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98
898회. 딱 절반만 죽입시다
호광성.
무한.
목련산.
이른 아침.
계곡으로 이백오십여 명의 남녀 무인들이 들어섰다.
마교의 본진이다.
선두에서 무리를 이끄는 혈우검 단손익에게 독행무주문의 총관 검귀 천오경이 다가갔다.
“단 대주. 우리 문주님께서 어디까지 갈 거냐고 물으시오. 여기가 목련산이니 이제 슬슬 돌아가도 되지 않소?”
그러자 단손익이 정상을 응시하며 답했다.
“남천이 호천맹을 거론하며 적당히 어울려 주다 가라고 하지 않았소? 그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최소한 산 정상까지는 올라가야 할 게요.”
“산 정상이라. 알겠소. 그리 전하리다.”
천오경이 막 돌아서려는데 정찰을 나갔던 단손익의 수하가 돌아왔다.
“대주님. 계곡 안쪽 좌우편에 호천맹 놈들이 매복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제 돌아갈 때가 된 건가.”
그러자 천오경이 물었다.
“남천은 호천맹과 적당히 어울리다 가라고 했는데…….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다른 뜻이 있겠소?”
“‘적당히’라는 말은 사람마다 그 강도가 다르오. 남천 같은 고수가 적당히 손을 봐줬다면 팔다리 하나 끊어지는 건 예사일 거외다.”
“뭐, 그렇기는 하지만……. 설마 남천이 우리가 그래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오?”
“남맹과 호천맹은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오? 남천은 남맹 소속이니 호천맹이 눈엣가시일 거외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을 대신해 호천맹을 손봐 주기를 바랄지도 모르오. 아니, 틀림 없이 그럴 게요.”
“흐음!”
단손익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대악마라 불리는 남천의 인간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고민하던 단손익은 묘법구경문, 독행무주문, 무사무생문의 문주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협곡에 매복하고 있는 호천맹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의 말에 삼문의 문주들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남천 연적하의 무위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그가 바라는 대로 해 주어야 한다.
문제는 ‘적당히’의 범위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까지 호천맹을 짓밟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묘법구경문의 문주인 불도사생(不視死生) 심상인이 자책하듯 한마디 했다.
“쯧! 이럴 줄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확실하게 물어볼 것을…….”
마교 고수들은 남천의 서슬 앞에 주눅이 들어 빨리 헤어지기만 바랐다.
그래서 적당히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않았다.
사실 남천이 남맹 사람만 아니었어도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맹의 고수인 남천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문제다.
고심하던 무사무생문의 문주 검마 은우금이 말했다.
“남천이 남맹 사람이고, 그의 인간성이 잔혹하기로 유명하니 적당히는 본심이 아닐 게요. 그렇다고 호천맹을 몰살시켰다가 무슨 꼬투리를 잡힐지 모르니, 딱 절반만 죽입시다.”
그 말에 묘법구경문의 문주와 독행 무주문의 문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 보니 대악마로 소문난 그라면 절반에 만족할 것도 같았다.
세 문주 중에 무력으로는 무사무생문의 문주인 검마 은우금이 가장 뛰어났다.
단손익 역시 반대하지 않았다.
마교의 본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무사무생문의 문주인 검마 은우금인 까닭이다.
호천맹의 절반이라면 천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반발도 잠재울 숫자였다.
그렇게 해서 호천맹의 운명이 정해졌다.
***
마교는 호천맹의 매복을 알고도 협곡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마교가 협곡 중심부에 도달할 즈음, 위쪽에서 바위들이 굴러 떨어져 내렸다.
무위가 약한 몇몇 마교 고수들이 바위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뒤이어 화살이 마교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쏟아지던 화살비가 잠시 멈칫할 때 마교의 반격이 시작됐다.
삼문의 문주와 친위대와 흑룡대 대주가 어기충소의 신법으로 솟구쳐 올랐다.
깜짝 놀란 호천맹 고수들이 다섯 명의 마교 고수들에게 달려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삼문의 문주와 친위대, 흑룡대 대주들은 호천맹 고수들 사이를 종횡 무진으로 휘젓고 다녔다.
호천맹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호천맹의 전열이 무너진 틈에 마교 본진까지 절벽을 타고 올라온 것이다.
그러자 호천맹은 손쓸 틈 없이 무너졌다.
절벽 위에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죽어 나가는 사람의 대부분이 호천맹 고수들이었다.
호천맹 맹주와 수뇌부 몇몇이 마교 고수들을 베어 넘겼지만 전세는 바뀌지 않았다.
일각(15분) 만에 호천맹의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호천맹 맹주인 무극상인은 핏발 선 눈으로 마교 고수들을 베어 갔다.
아무리 상대가 마교라 해도 호천맹의 희생이 너무 컸다.
게다가 이런 속도라면 앞으로 일각 안에 모두 죽을 수도 있었다.
연적하가 홀로 오십여 명의 마교 고수를 죽였다기에 일말의 희망을 품었는데, 이건 결과라니!
“으아아아!”
자신의 결정으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구도자로서 양심이 아팠다.
뒤늦게 ‘그깟 명예가 뭐라고 사람 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나’ 후회가 됐지만 이미 늦었다.
몰살을 피하려면 이제라도 후퇴를 명해야 할 텐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이미 전열이 무너지고 각자도생하는 상황인 까닭이다.
각자도생마저 차단당하는 와중에 후퇴는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아아! 나의 욕심으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 죄과를 어찌 감당할까.’
무극상인이 동도들의 죽음 앞에 피눈물을 흘릴 때다.
뒤쪽에서 ‘와아!’ 하는 함성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무극상인의 눈에서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검왕과 남맹의 무인들이었다.
그렇게 미운 검왕이었지만 지금은 보살처럼 보였다.
남맹이 나타나자 마교는 거짓말처럼 살육을 멈추고 줄행랑쳤다.
악에 받친 호천맹 고수들이 달아나는 마교 고수들을 잡고 늘어졌다.
그들과 드잡이질을 하던 마교 고수 십여 명이 남맹와 호천맹 사이에 갇혔다.
남겨진 마교 고수들은 곧 호천맹과 남맹의 표적이 되었다.
투기를 상실한 마교 고수들은 성난 호천맹과 남맹의 칼에 난자당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마교 고수가 죽음으로 싸움이 끝났다.
기적적으로 역전에 성공한 호천맹 고수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죽다가 살아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감격도 잠깐, 이내 그들은 피칠갑한 몸으로 동문의 시체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호천맹 맹주 무극상인이 남맹 맹주 검왕 남궁벽에게 다가갔다.
“검왕 맹주. 감사하오. 덕분에 마교를 물리칠 수 있었소.”
남궁벽이 안타까운 얼굴로 답했다.
“쉬지 않고 달려와 겨우 시간에 늦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니오. 말로만 듣던 마교가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은 미처 몰랐소.”
호천맹이 단독으로 죽인 마교 고수들은 이십여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십여 명은 남맹과 공동으로 무찔렀으니 전과로 내세우기 어려웠다.
그에 반해 목숨을 잃은 호천맹 고수들은 무려 삼백여 명이나 됐다.
절반이 조금 넘게 죽은 셈이다.
만약 남맹이 와 주지 않았다면 생존자는 손가락에 꼽았을 터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번 싸움으로 천하가 호천맹의 의기를 칭송할 겁니다.”
“하아! 희생당한 분들을 생각하면 죄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소이다.”
“그렇게 자책하지 마십시오. 호천맹의 운명은 호천맹이 개척하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무극상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왕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맞는 말이다.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람들이 먹고살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도 그래서가 아니던가.
호천맹의 싸움도 그 아귀다툼의 연장선상이다.
아귀다툼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지금 호천맹의 처참한 모습처럼…….
끝없이 자책하던 무극상인은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감사하오.”
그렇게 검왕의 조언으로 무극상인은 마음의 짐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잠시 후 호천맹과 남맹은 헤어졌다.
정주로 가는 호천맹은 북으로, 합비로 돌아가는 남맹은 동쪽으로 향했다.
***
목련산을 내려가는 내내 연적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보다 못한 심통이 슬쩍 말을 걸었다.
“공자님.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짜증이 나서 그래.”
“왜요?”
“내가 마교 놈들에게 ‘적당히’ 어울려 주고 가라 했잖아.”
“그랬지요.”
“아까 봤지? 호천맹에서 삼백 명이 넘게 죽었더라고. 그건엄청 심한 거잖아.”
“모르죠. 마교 놈들 입장에서는 그게 적당한 건지도요.”
“아니! 그게 어딜 봐서 적당하다는 거야?”
“아이고, 공자님. 마교는 눈만 마주쳐도 죽입니다. 그런 놈들의 ‘적당히’가 우리와 같을 줄 아셨습니까? 정확하게 가르쳐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그게 내 탓이라는 거야?”
“그래도 공자님 덕분에 절반 가까이 살아남은 겁니다. 그놈들이 작정하고 살수를 썼으면 거의 다 죽었을 겁니다. 마교는 본래 그런 곳입니다.”
“젠장! 죽일 사람의 숫자를 어떻게 정해? 난 그런 짓 못 해! 무조건 저놈들이 잘못한 거야!”
“길 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보십쇼. 마교 딴에는 약속을 지킨 거라니까요. 정주 지부 사람들은 죽지 않았으니 그 정도로 만족하십쇼.”
“아, 막 화가 나네. 내 말을 무시한 거잖아.”
“그놈들 입장에서는 그게 적당히 어울려 주다가 빠진 거라니까요.”
웬일인지 심통은 수그리지 않고 끝까지 마교를 편들었다.
뒤늦게 거기에 생각이 미친 연적하가 말했다.
“나 모르게 마교에 뭐 받아먹은 거라도 있어? 왜 그놈들 편을 들어?”
“언제 받아먹을 틈이나 있었습니까? 노기를 가라앉히라는 뜻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심통의 말에 연적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점심 무렵.
관도 한편의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며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선두의 총사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와아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척 봐도 남맹의 성공을 자축하는 분위기다.
남맹의 피해는 전무하다시피 한데 호천맹은 삼백여 명이나 목숨을 잃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남맹의 고수들은 그런 총사부의 마음을 알고 못 본 척했다.
그들 역시 남맹의 일원으로, 남맹의 이익이 곧 자신의 이익인 까닭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연적하다. ‘자신의 부주의로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었다’고 자책하던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대 사람들은 연적하의 눈매가 사나워지자 부랴부랴 한마디씩 했다.
“험, 험, 뭐 좋은 일이라고 저렇게 웃고 떠드는지 원.”
“남맹에도 다친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자중들 하지.”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조금 들뜬 모양인데 봐줍시다. 그동안 총사부가 고생한 것도 사실이니.”
“그, 그렇긴 하죠? 고생이 끝나게 되어 자축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일부는 총사부의 행태를 비난했지만, 총사부를 위해 변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총사부의 노고를 위로하던 남맹 총사 반천일검 모용문이 말을 이어 갔다.
“모두 고생이 많았다. 산통(말의 복부 통증)이 누구 생각인지 몰라도 좋았다. 덕분에 남맹의 피해는 줄이고, 호천맹의 피해를 늘일 수 있었다. 더도 덜도 말고 그렇게만 일해라. 그럼 된다.”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연적하가 모용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당신 지금 뭐라고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