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28
728회. 메누아의 자각몽(自覺夢)
동방성.
사천포 풍월루.
새벽 미명.
무슨 꿈을 꾸는지 잠든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꿈속에서 그녀는 열두 살의 마족 소녀, 메누아였다.
그녀는 좁은 길을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길의 좌우편은 황야였는데 검은 전갈과 독사로 가득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몸은 녹아 버릴 것 같았지만 나무 그늘 하나 보이지 않았다.
끝없는 길에 지친 메누아가 잠시 멈춰 섰다.
‘이건 꿈이야. 그런데 왜 또 이 꿈을 꾸고 있지?’
자신은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다.
그러니 이런 상황이 현실일 리가 없다.
이 ‘길 위를 걷는 꿈’은 마신이 되기 전까지 그녀를 괴롭히던 악몽이었다.
어린 시절 실제로 이런 길 위에서 죽기 직전까지 내몰린 적이 있다.
그 뒤로 힘들거나, 마음이 약해진다거나 할 때면 그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마신이 된 뒤로는 꾸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마음이 약해진다거나 힘들 일이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지금 얼토당토하지 않게 길 위를 걷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다.
메누아는 황당하다 못해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전쟁을 앞두고 연약하던 시절의 악몽이라니!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꿈에서 깨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어디 꿈이 노력한다고 뜻대로 되던가.
메누아의 자각몽(自覺夢)은 그녀의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됐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토록 오래전의 기억인데도 지금 경험하는 것처럼 선명하다?
아니 심지어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모호할 정도였다.
메누아는 손을 흔들어 황야의 전갈들에게 영기를 뿌려 보았다.
역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지가 터지고 갈라졌어야 하는데 황야의 전갈과 독사 들은 멀쩡했다.
메누아가 황망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보았다.
꿈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마신의 삶이 꿈이었을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씩 불안이 싹텄다.
악몽답게 길은 끝나지 않았다.
그 전에 먼저 정신을 잃고 쓰러질 판국이다.
‘혹시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 꿈에서 깨어나게 될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전에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마신의 정신력으로 죽을 지경이 돼서 쓰러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과거에 갔던 곳보다 훨씬 더 먼 곳까지 타박타박 걸어갔
길은 점점 더 좁아져 이젠 전갈과 독사들이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자칫 잘못하면 황야로 들어갈 판이다.
그래도 메누아는 도리어 희망을 가졌다.
지금까지 이 길이 무한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좁아지는 걸 보니 끝이 있는 모양이다.
몸과 마음은 힘들지만 악몽의 끝을 본다는 게 어딘가!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
메누아는 그 단순한 이치를 새삼 깨달았다.
마침내 길이 끝난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바라던 것이지만, 오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다.
길의 끝에 있는 것은 전갈과 독사로 가득한 황야였다.
“하!”
메누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고작 이걸 보려고 그 오랜 세월을 걸었던가 생각하니 허탈했다.
그저 길 좌우편만 봐도 그만인 것을, 왜 아득바득 끝까지 왔나 모르겠다.
화가 난 그녀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왜냐고요! 끝까지 가 봐야 아무것도 없는 것을 왜 가게 만들었냐고요!”
그때 황야 저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를 원한 것은 너다.
“나는……. 나는…….”
메누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길을 가는 것은 그녀의 악몽이었지만 동시에 그녀가 바라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축 처져 있던 메누아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꿈인데, 자신의 의지와 동떨어진 말을 하는 존재라니?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여전히 살풍경한 마천의 황야만 눈에 들어왔다.
저기 어디에 누군가 있다.
왠지 그런 확신이 생긴 그녀는 다시 외쳤다.
“나는 이 황야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역시나 황야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 황야는 너의 근원, 이곳을 벗어나면 너는 죽는다.
“그래도 괜찮아요! 지긋지긋하다고요! 이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어요!”
-…….
황야가 속삭였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메누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물었다.
“당신은 정말 구전범천인가요?”
대답 대신 모래바람이 훅 하고 불어왔다.
흠칫 놀란 그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바람이 잠잠해지자 뗐다.
객잔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새벽의 서늘한 바람이 은은하게 밀려들고 있었다.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는 튕겨 나듯 침상에서 일어났다.
돌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심장이 뜨겁게 펄떡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탁(神託)을 받은 모양이다.
“호호호! 호호호홋!”
그녀의 웃음소리가 사천포에 퍼져 나갔다.
깊게 잠들어 있던 마물, 마귀, 마족들이 하나 둘 깨어나 이끌리듯 풍월루로 모여들었다.
잠시 후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는 옷을 갈아 입고 풍월루 밖으로 나갔다.
그녀를 본 마물, 마귀, 마족 들이 일제히 괴성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아!”
“우어어어어!”
마물들이 내지르는 소리로 사천포가 들썩거렸다.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가 군단장 악투스 발라지크를 향해 물었다.
“준비는 됐느냐?”
“마신이시여!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천족의 살을 발라 진상하겠나이다!”
“가라! 마신의 이름으로 천족을 멸해라!”
“존명!”
군단장 악투스 발라지크가 휘하의 마족들을 향해 명했다.
“마신님의 명이시다! 천족을 멸하라!”
“와아아아!”
마족들이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이윽고 마족 다이몬이 돌아다니며 마족들에게 승선할 배를 지정해 주었다.
마물과 마귀와 마족이 항구로 몰려갔다.
백이십 척의 배에 승선하는 데만도 두 시진(4시간)이 걸렸다.
오만이나 탔는데도 배에 타지 못한 마물과 마귀, 마족 들이 훨씬 많았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으며 백이십 척의 목선이 사천포를 떠났다.
***
삼채성.
옥천항.
사천포를 감시하던 배들이 옥천항으로 돌아오면서 옥천항이 발칵 뒤집혔다.
옥천항의 종루에서 연신 위험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땡! 땡! 땡! 땡! 땡-!
“마물들이 배에 타고 있다!”
“마신의 군대가 백리하를 건너온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안전한 서쪽 지방으로 피난 갈 준비를 했다.
정찰병들의 말에 의하면 사천포의 배는 무려 백이십 척.
옥천항에 있는 배가 마흔네 척이니 누가 봐도 중과부적이었다.
마신의 배들 중 수십 척만 도하에 성공해도 옥천항은 지옥이 될 터였다.
때마침 옥천항에 돌아온 연적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안학궁에서 잤더라면 종문은 물론 천족까지 발칵 뒤집혔을 게 뻔했다.
연적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세 개 종문의 고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천뢰종의 종사 광성 존자가 묵례를 올린 뒤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숙소로 사람을 보냈습니다만 길이 엇갈렸나 봅니다.”
“그러게요. 무슨 일이래요?”
“새벽에 마물들이 승선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적들이 곧 백리하의 도하를 시도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출항을 해야겠네요?”
“그렇습니다. 천족과 협의하여 종문은 대형 목선 한 척을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자리가 부족할 텐데?”
대형 목선의 승선 인원은 천 명임에 반해 종문 제자의 숫자는 이천이나 됐다.
그러니 천 명은 꼼짝없이 항구에 남아 있어야 했다.
이번에는 태상종의 종사 진표 존자가 끼어들었다.
“배가 부족해서 천족들도 칠천삼백여 명을 경계병력으로 남겨 둔다고 했습니다.”
“저런. 그렇게 모은다고 모았는데 많이 부족했네요?”
그러자 광성 존자가 답했다.
“무량하로 빠져나간 배를 제외하고 인근의 배는 모조리 끌어 모았습니다. 수상전이 길어지면 우리에게 불리해질 겁니다.”
진표 존자도 한마디 보탰다.
“그것도 문제지만 마신의 배가 아군을 지나쳐 상륙할까 걱정입니다. 선박이 백이십 척이나 된다고 하는데, 마흔네 척으로 막을 수 있을지…….”
“그것도 그렇네요. 마흔네 척을 지나치는 배도 나올 수 있겠는데요?
천족의 그 총참모는 그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안했어요?”
“마족들이 마신을 호위하느라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 같아서 그냥 넘어갔는데……. 마신의 배가 많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드려 본 말씀입니다.”
“총참모 아가씨의 말을 믿어 보자고요. 우리보다는 더 잘 알지 않겠어요?”
언제부터인가 연적하는 영역을 구별했다.
예컨대 힘쓰는 사람은 힘을 쓰고, 머리 쓰는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한다.
그걸 거꾸로 해서 힘쓰는 사람이 머리를 쓰면 문제가 생긴다.
그건 남궁연과 오래 생활하다가 몸에 밴 습관이었다.
‘자갈이 백 번 구르는 것보다 바위가 한 번 구르는 게 낫다’는 걸 알면 누구라도 그러리라.
그래서 수상전에 대해서도 총참모인 벨 소니아에게 무조건 의지했다.
총참모 벨 소니아의 능력이 기대에 미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연적하가 천족의 총참모를 믿어 보자고 하니 두 종사는 할말이 없었다.
연륜이라는 게 있다.
두 종사는 총참모 벨 소니아보다 수십 배 오래 살았다.
그들의 경험에서 쌓인 지혜에 의하면 이번 수상전 계획은 탁상공론에 가까웠다.
도하가 목적인 마신의 배들이 수상전에 응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물론 마신의 배가 전투에 휩싸이면 다른 마족들도 지나쳐 가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백이십 척이 전부 그럴까?
물론 그들도 적이 그러기를 바라지만,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수십 척은 그냥 지나쳐 옥천항으로 직진할 것도 같았다.
두 사람은 살짝 불안했지만 하늘 같은 대종사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연적하와 종문 고수들이 항구로 나가니 천족들은 벌써 배에 오르고 있었다.
총참모 벨 소니아가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대종사님. 들으셨겠지만 적들의 배가 사천포를 떠났다고 해요. 지금 즉시 출항해야 할 것 같아요. 대종사님과 종문 분들은 중앙의 대장기(大將旗)가 달린 선박을 이용해 주세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인사 나눌 틈도 없이 연적하는 총참모 벨 소니아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 후 연적하와 천 명의 종문 고수들은 대장기가 걸린 대형 목선에 올랐다.
총참모 벨 소니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따로 진형을 연습할 시간이 없어서 일자진(一字陣)으로 정했어요. 마신은 자부심이 남다르니 대장기가 걸린 배를 목표로 할 거예요.”
“마신이 저 깃발의 의미를 알아요?”
연적하가 하얀 바탕에 천족의 글자가 적힌 대형 깃발을 가리켰다.
“네, 천계가 마천과의 전쟁 때 사용하는 대장기거든요. 분명히 군단장인 악투스 발라지크가 먼저 오고, 그다음에 마신이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옆에서 듣고 있던 광성 존자가 한 마디 했다.
“설마 우리 종문에 그 마족들을 다 떠넘기려는 거요? 천족들은 뭘 하고?”
“그건 대종사님께서 마신에 맞설 유일한 분이기에 어쩔 수가 없어요. 저희는 대종사님의 배에 다른 마족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드릴 거예요.”
“하면 기동(機動)은 어떤 식으로 할 거요? 파도처럼 한번 몰려가는 것으로 끝은 아닐 테고.”
“그건 제가 사령선(司令船)에서 깃발로 신호를 보낼 거예요. 배를 조정하는 선원들의 교육은 마쳤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역시 총참모답게 그런 쪽으로는 빈틈이 없었다.
광성 존자는 묻는 족족 시원하게 답을 해 주니 머쓱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러는 동안 배가 출렁하더니 천천히 움직였다.
더 이상 질문이 없자 총참모 벨 소니아는 묵례를 올리고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