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188
3.
묘시(卯時, 새벽 5시)가 되자 명세기는 선잠을 깨고 일어났다.
밤새 뒤척거린 초조함이 다시 곤두서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당문으로부터의 답이 없기 때문이다. 무당산의 전황도 어찌 됐는지 아직 소식이 없다.
그래서 복잡하고 답답한 생각이 더 하다. 이젠 정말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맹호와 종패 등을 처치하자면 당문 밖에 없어. 그들을 잡아야 해.’
어금니를 물고 결의를 다시 세우던 명세기는 종소리를 들었다. 비상을 알리는 소리다. 아군이 아닌 다른 무리나 세력이 접근했음을 알리는 소리다.
눈썹을 곤두세운 명세기는 처소를 나가 상황을 파악했다. 정말로 수상한 무리가 강 너머에 접근해 왔다. 새벽어둠에 물든 검은 그림자들은 섬뜩한 살기를 풍겼다. 수백 명이다. 그 무리의 중간에서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저들은?’
의문과 예감을 씹는 명세기에게 비격이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당문일행입니다. 당가주가 행차했습니다.”
뜨거운 찻물을 찻잔에 부어 내밀며 명세기는 권했다.
“변변치 않으나 차가워진 새벽이슬을 맞으셨으니 뜨거운 차로 피로를 푸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곧 조반을 마련하라 이르겠습니다.”
당가주 당대천은 딱히 이렇다 할 표정을 보이지 않은 채 찻잔을 잡았다. 찻물을 넘기는 그 모습을 명세기는 유심히 바라봤고, 그런 명세기를 방학천은 안 보는 척하며 응시했다. 확실히 자신을 못 알아보고 있었다.
찻잔을 내린 당대천이 입을 열었다.
“시간을 줄입시다. 본가는 백혈맹은 물론 무림맹의 존재 역시 용인치 않을 것이오. 녹림신군 종패와 수룡왕 함윤, 오독문주 장효, 맹호 등은 죽일 것이오. 그 일에 보주께서 제안하신 것처럼 협력하신다면 감사하겠소.”
명세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가슴속에서 묘한 흥분과 기대와 화가 동시에 피어났다. 맹호 등을 처치하고자 하는 확실한 상대의 의지를 확인한 흥분과, 그들을 정말로 죽일 수 있다는 기대, 비세에 몰린 처지의 울화다.
그렇다. 당가주 당대천은 보주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전에 누리던 항주무림맹주도 아니고 보주다. 그건 온주 대동보를 뜻한다. 그 변방의 구석으로 한정 지은 것이다. 명세기란 인물을 그렇게만 보겠다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은 명세기는 당대천을 똑바로 응시하고 입을 열었다.
“무릇 거래에는 상호 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의 대면은 당문과 본맹의 상호이익을 위한 자리입니다. 맹호와 종패등의 위험을 인지하신 당가주께서 행차하신 이유가 있듯, 본맹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리를 통해 나올 결과가 무엇인지 확인코자 하는 건 비례가 아니라고 봅니다.”
당대천은 무심한 시선으로 명세기를 응시하다 대답했다.
“소림사는 불태웠소.”
명세기는 흠칫하며 눈썹을 뒤틀었다. 그 반응을 향해 당대천은 거듭 말했다.
“소림의 새 장문인을 포함해 모든 중을 죽였소. 그들의 대웅전과 전각과 불탑과 역사까지 다 불태웠소. 숭산엔 이제 소림사의 재만 남아 있소.”
부르르 눈자위를 경련하는 명세기에게 당대천은 변함없는 얼굴로 말을 이어냈다.
“본가가 약속해 줄 수 있는 건 하나요. 우리에게 협력한 자들을 살려주겠다는 거요. 그 이후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소. 보주가 강호제패에 뜻이 있다면 도모하시오. 보주의 앞을 막을 세력이나 인물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오. 본가가 이후에 어찌할지는 정하지 않았소. 강호를 가지겠다고 정한다면 본가와 부딪치게 될 것이오. 그러나 그건 이후의 일이오.”
등골에 돋는 소름을 가까스로 털어내며 명세기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래, 우선은 너희의 독이빨을 피하고 맹호를 죽이는 것이 우선이지.’
찻잔을 잡으려던 명세기는 손을 거뒀다. 떨림이 진정되지 않아서다. 소림을 불태우고 왔다는 말을 아궁이에 장작 때는 것처럼 말하는 당대천이, 당문의 힘이 무서워서다. 이들은 그냥 독귀신이 아니다. 강호가 모르던 그 이상의 힘이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결과가 있겠는가?
“구체적인 제안을 하겠소.”
당대천이 입을 열차 명세기는 또 한 번 흠칫했지만, 가까스로 내색치 않았다.
“회군하는 자들을 멸살하고자 하오.”
당대천은 맹호와 종패등이 확실히 돌아올 것이라 믿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말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회군이 무당산을 친다는 목적을 완수한 회군인지, 실패한 패주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이 살아 있다면 돌아올 것은 확실한 일이다.
명세기가 입을 벌리려는데 당대천의 방안이 이어져 나왔다. 구체적으로.
“무영사를 그들의 무덤으로 만들 것이오. 본가는 그러한 능력이 있고 수단도 있소. 그러기 위해 우선 진영 내의 동조자들을 제거하고자 하오. 녹림도들과 장강 수적들이 대상이오. 흑호단은 보주께서 통솔하리라 믿소.”
모종의 예감으로 흔들리는 명세기에게 당대천은 핵심을 던졌다.
“음식과 물에 손을 쓸 것이오. 물론 흑호단에겐 해약을 지급하겠소.”
심장이 짜르르하는 느낌 속에서 명세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맹호는 절대 호락호락한 자가 아닙니다. 당문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상대하자면 만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맹호를 곁에서 보고 겪은 자들이라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대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맹호가 어떤 일을 만들어 왔는지 모르지 않소. 그에게 당한 장본인도 이 자리에 있으니 말이오.”
명세기는 미간을 좁히고 당대천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
‘설마?’
시선을 받은 자, 시종 아무 말과 표정없이 당대천의 뒤로 서 있던 자, 방학천이 입을 열었다.
“방학천이라 하오이다.”
명세기는 눈을 부릅떴다.
“혀, 혈천 총사?”
그다, 방학천이란 이름을 가진 다른 자가 없으니 그다.
당문이 잡아갔다 했으니 역시 그다.
왼팔이 없는 자라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었다. 모호한 예감이었던 거다.
저자가 오른손에 잡은 검은 그렇다면 용화검이다.
검은 면포로 감아두었지만 분명 그거다. 이 자는 뭔가 무섭다.
흔들림 속에 수많은 변화를 보이는 명세기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방학천이 말했다.
“다시 맹호와 종패에게 당할 일은 없을 거요.”
방학천을 바라보던 시선을 당대천에게 돌린 명세기는 처음으로 미소를 보았다. 당가주의 미소다. 소림사를 불태우고 온 자의 몸서리쳐지는 미소다.
“혈천총사는 본가의 도움으로 새로 태어났소. 맹호와 종패가 아무리 강하고 끈질기다 해도 이젠 소용없을 것이오. 본가의 진정한 힘을 보게 될 것이오.”
당문의 진정한 힘, 그게 뭔지 모르지만 방학천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명세기는 직감했다. 아무리 전력이 빈 소림사라 하지만 이들에게 불태워진 이유가 있을 것인즉, 그게 당가의 진정한 힘이란 것을 직감했다.
‘나는…… 맹수를 잡으려고 이무기를 불러들인 게 아닌가……?’
심중의 격동을 애써 내리누르며 명세기는 물었다.
“이가주에게선 소식이 있습니까? 무당산의 형세가 어떠한지요? 부끄러운 일이나 본맹에서는 아직 소식을 받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더 불안하고 초조한 상황입니다. 맹호는 당가의 의도를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당대천의 얼굴이 처음으로 경직을 보였다.
“아직…… 연락이 없소.”
그렇다. 사촌아우이자 이가주인 당대문은 일백 독귀자들을 대동하고 무당산으로 갔다. 계획대로 라면 백혈맹과 무림맹을 상잔시키고 그 결과를 통보했어야 한다. 아직 전투가 진행 중이고 그럴 경황이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건 분명히 다른 사달이 생긴 거다.
미간을 찌푸린 채 당대천은 이어 말했다.
“무당산의 일은 실패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소. 정확한 결과는 알 수 없으나, 본가의 애초 계획과 의지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하오. 하지만 맹호와 종패 등이 무사하다고도 예상하지 않소. 백혈맹과 격돌한 전장이오. 그들은 무림맹의 씨를 말리겠다는 작정으로 출병했소. 이만병력 중에 만오천이 무당산으로 갔소. 남은 오천은 숭산에서 죽고 흩어졌지만, 그들의 전력을 상대한 일이오. 무사한 상태가 아닐 것이 분명하오.”
명세기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소림사에 백혈맹의 남은 오천 병력이 있었다는 게 아닌가? 그들을 수백 명 만으로 도륙하고 분쇄했다고? 도대체 뭘로? 당문에 무엇이 있기에?’
명세기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방학천에게로 돌아갔다. 그 이유를 모르면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 눈길을 당대천의 목소리가 다시 돌려 잡았다.
“맹호와 종패와 함윤과 장효, 그들이 어떠한 모습이든 돌아올 것이오. 패했다면 이후를 도모하기 위해서 돌아올 것이고, 이겼다면 역시 다음 행보를 위해서 돌아올 것이오. 그들이 돌아올 때가 죽는 때가 될 것이오.”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문 당대천은 부연했다.
“우리의 숫자를 걱정하지 마시오. 날이 밝기 전에 본가의 정예들이 더 당도할 것이오.”
명세기는 직감했다. 그들이 사천의 본가로부터 오는 자들과, 당문이 천하에 감추고 있던 거점들에서 오는 자들이라는 것을.
‘끝장을 보려는 거로구나. 맹호와 종패만이 아닌, 소림과 무당처럼 구대문파의 모든 곳을 찾아가려는 거야. 하나하나 짓밟고 불사르겠다는 것이야.’
당대천은 마지막 종용을 했다.
“시작합시다.”
* * *
천주봉으로 치솟아 오르던 열기와 연기는 잦아들어갔다. 밤이슬을 말려버리는 화마의 기운은 힘을 잃고 있다. 아래를 보니 새카맣게 탄 산허리가 새벽어둠 속에 잔 불빛을 번들거리고 있다. 불은 거의 죽었다.
‘내려갈 수 있겠군.’
무당산의 앞길을 훑어보던 목계백은 흑호단 특별대를 돌아봤다. 밤새워 운기조식에 몰두한 대원들은 안색이 좋아지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무형지독의 침투를 막느라 사투를 벌인 밤이었다. 만독신공에 몰두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시간, 그 필사의 노력이 마침내 독을 몰아냈다.
목계백은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물었다. 자신 역시도 밤새워 운기하긴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도 독에 많이 노출됐던 게 자신이다. 내력으로 억누르던 그것을 만독신공으로 다스리고 배출하기까지 제법 고생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독신공의 화후가 깊어지고 독에 내성이 생겼다.
흑호단도 마찬가지다. 전투도중 누적되고 산불과 연기를 통해 위로 상승하며 날아온 독에 노출됐었다. 불을 피하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독의 확산과 싸워야 했다. 힘겨웠지만 모두가 그 일을 해냈다. 성한 자들은 부상자들을 도와가면서 맞섰다. 산불이 꺼지듯 독의 불길도 막아낸 결과다.
‘무형지독, 이 정도면 맞설만 하겠어.’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어 뿌리던 목계백은 밝아지는 동녘을 응시하고 흑호단에게 명령했다.
“이제 내려가자.”
불에 그슬리고 피에 물든 흑의를 입은 목계백과 흑호단 특별대를 맞아준 것은 지옥도였다. 강변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시신들이 발길을 막았다. 그 시신 밭을 헤치고 불타 없어진 갈대밭을 지나가자 그들이 맞아줬다.
“고생했다.”
“역시 맹호구나.”
“수고했소.”
종패와 함윤과 장효의 격려와 따듯한 미소를 받은 목계백은 미간을 찌푸렸다.
“죽다 산 모양이다?”
종패를 보고 한 말이지만 함윤은 물론 장효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래, 소림사의 늙은 중은 모가지 힘줄이 아주 길기더라.”
대답한 함윤은 자신의 수룡검을 탁 쳤다. 그것으로 목계백은 대답을 들었다.
“그랬군. 잘했다.”
종패가 묵묵한 시선을 던지다 물었다.
“무경진인은?”
“죽었지.”
바로 장효가 물었다.
“당대문은 어찌됐소?”
“죽었습니다.”
네 사람은 다시 시선을 맞추고 미소를 나눴다.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 미소고 눈길이다. 그러나 그 교류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네가 산에서 밤을 보내는 동안 무한에서 전서가 왔다.”
경직한 얼굴로 입을 연 함윤은 전서를 목계백에게 내밀었다.
보주가 널 죽이려고 한다.
간단하지만 모든 걸 알 수 있는 전서다. 비격과 모금량이 보낸 거다.
“그런가? 이제 때가 된 건가?”
목계백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눈에 그림이 그려진다. 두 사람을 앉혀 놓고 결심을 드러내고 지시하는 명세기의 모습이다. 거두고 길러준 정을 거론하며, 앞날을 이야기하며, 맹호의 위험을 말하며 당위성을 설파했을 터다. 비격과 모금량이 당연히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차가운 미소 끝에 목계백은 중얼거렸다.
“당신을 이제 접어야겠군.”
종패와 함윤과 장효와 시선을 맞춘 목계백은 이후 행보를 말했다.
“회군한다. 돌아가면 우릴 기다릴 것은 또 다른 전투가 될 것이야. 우릴 제거하기 위해서 명세기가 결심하고 움직였다면, 분명 그럴 수 있는 수단을 품었을 거다. 현재 그럴 수 있는 수단이라면 당문 밖에 없다.”
종패가 눈썹을 험악하게 비틀었다.
“명세기가 당문을 끌어들였다는 소리냐? 우리의 표면적인 연수 외에 따로?”
목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주가 움직였을 공산이 크다. 당대문을 우리에게 보내 무당산을 도모하게 한 그가 가만히 앉아 있지만은 않을 거야. 따로 뭔가를 만들고 있었겠지. 원한에 불타는 그가 당가를 강호에 드러내놓은 때부터 시작한 일이야. 명세기와 접촉했다면 차제에 우리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겠지.”
불안한 흔들림과 분노를 품은 종패와 함윤과 장효를 응시하며 목계백은 계속 말했다.
“당대문으로부터 연락이 가지 않는 걸로 미루어 이곳의 상황을 짐작하고 있을 거다. 자신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여기겠지. 하지만 개의치 않을 거야. 저희의 힘을 자신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백혈맹과 충돌한 결과가 있다고 여길 테니까. 만오천 병력을 사천이 상대했다. 이기거나 비기거나 패하는 수, 모든 경우에도 우리는 온전하지 않지.”
목계백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뿌렸다.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우리가 진영으로 돌아가는 안도를 노릴 거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 우리는 다르지. 여태까지도 달랐지만 앞으로도 다를 거다. 우린 만 오천을 맞아 절반의 병력손실을 봤다. 이천이 건재해.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야. 무영사에 남은 병력도 기대할 순 없겠지. 그러나 우리에겐 저들이 모르는 힘이 있다. 무형지독에 대항할 수 있는 만독신공이 있어. 그리고 우리는 저들의 생각을 역이용할 수 있지.”
시리게 차가운 눈동자를 빛내며 목계백은 남은 말을 던졌다.
“백혈맹은 이제 없다. 당은 건 당문이다. 해보자.”
종패와 함윤과 장효의 눈동자에서도 목계백과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