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94
894회.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 노릇 한다
반 시진(1시간) 전.
무한.
소새호.
호천맹 잔당을 추격하던 마교 교주 천자마 단제산의 걸음이 느려졌다.
눈앞에 펼쳐진 호수의 풍광이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가 멈춰 서자 마교 본진 이백오십여 명은 시키지 않았음에도 천막을 치고 쉴 준비를 했다.
마교의 입장에서 호천맹은 하루살이에 불과해 긴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무 그늘에 앉은 단제산이 호수 위를 떠다니는 배를 보며 중얼거렸다.
“뱃놀이 중이라는 건가.”
그를 호위하던 혈우검 단손익이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일각(15분)도 안 돼 배는 호수가에 정박했다.
곧이어 단손익이 뱃사공과 젊은 남녀를 끌고 와 교주 앞에 세웠다.
단제산이 젊은 남녀를 빤히 보며 물었다.
“어떤 사이냐?”
서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소생은 운학상방 방주의…….”
“어떤 사이냐고 물었다.”
단제산이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제야 서생이 급히 입을 열었다.
“이 아가씨는 금선기루의 기녀 산월입니다. 저는 손님이고요. 소생이 잠시 뱃놀이를 하자고 청해 함께 있었던 것뿐입니다.”
“아쉽군.”
연인이나 지인이었다면 조금 더 보는 맛이 있었을 터인데 그건 욕심이었던가 보다.
단제산이 단손익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단손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생의 목을 부러뜨린 후 호수에 던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산월이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나으리! 살려 주세요!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할 터이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단제산은 애절하게 비는 여자를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기녀라고 하니 감흥이 식어 버렸다.
경국지색의 미녀도 아니고, 이놈 저놈 품던 여자를 굳이 품을 이유가 없었다.
그가 산월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두고 고민할 때 귀검 진여락이 다가왔다.
“교주님. 남방사자와 적룡대주가 교주님 뵙기를 청합니다.”
“오라 해라.”
단제산은 기녀의 처분을 뒤로 미루었다.
지금은 호천맹 잔당을 뒤쫓던 두 사람이 왜 갑자기 돌아왔는지가 더 궁금했다.
잠시 후 남방사자와 적룡대주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무릎 꿇고 소리쳤다.
“교주님! 남천이 나타나 적룡대를 모두 죽였습니다!”
“그가 교주님에게 ‘하석촌으로 오라’는 말을 전하라 했습니다!”
단제산이 눈을 찌푸렸다.
남천 연적하를 죽일 생각이지만 상대가 이렇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응?’
단제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재견우와 금환의 옷이 너무 깨끗해서다.
적룡대가 몰살을 당할 정도로 싸웠는데 구겨짐 하나 없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너희 둘의 옷이 깨끗하구나.”
재견우가 답했다.
“심하게 찢어져서 갈아입고 왔습니다.”
그러자 단제산은 친위대 대주 단손익에게 시선을 돌렸다.
순간 단손익의 입술이-전음을 보내는 사람처럼-미미하게 움직였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단제산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희가 돌아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너희들의 상의와 하의가 달랐다고 하는구나. 촌민들의 상의를 걸쳐 입었다고 하던데. 왜 거짓말을 했느냐?”
금환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재견우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거짓말에 살을 보탰다.
“너무 찢어져 아무 옷이나 걸쳤다가, 돌아와서 갈아입은 것입니다.”
‘심하게 찢어져 갈아입고 왔다’는 처음의 말과 미묘하게 달라진 발언이다.
단제산의 눈에 살기가 차올랐다.
어떤 이유에서건 마교 교주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벗어라.”
단제산은 두 사람이 ‘싸우지 않고 달아났다’고 생각했다.
옷을 벗겨 보면 옷이 갈기갈기 찢어질 정도로 싸웠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으리라.
그런데 재견우와 금환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옷을 벗지 않았다.
“흐흐흐.”
단제산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마교 교주의 명을, 그것도 면전에서 거부하는 놈들이라니?
마교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교주에게서 살의를 느낀 재견우와 금환이 오체투지(五體投地) 하며 말했다.
“교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가 옷을 벗지 못한 것은 연적하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기이한 변명에 단제산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잠시 눌렀다.
“연적하가 어쨌기에?”
머뭇거리는 재견우를 대신해 금환이 답했다.
“저 간악한 연적하가 교주님에게 전하는 말을 저희의 등에 칼로 새겼습니다.”
“벗어라.”
거듭된 교주의 명에 재견우와 금환은 마지못해 옷을 벗고 납작하게 엎드렸다.
두 사람에게 다가가 등에 새겨진 글을 읽던 단제산은 미친 듯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어느 순간 웃음이 뚝 그쳤다.
빠드득 이를 갈던 단제산은 재견우와 금환의 목을 뽑아 양손에 나눠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
강물 위를 바람처럼 달리던 단제산의 눈에서 한순간 섬광이 번쩍였다.
멀리서 기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천지자연의 기운도 아니고 선기(仙氣)도 아닌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 같지 않았다.
‘기이하군.’
생사불괴문의 천람신공(天覽神功)을 대성한 이후로 만물이 발아래로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런데 저 기운만큼은 자신의 발아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강물 위를 달리던 단제산의 눈에 낚시질을 하는 청년이 들어왔다.
물어보나 마나 연적하라는 놈이리라.
마교 교주인 자신을 ‘개’에 비유하고 태연하게 낚시질이라니?
울컥한 그는 들고 있던 재견우와 금환의 머리를 연적하에게 던졌다.
두 개의 머리통이 포탄처럼 연적하를 향해 날아갔다.
쐐애액-! 쐐액-!
무려 마교 교주의 내공이 실린 머리통이다.
머리통에 담긴 태산과도 같은 기운이 공간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그 섬뜩한 소리에 놀란 연적하는 낚싯대를 내던지고 황망히 뒤로 물러났다.
쾅! 콰앙-!
한순간 호숫가에 일 장(약 3미터)여 너비의 구덩이 두 개가 만들어졌다.
연적하가 급히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살폈다.
엉겁결에 버린 낚싯대를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낚싯대가 있던 자리에는 지형을 바꿀 정도로 큰 구덩이만 있었다.
그사이 단제산은 뭍으로 들어왔다.
머리통을 던지고서 분이 풀렸는지 그의 안색은 평소로 돌아가 있었다.
“네가 남천 연적하냐?”
“그런데요? 노인장은 누군데 초면에 그렇게 흉한 걸 던져요?”
“나는 네가 오라고 부른 마교의 교주다.”
“아하! 어쩐지.”
“어쩐지?”
“보통 사람들은 사람 머리통을 들고 다니지 않잖아요. 마교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나도 보통은 머리통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그들을 통해 나를 능멸하였기에 부득이하게 그들의 머리를 들고 왔느니라.”
“아! 그 두 사람을 죽였어요? 같은 마교 식구 아니에요? 그렇게 막 죽여도 되나?”
“그래 봐야 그들의 신분은 상생(上生)에 불과하다. 상생의 생사는 천인(天人)에게 달려 있느니라. 그들도 내 손에 죽게 된 것을 영광으로 알 게다.”
“영광은 개뿔. 자기 수하를 죽인 변명치고는 상당히 고급스럽네요. 그래도 당신이 쪽팔리다고 수하를 죽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아무리 늙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죠?”
“으흐흐흐. 격장지계를 쓰려는 모양인데, 아서라. 우리가 그런 하찮은 꼼수에 흔들릴 사람이더냐?”
“격장지계 아닌데…….”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교 교주가 자기 수하를 죽인 사실을 지적했더니 격장지계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너에 관한 이런저런 소문을 들었다. 녹림 출신에 무당파 제자, 그리고 남궁세가의 여식과 혼인을 했다지?”
“또 있는데. 그건 못 들으셨나 보네?”
“뭐가 더 남았느냐?”
“고금제일인.”
이윽고 과장되게 턱을 치켜든 연적하가 단제산을 내려다보았다.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 노릇 한다더니 딱 그 짝이로구나. 천박한 입을 가진 놈에게 고절한 무공이라니.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군. 너의 스승이 누구냐?”
“구천현녀.”
“그렇군. 구천현녀에게 가거든 천자마 단제산이 보내서 왔다고 하거라.”
단제산이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그는 연적하가 자꾸 허튼소리만 해서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연적하가 급히 말했다.
“잠깐! 나도 말할 시간은 줘야지. 나는 뭐 궁금한 게 없는 줄 알아?”
단제산은 검 끝을 지면으로 늘어뜨렸다.
어차피 연적하와 자신 둘 중 하나는 살아남지 못할 테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말해라.”
“당신의 별호가 천자마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건 어떤 천자마야?”
“어떤 천자마냐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천자마는 육천의 하나인 타화자재천의 왕이다. 마천의 지배자로 천마라고도 불리지.”
“타화자재천이 뭔데?”
“무식한 놈. 타화자재천은 욕계라 불리는 중생계, 인간계, 천상계에 속하는 여섯 하늘 중 하나다.”
“그 욕계는 범천욕계와 다른가?”
“범천욕계?”
“아, 내가 전에 읽은 경전에 ‘범천욕계’라는 이름이 나와서 말야. 범천욕계라는 말을 처음 듣나 봐?”
“흥! 욕계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
순간 연적하는 저 단제산이 범천욕계에 대해 모른다는 걸 알았다.
아무래도 그가 말하는 천자마와 자신이 죽인 천자마가 다른 모양이다.
“그럼, ‘범천욕계왕재천(왕들의 하늘)’이라는 것도 모르지?”
“어디서 잡서를 읽은 모양인데, ‘타화자재천’은 그런 곳과는 다르니라.”
“달라 봐야 평범한 인간들이 윤회 전생을 하는 욕계겠지. 당신이 내 손에 죽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타화자재천의 천자마와 한 몸이 될 것 같아? 아니면 이 땅에서 축생으로 다시 태어날 것 같아?”
“이 몸은 이미 천자마와 합일하여 진정한 천인(天人)이 된 지 오래니라. 교도들이 본좌를 천자마로 부르는 것도 그래서다. 더 할 말이 없으면 이제 그만 죽어라.”
단제산이 검을 수평으로 그었다.
쓰아아아-.
심해처럼 검푸른 검기에 공간이 갈라졌다.
마치 세상이 위와 아래로 이등분되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기괴한 현상에 일단 몸을 피하려던 연적하는 이내 멈춰 섰다.
본능이 속삭였다.
어느 방향으로 피하는 자신의 몸은 세상과 함께 잘려 나갈 거라고.
선후(先後)가 바뀌었다.
세상이 분리되는 걸 막지 못하면 자신의 몸도 두 동강 날 것 같았다.
연적하는 허공에서 천둔검을 꺼내 단제산의 검기를 내리찍었다.
천하를 양단하는 검기 위에 천둔검이 떨어졌다.
꽈르릉! 꽝-!
어마어마한 반탄력을 견디지 못한 천둔검이 천지간(天地間)으로 돌아갔다.
연적하는 단제산이 보여 준 검공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둔검이 깨질 정도의 파괴력이라니!
상대의 무위에 놀란 것은 연적하만이 아니었다.
단제산은 자신의 궁극기인 시공분참(時空分斬)이 무위로 돌아가자 기가 막혔다.
본래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처음부터 밑천을 드러내는 경우란 드물다.
하지만 단제산은 그런 허점을 노려 궁극기부터 사용했다.
그런데 그 회심의 일검이 도끼질 같은 단순한 일격에 막히고 만 것이다.
이미 내력의 절반을 사용해 버린 단제산은 차분하게 상대를 살폈다.
‘다행히 놈의 검은 박살 난 모양이군.’
그렇다면 자신이 우세하다.
흔히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반만 맞다.
명필이 좋은 붓을 들면 더 나은 결과를 내게 된다.
검객이 괜히 보검에 목을 매는 게 아니다.
자신에게는 신검이라 불릴 만한 보검이 있지만 상대는 맨손이었다.
‘죽인다.’
단제산은 조금 전과는 반대로 천천히 보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