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97
897회. 진체(眞體)와 그림자
남맹의 맹주 검왕 남궁벽이 화를 내자 연적하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만약 상대가 남궁벽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백부이자 장인을 상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남궁벽은-무공만 뛰어날 뿐-철 없는 조카이자 사위인 연적하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가 협의를 좇는 것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냐? 하지만 네가 동정하는 호천맹은 우리 남맹을 집어삼킬 정도로 강력한 무림의 지배자다. 동도(同道)라고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남맹과 호천맹은 먹고 먹히는 관계라 볼 수 있다. 홀대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서 남맹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네에, 하지만 홀대를 받아서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잖아요.’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연적하는 꾹 참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장인과 말씨름을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마교를 목련산으로 보냈음을 말하지 않았다.
‘마교 교주를 죽였다는 것으로도 이렇게 욕을 먹었는데…….’
마교를 목련산으로 보냈다고 하면 처가와의 관계가 절단 날 게 분명했다.
“하아!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그만 돌아가도 좋다.”
“예.”
연적하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이 대로 돌아갔다.
연적하가 돌아오자 청운검 남궁천이 급히 물었다.
“분위기가 싸하던데 무슨 일이냐?”
“호천맹 무한 지부 사람들을 구해 주다가 마교 고수 오십 명 정도를 죽였거든요.”
“그래? 그만한 일로 화를 내실 분이 아닌데…….”
“내친김에 마교 교주도 죽였거든요.”
“바람을 쐬러 갔다가?”
“예, 우연히 무한 지부 사람들을 구해 주다가 그렇게 됐어요.”
“아버지께서 언성을 높이실 만도 하시구나.”
“몰랐다면 모를까? 마교 놈들이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그냥 둬요.”
“무한 지부 사람들을 구한 건 잘한 일이다만 교주는 좀 피하지 그랬느냐?”
“교주를 그냥 두면 호천맹의 피해가 극심할까 봐 그랬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아, 정주 지부의 그 소협들 말이냐?”
“예.”
“그랬구나. 나는 너와 아버지의 입장 모두 이해가 된다. 에혀!”
남궁천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처음에는 부친을 원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남궁세가의 일원이라 그럴지 모른다.
남궁세가는 남맹을 만들어 칠파일문이 만든 무림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갔다.
호천맹 입장에서 보면 가장 위기의 순간에 분열을 일으킨 게 남궁세가
그 일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게다.
만에 하나 남맹이 사라지면 과거보다 더 차갑게 남궁세가를 대할 터였다.
남궁세가가 땅바닥에 처박히지 않으려면 남맹을 키워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현재 남맹의 가장 큰 경쟁자는 호천맹이었다.
남맹의 맹주인 부친이 독한 선택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적하야.”
“예.”
“나는 네가 남맹의 맹주인 아버지를 조금만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해는 해요. 부분적으로 동의를 못 해서 그렇지.”
“그래. 그 정도면 됐다. 나도 아버지를 전부 이해하지는 못한다. 아버지에게 섭섭하다고 남궁세가와 담쌓고 지내면 안 된다. 알지?”
“저보다는 백부님이 그러실까 봐 걱정이네요.”
“아버지가? 에이, 우리 아버지가 완고한 점은 있지만 그러실 분이 아니다. 설사 너에게 화가 나더라도 연이 때문에라도 참으실걸?”
“그럼 다행이고요.”
연적하는 무덤덤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검왕에게 냉대를 받으면서 남궁세가에 드나들 정도로 인내심이 강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그런 소양 교육을 배우지 못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녹림의 가르침을 따른다.
이를테면 ‘은혜는 강물에 새기고 원한은 뼈에 새긴다’거나, ‘꼴리는 대로 살아라’가 그것이다.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와룡장에서 짐승처럼 사육된 그에게 백부, 혹은 장인의 의미는 남보다 조금 더 가까운 사람에 불과했다.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오직 처와 자식.
그 외에는 예외 없이 남이거나, 남보다 조금 더 가까운 사람일 뿐이다.
맹주가 언성을 높인 걸 본 사람들은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연적하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이래서는 녹림에 몸담고 있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아니, 달라진 게 있긴 있구나.’
가족이 늘어났다.
남궁연과 연지안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이 모양이다.
좋은 일 하고도 욕을 먹으니 아무래도 욕받이로 태어난 모양이다.
그가 씁쓸한 눈으로 남맹을 둘러볼 때 총사부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외쳤다.
“목련산을 향해 신속하게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적의 암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동 간에 경계를 늦추지 마십시오!”
그 소리에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갑자기 목련산이지? 적하야. 뭐 아는 게 있느냐?”
“백부님에게 호천맹 무한 지부 사람들이 목련산으로 간다는 말을 했어요. 그것 때문일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총사 반천일검 모용문이 달려왔다.
“호천맹과의 회동을 위해 목련산에 가기로 했습니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여 주십시오.”
누가 들어도 연적하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도 이 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호쾌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모용문은 연적하에게 묵례를 하고는 선두로 돌아갔다.
남궁천이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호천맹에 얼굴도장을 찍고 가시려는 모양이네.”
순간 연적하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목련산에 가서 호천맹을 만나면 백부의 속은 더 쓰릴 텐데 고민이다.
***
북직례성.
황궁 심처.
초저녁.
이 남 일 녀가 마주 앉았다.
유명교주 팔황신모와 천자마, 그리고 금사라 불리는 우샤스 킨샤사였다.
우샤스 킨샤사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팔황신모를 힐끔 보며 말했다.
“천자마시여. 마교 교주가 죽었습니다. 마교도들이 목련산으로 가고 있지만, 결국은 패퇴하고 말 것입니다.”
천자마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왕들의 하늘에서도, 하계에서도, 연적하에게 발목을 잡히는구나.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 따위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 모두가 진선(眞仙)들의 농간이 아니겠습니까?”
“아니야. 진선들의 힘으로 상계의 신좌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오시면?”
“상계의 창조신이 관여한 게 틀림 없다.”
“하오나 창조신은 이미 태고 시대에 상계에서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다시 활동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계의 인간과?”
“그러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아니냐. 이대로라면 우리는 반드시 연적하에게 죽고 말 것이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동안 왕과 저는 유명교주의 술법으로 불완전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완전체가 되었는데 그래도 죽는단 말씀입니까?”
우샤스 킨샤사가 애매한 얼굴로 천자마를 보았다.
얼마 전까지 유명교주의 초혼술로 천자마와 자신의 신격은 상계(왕들의 하늘)와 하계(현세)로 분리되었었다.
그러다 상계의 몸이 죽임당한 뒤 하계에서 다시 합쳐져 온전한 신격을 되찾았다.
완전체가 되면서 유명교주에게 종속되었던 것도 풀렸다.
상계에서 연적하에게 죽임당하던 때보다 지금이 훨씬 강한데 천자마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반신반의하는 우샤스 킨샤사에게 천자마가 의외의 말을 했다.
“상계에서 죽임당할 때 너는 기이한 경험을 하지 않았느냐?”
“기이한 경험이라 하심은?”
“나는 빛으로 만들어진 두 갈래의 길을 보았다. 너는 그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보았습니다만 너무도 찰나지간이라……. 그저 죽음의 현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최근 연적하를 지켜보면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진선과 창조신의 도움을 받았다 해도 한낱 인간 따위에게 상계의 신들이 죽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이성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나는 태고부터 존재하여 마침내 완전무결한 신이 되었다. 이런 내가 백 년도 살지 못할 인간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그, 그건……. 설마…….”
우샤스 킨샤사가 고개를 저었다.
만약 천자마가 말하는 게 그것이라면 그건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다.
“너와 달리 나에게 두 가지 길은 찰나지간이 아니었다. 나는 그 길 앞에서 생각했고, 결정까지 했다. 더 밝게 빛나는 길을 선택했지만 나는 다른 길로 빨려 갔다.”
“빨려 갔다고요?”
“그렇다. 내 의지는 다른 길을 원했지만…….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나를 현세로 이끌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나는 내가 가지 못한 길을 두고 고민했다. 그 길은 무엇이며,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설마 왕께서는 지금의 우리마저도 온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하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어쩌면 너와 나는, 아니 상계(왕들의 하늘)에 존재하는 신들은 그림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 그림자요?”
“하계로 넘어와 완전체가 될 때의 희열을 생각해 보아라. 그런데 우리가 가진 이런 권능이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진체(眞體)는 얼마나 대단하겠느냐?”
“하지만 그건 가정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우주에 상계의 신들을 그림자로 둘 정도의 존재가 있을 리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우샤스 킨샤사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가능성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상계의 신들이 누군가의 그림자일 리가 있나!
천자마 같은 고위 신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다니? 한편으로 기가 막혔다.
“정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허면 연적하와 같은 인간에게 상계의 신들이 죽는 건 가능하고?”
“…….”
그 말에는 우샤스 킨샤사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건 ‘상계의 신들이 누군가의 그림자’라는 주장만큼이나 황당한 일인 까닭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인간인 유명교주는 술법으로 상계의 신인 너와 소통할 수 있었다. 만약 그 방법을 신인 네가 사용한다면, 진체에 닿지 않을까?”
우샤스 킨샤사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아! 천자마시여. 지금 우리가 누군가의 그림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누군가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오히려 존재의 의미가 쇠퇴할 뿐이 아닌가.
그러자 천자마가 담담하게 말했다.
“희망이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반드시 연적하의 손에 죽을 것이다. 죽어서 더 대단한 진체로 돌아간다.는 희망이 있다면……. 까짓 죽음이 대수겠느냐?”
“연적하에게 패할 것이라 생각하시는군요.”
“놈의 구천검령을 상대할 방법이 나에게는 없다. 너는 있느냐?”
“…….”
구천검령을 떠올린 우샤스 킨샤사의 얼굴에서 투기가 사그라졌다.
그런 그의 변화를 지켜보던 천자마가 유명교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팔황신모여.”
“예.”
초점 없는 눈으로 앉아 있던 팔황신모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하계의 너는 어떻게 상계의 신인 우샤스 킨샤사와 소통할수 있었느냐?”
“태일관의 주문인 ‘태상정일강림신주(太上正一降臨神呪)’를 암송하였습니다.”
“암송해 보아라.”
“모든 인연을 내려놓고 털끝 하나도 일으키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태어나기 이전의 선천(先天)이요, 진리인 무극(無極)이다. 태초의 공허에 녹아들면 성(性)과 명(命)이 들어가는 곳에서 의식을 잊게 된다. 의식을 잊은 뒤에야 신들과 만날 수 있으니 옥청(玉淸)에서 아홉 마리 용이 내려오리라.”
팔황신모의 입에서 사문을 멸문시키면서까지 독점하려 했던 비결이 술술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