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65
665회. 죽기 싫으면 꿇어
오지산 중지봉 협곡.
천뢰종 연합을 발견한 천지종의 현원 제군이 추회 존자를 힐끔 보았다.
“천뢰종 연합입니다. 지금 시작할까요?”
빙설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현원 제군은 천지종의 책사 노릇을 했다.
군림전의 대륜 제군이 천지종의 칼이라면, 북두전의 현원 제군은 머리였다.
당연히 중지봉 협곡에는-비록 빙설화의 것에는 못 미치지만-천붕지환(天崩之患)의 법진이 설치되어 있다.
빙설화 제군의 법진이 너무 뛰어나 그간 뒤로 밀려났었지만, 천붕지환도 천뢰종 연합에 괴멸적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법진이었다.
추회 존자는 묵묵히 하늘을 응시하기만 했다.
무턱대고 싸움을 시작하기에는 연 제군의 무위가 너무 뛰어났다.
연 제군을 회유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정신 못 차리게 흔들어 놓아야 한다.
빙설화 제군을 뇌옥에 가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그걸 써먹어 보지도 않고 날린대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네.”
추회 존자의 말에 현원 제군은 한 걸음 뒤로 슬쩍 물러났다.
대륜 제군이 자신의 옆자리로 돌아온 현원 제군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현원 제군, 천붕지환의 법진으로 연 제군을 죽일 수 있겠소?”
“오행금종진을 뚫고 달아났다지요?”
“어디 그뿐인지 아시오? 적연부동(寂然不動)의 법진까지도 소용이 없더이다.”
현원 제군이 피식 웃었다.
적연부동은 단지 술법을 방해하는 법진이다.
고작 그게 실패했다고 우려하는 모습을 보니 가소로웠다.
적연부동이 정신에 작용한다면 천붕지환은 물질을 지배하는 법진.
협곡이 무너지면, 제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생매장 당하고 말 것이다.
“천붕지환은 고금제일의 법진이니 기대해도 좋소.”
“그랬으면 좋겠소. 연 제군이 설치고 다니지만 못하게 해 주시오.”
대륜 제군은 똥 씹은 얼굴로 빠르게 다가오는 천뢰종 연합을 노려보았다.
연합의 중심인 천지종이 전투의 선봉이라니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그때 천뢰종 연합의 선두에서 한 사람이 단독으로 치고 나왔다.
자칭 대종사라는 연적하 제군이었다.
그러자 서너 걸음 앞에 있던 추회 존자가 호응하듯 그를 향해 날아갔다.
마침내 대종사 연적하와 천지종의 종사 추회 존자가 마주 보고 섰다.
연적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한 번쯤 본 얼굴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난 천뢰종의 대종사 연적한데, 그쪽은 누구신지?”
“나는 천지종의 종사인 추회 존자일세. 소요종의 제군이라 들었는데, 천뢰종으로 적을 옮긴 모양이지?”
추회 존자는 의도적으로 연적하를 깎아내렸다.
그를 대종사라고 부르면 종사인 자신의 위상에 흠이 가는 까닭이다.
“뭐 그렇게 됐어요.”
“그대가 천뢰종에서 무슨 짓을 하건 내 알 바 아니니 묻지 않겠네. 그런데 한산주에는 무슨 일인가? 그 것도 종문 고수들을 뒤에 줄줄이 달고.”
“그쪽이 불귀곡에 갔던 이유와 같아요.”
연적하가 추회 존자를 빤히 응시했다.
목적을 밝혔으니 이제는 상대가 투항하든지, 싸우든지 결정할 일만 남았다.
추회 존자는 연적하 제군의 뒤쪽에 도열한 천뢰종 연합을 힐끔 보았다.
수적으로 천지종 연합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거기에 연적하 제군의 무위가 더해지면 힘겨운 싸움이 될 게다.
소요종은 손쉬운 상대였는데, 어쩌다 저런 변종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직 공개하지 않은 무기가 있다.
그녀는 빙설화 제군이 연적하 제군에게 치명적이기를 바랐다.
그때 문득 빙설화 제군의 말이 떠올랐다.
-나를 미끼로 연 제군을 협박할 생각이라면 하지 마세요. 천지종이 사라질지도 몰라요.
다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고작 제군 하나를 협박한다고 천지종이 사라지다니?
모두가 빙설화가 아직 여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다.
‘쯧! 어리석은 사람.’
자신이 가진 재능의 가치를 모르고 한낱 남자에 매몰되어 허우적거리다니.
눈앞의 사내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난다.
그래서 추회 존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빙설화 제군의 이야기를 꺼냈다.
“빙설화 제군이 그대의 처라지?”
“…….”
연적하가 뜨악한 눈으로 추회 존자를 보았다.
왕들의 하늘에 온 이래 지금처럼 놀란 적은 없는 것 같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많이 놀라는 걸 보니 사실인 모양이군. 하기야 빙설화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지.”
이내 정신을 수습한 연적하가 물었다.
“내 처는 그런 말을 여기저기 하고 다닐 사람이 아니야.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글쎄, 무슨 짓을 당했을까?”
추회 존자는 연 제군이 충격을 받자 여유를 부렸다.
저토록 빙설화를 걱정하는 걸 보니 의외로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돌연 연적하 제군의 몸에서 광포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때문이다.
“이 늙은이가 뒈지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뭐? 무슨 짓을 당했을까?”
가공할 기운에 놀란 추회 존자가 급히 소리쳤다.
“빙설화는 아직 무사하다! 그녀의 신변에 일이 안 생기기를 바란다면 투항해라! 그럼 빙설화를 복권시키고, 너에게도 종사에 버금가는 지위를 내리겠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연적하가 멈칫했다.
“빙설화를 어떻게 한 거야!”
“그녀는 지금 너와 내통한 죄로 천지종의 뇌옥에 감금되어 있다. 하지만 네가 투항한다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연적하가 복잡한 눈으로 추회 존자를 보았다.
소요종에서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종문에서의 평화 공존은 서열과 능력이 일치할 때나 가능하다.
개는 호랑이를 발밑에 둘 수 없다.
추회 존자는 결국 종문의 질서를 핑계로 자신과 남궁연을 제거하려 할 것이다.
게다가 천문을 열어야 하는 자신에게 투항이라니.
쉬운 길을 두고 왜 어려운 길로 간단 말인가.
“나더러 투항하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예상치 못한 연적하의 반문에 추회 존자는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라니? 너는 설마……. 빙설화를 구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냐? 속세에서의 연을 끊었다고?”
“아니.”
“그런데 왜 투항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빙설화 제군이 천지종의 뇌옥에 있다면서? 천지종을 여기서 다 쳐 죽이면 해결되잖아. 나는 그쪽이 더 쉬울 것 같은데? 두 번 말하지 않을 거야. 죽기 싫으면 꿇어.”
“뭐라? 천지종을 다 쳐 죽이겠다고? 미쳤군. 빙설화와 너는 미쳤어! 네가 그처럼 천지종을 능멸했으니, 천지신명에 맹세코 오늘 너를 죽이겠다! 그리고 돌아가 발정 난 개들에게 빙설화를 던져 주겠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추회 존자는 급기야 빙설화까지 걸고 넘어갔다.
추회 존자의 극단적인 선언에 연적하는 부들부들 떨었다.
발정 난 개들에게 그녀를 던져 주겠다니.
머릿속에서 뭔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방금까지도 폭발할 것 같던 혈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붉으락푸르락하던 그의 표정도 차분한 혈색을 되찾았다.
“고마워. 마음의 부담을 덜어 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연적하가 품에서 청사를 꺼내 들었다.
살인에는 정신적인 고통이 뒤따른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인을 금기시한다.
연적하처럼 마음이 여린 사람은 더더욱 그런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지금 추회 존자의 잔혹한 발언에 금기의 사슬이 끊어져 버렸다.
연적하가 전의(戰意)를 드러내자 추회 존자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연적하의 무위를 알기에 혼자서 상대할 생각을 버린 것이다.
그런 추회 존자를 보필하듯 좌우로 다섯 명의 제군들이 늘어섰다.
연적하는 망설이지 않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이윽고 연적하와 추회 존자를 필두로 한 천지종 제군들이 공중에서 격돌했다.
천뢰종 연합도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대종사인 연적하가 추회 존자 등과 싸우자 물밀듯 협곡으로 밀려갔다.
“와아아!”
“죽여!”
묵묵히 달려가는 노조들과 달리 아직 속세의 때가 덜 벗겨진 진인들은 기세를 돋우려는 듯 악을 써 댔다.
그건 천지종 연합도 마찬가지였다.
천지종 연합의 진인들도 질세라 목청껏 소리쳤다.
이윽고 공중에서 시작된 종문 간의 전쟁은 지상을 피로 물들였다.
천뢰종 연합의 제군들이 끼어들자 추회 존자와 천지종 제군들은 지상으로 내려가, 양쪽 진영의 종문 제 자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제군의 숫자에서 밀리자 양쪽 진영의 종문 제자들을 방패로 삼은 것이다.
그 바람에 천뢰종 연합의 제군들은 천지종 제군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대혼란의 와중에도 연적하는 추회 존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추회 존자가 방패로 삼은 천지종 고수들을 망설임 없이 양단하며 달려갔다.
연적하가 지나간 자리마다 천지종 고수의 시체가 즐비했다.
미꾸라지처럼 뒤로 물러나던 추회 존자가 현원 제군에게 소리쳤다.
“지금 시작하게!”
그녀의 명에 현원 제군이 멈칫했다.
처음의 계획과 달리 협곡에는 천지종과 천뢰종 연합이 뒤섞여 있었다.
지금 법진을 발동하면 연적하를 생매장할 수 있지만, 천지종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현원 제군이 망설이자 추회 존자가 버럭 화를 냈다.
“뭐하나! 다 죽어야 정신을 차릴 건가!”
그 서슬에 놀란 현원 제군은 반사적으로 법진의 발동 주문을 외웠다.
“하늘과 땅이여 내 명을 받으라! 천붕지탁(天崩地坪)!”
전신의 영기가 일시에 빠져나가자 현원 제군은 비틀거렸지만 이내 후방으로 내달렸다.
콰르르르릉-!
귀청을 찢는 듯한 폭발음과 함께 천지가 진동했다.
천붕지괴(天崩地壤)가 따로 없었다.
비산하는 흙먼지가 앞을 가렸지만 현원 제군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천붕지환의 법진에서 벗어나려면 계곡을 빠져나가야 했다.
아비규환의 비명이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달렸다.
천붕지환의 법진에 들어간 영석만 해도 백 개가 넘는다.
열 개만 있어도 됐지만, 확실하길 바라는 추회 존자의 뜻에 따라 백 개를 썼다.
천지종 고수들에게 미리 화를 피할 수 있는 ‘복후지지(福厚之地, 복되고 후덕한 땅으로 인도한다)’의 부적을 나누어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쯧! 알아서들 살아 나오시게.’
천붕지환의 법진이 발동하면 폭발한 파편들로 인해 운종술이나 어검비행을 쓰지 못한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운종술과 어검비행을 쓸 사람도 없겠지만 말이다.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복후지지’의 부적뿐이다.
부적을 가진 자는 부지불식간에 안전지대로 다닐 수 있게 된다.
지금처럼 천붕지환의 파괴력이 커진 상태에서 그게 통할지 의문이지만.
가까스로 협곡을 탈출한 현원 제군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악! 하악! 하악!”
천지종에 발을 들인 이래 이처럼 육체를 혹사하기도 처음이다.
협곡 밖에 있던 태상종과 무극종 고수들이 몰려왔다.
무극종의 구산 존자가 흙먼지에 가려진 협곡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천붕지환의 법진을 발동했습니다. 지난밤 천지종에서 협곡에 설치해 두었던 것이지요.”
“설마 무너뜨린 것이오?”
“적의 기세가 너무 강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현원 제군과 구산 존자의 대화 중에 수십 명의 천지종 고수들이 흙먼지를 뚫고 나왔다.
그중에는 추회 존자와 대륜 제군, 일성 제군도 있었다.
천수각의 곡분조 노조가 바쁘게 돌아다니며 생존자 수를 셌다.
이백사십여 명의 천지종 고수 중 협곡을 빠져나온 사람은 백여 명에 불과했다.
절반이 넘는 백사십여 명의 고수가 희생된 것이다.
한숨을 내쉬던 현원 제군은 무심코 위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헉!”
자욱한 협곡의 흙먼지 위, 까마득한 하늘에 붉은 검을 등지고 서 있는 연적하 제군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