독안귀마의 목을 세게 찔렀다.
그 시간 연적하도 ‘진경’의 독안귀마와 혈전 아닌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베고 찔러도 유령 같은 독안귀마는 멀쩡했다.
보이지만 공격은 할 수 없는 기이한 상황 속에서 연적하의 속은 타들어 갔다.
심지어 구천구검조차 통하지 않았다.
연적하는 다시 한번 휘몰아쳐 오는 흑풍을 간발의 차이로 비켜 났다.
콰콰콰콰-.
아무것도 없는데 멀쩡하던 땅이 찢어지며 뒤집혔다.
연적하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방법을 찾아야 해.’
십전무후 남궁연 같았으면 벌써 묘수를 냈겠지만 자신은 머리만 아팠다.
‘귀신은 아닌데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연적하는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들자 손등으로 재빨리 훔쳤다.
땀도 땀이지만, 숨까지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체력이나 공력이 무한대도 아니고, 이런 식이라면 결과가 어떨지 뻔했다.
자신이 패하면 현천문과 금단문 사람들은 죽고 말 게다.
놈도 그걸 아는지 가끔씩 조롱하듯 ‘푸륵! 푸륵!’하고 웃었다.
신격을 잃으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화풍’이라고 할 때만 해도 대화가 될 듯싶더니, ‘독안귀마’로 부르라고 하면서부터 미쳐 날뛴다.
흑풍으로 변해서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걸 보면 영락없이 유령마(幽靈馬)다.
‘가만 유령이라고?’
번개처럼 뭔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통천안으로 저 미쳐 날뛰는 독안귀마를 보고 있지 않은가!
통천안과 독안귀마, 그리고 계속된 헛손질.
‘유령인가?’
십전무후 남궁연이 들었다면 꽤나 답답한 소리겠지만 연적하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유령이라고 생각하자 오룡궁 시절에 광해 도사에게 배운 검법이 떠올랐다.
-공진검(空塵劍)이 악귀 떼를 상 대하는 검법이라면 포룡검(捕龍劍)은 반대다. 오직 하나를 제압하기 위한 검법이다. 포룡검의 용은 악룡, 즉 악마를 잡는 검술이다.
오룡궁의 도사들에게 악마는 악귀, 즉 악한 귀신이다.
그날 통천안으로 보았던 포룡검의 모습은 평범하지 않았다.
‘저게 정말 유체이탈한 독안귀마라면 포룡검이 통할지도.’
연적하의 검법이 포룡검으로 변했다.
“동쪽 산이 불을 뿜으면[東山吐焰] 형체를 떠나 참으로 변한다[離形歸眞]…….”
청사의 끝에서 시퍼런 영기(靈氣)가 쏟아져 나왔다.
“산이 갇히고 물이 흐르면[山四水流] 용은 잡히고 마귀는 멸망한다[捕龍滅魔]!”
곧이어 청사가 흑풍을 가리켰다.
청사 끝에서 쏟아져 나간 폭포수 같은 영기가 독안귀마를 덮쳤다.
“히히힝!”
독안귀마의 입에서 처음으로 말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온몸을 옥좨 오는 영기라니?
‘진경’은 시공을 초월한 공간으로 바깥세상에서 털끝만큼의 해도 입힐 수 없다.
양쪽 다 ‘진경’에 들어왔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한쪽만 ‘진경’에 있다면 상대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간다.
그래야 하는데 이 가공할 영기의 압박은 뭐란 말인가!
독안귀마의 눈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영기를 대면하니 자신이 그토록 불편했던 원인을 알 것도 같았다.
저 남자의 영기는 자신과 달랐다.
구주, 아니 ‘왕들의 하늘’에 있는 어떤 영기와도 달랐다.
마치 영혼이 갈려 나가는 느낌이다.
화들짝 놀란 독안귀마는 미친 듯 발버둥 쳤다.
필사적인 몸부림에 영기가 살짝 뒤틀리자 독안귀마는 ‘진경’에서 뛰쳐 나갔다.
동방유의 검이 독안귀마의 목을 찌른 건 바로 그때였다.
콰직!
독안귀마의 목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비록 생채기도 나지 않았지만 혼비백산한 독안귀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독안귀마가 사라지자 정일도와 구석정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스승님! 독안귀마가 달아났습니다!”
“스승님의 일검이 통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