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199
2.
푸릉, 푸힝거리는 흑풍의 반가운 인사를 받아줄 마음의 여가가 없었다. 항주를 떠나있는 동안 홀로 지낸 흑풍은 항상 그랬듯 무탈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시 만나는 일에도 언제나 무덤덤이었다. 목계백의 얼굴을 본체만체하던 놈이다. 그런데 이번엔 주인이 고생한 걸 아는지 유별나게 반가워했다. 그 반가움을 응대해주지 못하고 목계백은 행장을 올렸다.
“이 시간에 꼭 가야만 하는 거냐?”
종패의 찌푸린 얼굴과 딱딱한 음성을 받은 목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하고 단호한 그 고갯짓에 종패는 물론 둘러선 인물들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밤의 흥취가 아직도 남아 있고 술기운이 뱃속에 짜한 가운데 들은 목계백의 소식은 모두의 흥과 잠을 날려버리기 충분했다.
종패는 다시 안타까운 얼굴로 말을 이어냈다.
“네가 무슨 짐작으로 이러는지 모르겠다만, 정강산에 그 사람이 남아 있다는 보장도 없다. 물론 네 결심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심사숙고하길 바란다. 우린 무림맹이다. 이곳은 널 걱정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종패에 이어 함윤이 입을 열었다.
“가야 한다면 같이 가자는 말이다. 너 혼자 이렇게 가야 할 필요가 뭐가 있냐? 너 개인의 사연 때문이라는 걸 안다만, 이제 우리가 그런 걸 구분할 필요는 없지 않냐? 생사를 함께 하고 싸운 동지 아니냐? 싸워야 한다면 같이 하자. 지금이라도 네가 좋다 하면 우리 모두 같이 갈 거다.”
결의에 찬 함윤의 눈동자를 엷은 미소로 직시한 목계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나 혼자 할 일이다.”
한숨을 내쉬는 함윤처럼, 목계백의 의지를 꺾거나 마음을 돌려세울 수 없다는 걸 모두 다시 확인했다. 들은 대로 목계백이 할 일이다. 종패가 말한 매처학자, 용인성이 이야기한 매처학자, 그들이 동일인물인지, 목계백이 찾는 자인지를 확인해야 하는 일이다. 다른 누가 할 일이 아니다.
듣는 이들의 가슴을 흔드는 함윤의 한숨을 시작으로 저마다 깊고 무거운 숨들을 내쉬고 복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배인 눈빛들을 흘려냈다. 그중에서도 오독문주 장효의 눈빛은 유별나게 흔들리며 안타까움을 보였다.
“혹호단장께 오독문은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오.”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선 장효는 목계백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 숙이며 포권했다. 이미 했던 감사의 구구절절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마음을 눈빛으로 전했다. 오독문을 되살려준 은혜다. 더불어 각오를 말했다.
“당화를 놓아 보내 준 흑호단장의 마음, 짐작하고 있소이다.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소이다. 오독문은 당문을 뛰어넘어 우뚝 설 것이오. 무림맹의 일원으로서 강호의 대의에 이바지할 것이오. 어디서든 지켜봐 주시오.”
다들 안다. 장효가 아는 것처럼 모두 짐작하고 있다. 왜 사천에서 당문을 끝까지 추적해 멸문을 감행하지 않았는지, 당대천의 아들 당일로를 모른척하고 당화를 방학천과 떠나게 두었는지 모두 안다. 그것이 미래다.
강호는 비정하다. 패자는 죽고 약자는 먹힌다. 녹림도 장강도 오독문도, 모두가 그 법칙 아래서 숨 쉬고 살았다. 당문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패했으니 죽고 먹혀야 한다. 그러나 그걸 하지 않았다. 그들을 멸절시키지 않고 구명의 길을 터주었다. 그 이유는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의 질서를 구축했던 자들과는 다른 길을 가기로 했다. 그 길이 명확하게 무엇인지 선언하고 명문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를 안다. 부귀권세를 탐하고 안주하며 정의를 외면하는 것, 그걸 경계하고 타파해야 함을 안다. 그러기 위해선 도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도전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무림맹은 그것을 물리치고 이겨내며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고인 물이 되지 않고 힘차게 흘러갈 것이다.
당문은 바로 그러한 도전 중의 하나가 될 터다. 그들은 살아 있는 한 다시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걸 두려워한다면 무림맹은 해체해야 한다.
비정하지만 강호는 살아 있다. 목계백과 이 자리의 모두가 주체가 되어 무림맹을 만들었듯, 아무리 틀어막고 장벽을 만들어도 강호는 살아 있기에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 도전과 응전이 살아있다. 바로 그러한 강호의 맥동 속에서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내는 거다. 정의로운 강호다.
장효의 목소리 뒤로 내려앉은 짧은 침묵을 용인성이 짐짓 깨며 말했다.
“길 떠나는 사람 발길을 너무 무겁게들 하지 맙시다. 다시 못 볼 사람도 아니고 일 마치면 돌아와 술잔을 부딪칠 텐데 말이오. 설마하니 천하의 맹호를 그 누가 어쩌겠소? 자자, 우리는 좋은 술과 안주나 마련합시다.”
그렇게 말하며 용인성은 목계백을 응시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목계백이 떠날 것을 가장 먼저 예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처음 만나던 그 날부터 예감했던 터다.
용인성처럼 짐작하고 같은 마음이지만 모두 웃는 낯으로 인사를 나눴다.
“흑호단장, 아니 맹호……”
목계백을 부르며 눈을 맞춘 은천장주 은발야는 진정을 담아 뒷말을 이어냈다.
“감사드리오. 여기까지 의지를 지탱하고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대의 덕분이오. 내 딸의 원한을 풀고 가족의 안위를 지킬 수 있었던 은혜,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오. 기회가 된다면 은천장에 들러 주시오.”
시선을 맞추고 있던 목계백은 작게 고갯짓하며 물었다.
“돌아가시렵니까?”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주변 사람들을, 무림맹의 전각들을 돌아본 은발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여기서 내 할 일은 이제 끝이 난 듯하오.”
다시 돌아온 은발야의 시선은 미소를 가득 담고 있었다.
“이제 가족들과 남은 생을 지내고자 하오. 내게는 그것만이 가장 값진 것이라오.”
은발야의 미소에 마주 미소를 지으며 목계백은 오세명 호일도와 시선을 맞췄다.
“같이들 돌아가십니까?”
오세명과 호일도는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우리들의 처음 계획이 그러했지.”
“장주님에게 다시 신세를 지게 됐어.”
신세라고 하지만 두 사람은 은발야를 보위하고 은천장을 지키기 위해 동행하는 것이라는 걸 목계백은 안다. 두 사람을 통해 무림맹과의 연결도 계속될 터다. 은발야의 입장에서는 아주 든든하면서도 고마운 일이다.
바로 이것이 강호의 다른 얼굴이다. 피와 목숨을 먹어치우는 야수 같은 얼굴 뒤에 있는 정의의 얼굴이다. 오세명과 호일도와 같은 이들이 이제 무림맹이 흐름을 일으키려는 일의 선두에 있는 것이다. 없던 것이 아니다. 이미 있었다. 하지만 가라앉고 사라지던 것이다. 그걸 시작함이다.
목계백은 엷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마주 선 이들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모두 강녕하시기를.”
포권한 목계백은 흑풍에 올라타고 돌아섰다.
항주를 벗어나는 길을 막아선 이들이 누군지 알아본 목계백은 흑풍을 달랬다.
“저들과도 인사를 나눠야겠다. 조금 더 기다려다오.”
흑풍은 못마땅한 콧숨을 뿜어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목계백을 기다리는 자들 앞에 내려줬다.
“우릴 두고 혼자 가려 했다면 오산이다.”
비격이 단호한 얼굴과 시선으로 한걸음 나섰다. 그 옆으로 모금량과 태웅과 조승과 하대구가 벌려 섰다. 길을 막은 형국이다. 모두 화난 얼굴이다.
“여기까지 우릴 깨우치고 이끌어 준 이가 맹호 너다. 감사하고 있다. 무엇으로도 갚지 못한 큰 은덕을 우린 받았다. 그걸 갚겠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는다. 우리 생각과 결심은 하나다. 맹호가 있는 곳에 우리도 있다는 거다. 맹호가 가는 곳에 같이 간다는 거다. 맹호와 같이 죽겠다는 거다.”
결코 깨뜨리지 못할 결심, 그것을 토로하는 비격과 모금량과 태웅과 조승과 하대구는 죽을 각오를 한 자들 같았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겠다는 얼굴들이다. 그래서 목계백은 가슴이 아팠다. 북천을 떠난 후로 처음이다.
“보이지 않던 이유가 이래서였구나. 내 앞길을 막으려고.”
흐릿한 미소를 지은 채 새벽어둠을 더듬던 목계백은 시선을 비격 등에게 고정했다.
“너희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이제 말해주마.”
굳은 결의가 칼날 같은 기세의 비격과 모금량 등에게 목계백은 말했다.
“나는 북천의 칼잡이다.”
북천, 그 이름이 비격과 모금량과 태웅과 조승과 하대구의 미간을 경직시켰다. 그 표정들을 차분히 응시하면서 목계백은 숨은 이야기를 전했다.
“해남파를 멸문한 북천, 나는 그곳 출신이다. 그곳의 생존자지. 중원강호에 이용당한 북천 형제들의 원한을 갚고자 세상에 나온 거다. 그래, 목응신라라는 배신자가 있어 그런 일이 벌어졌지. 그가 꾸민 모계가 해남파를 멸문케 하고 북천을 파멸시켰다. 그리고…… 오늘을 만들었지.”
충격에 빠진 비격 등을 응시하며 목계백은 계속 말했다.
“나는 너희를 이용했다. 내 복수를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이용했다. 명세기와 대동보를 이용했고 남궁세가와 혁리세가를 이용했으며 녹림과 장강과 오독문을 이용했다. 그게 바로 나다. 나에게 고마워하지 마라.”
흔들림의 강도가 높아지던 눈동자를 멈춘 비격이 뜨거운 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그렇다고 해도, 맹호 네가 우리를 깨어나게 해줬다. 우리를 더 크게 만들어줬다. 그건 네가 준 무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살게 해준 거다. 진정으로 살아 있게 해 준 거다. 그렇기에 우리는 감사하고 있다.”
비격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던 목계백은 모금량과 눈을 맞췄다. 기다린듯 그가 말했다.
“맹호 네가 그 누구이든, 어디 출신이든 우리에겐 다를 것이 없다. 우리에겐 여전히 흑호단장 맹호일뿐이다. 그 외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태웅이 뒤이어 입을 열었다.
“따르겠습니다. 내치지 마십시오.”
흑철대력부의 검은 쇠빛만큼이나 강력한 의지를 보이는 태웅, 그와 조승과 하대구의 시선을 받아내며 목계백은 미소 지었다.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고맙다. 정말로 고맙다.”
다시 새벽어둠을 더듬으며 아련한 눈빛을 보인 목계백은 태웅과 재차 눈을 맞췄다. 그 눈에 더 이상 다른 감정은 들어 있지 않았다. 북천을 떠나던 날의 그 의지만 들었다. 서슬 퍼런 그 마음의 칼을 세우고 말했다.
“이건 내가 할 일, 나에게 마지막 남은 일이다.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 목응신라, 그가 나를 불렀다. 기다리고 있다. 나 혼자 갈 길이다.”
장도의 칼 빛과 같은 목계백의 시선 앞에서 태웅은 힘없이 눈길을 내렸다.
* * *
“그가 왜 우릴 살려줬을까요?”
죽립을 눌러 쓴 당화는 오늘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는,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래서 방학천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해남도를 향해 파도를 헤쳐가는 배 앞만 바라봤다.
“해남도가 멀지 않았소.”
방학천의 음성과 시선을 좇아오듯 당화는 앞쪽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 든 것은 공허함이었다. 이겨낼 수 없는 것에 대한 좌절과 절망이 만들어낸, 포기와 방관으로 넘어가는, 그러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허망함이다.
당화의 눈에 든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방학천은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저것을 어루만져 주거나 치유해 줄 수 없기에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자신은 당문이 독인이라는 방편으로 돌려세웠었지만, 당화에겐 자신에 그렇게 해줄 것이 없다. 그저 스스로 다스리고 치유하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해남도를 향한 이 길의 동행도 그러하다. 당화는 일체의 의문이나 이견 제시 없이 따라왔다. 천강독인의 정화를 보낸 당문의 마지막 적통 당일로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렇게 그냥 따라왔다. 이후의 계획이나 둘의 생각 나눔도 없었다. 그냥 온 길이다.
“해남도는 내가 나고 자란 곳이오.”
옛 기억을 떠올려 머릿속의 상념들을 몰아내며 방학천은 이야기했다.
“나에게 생명을 주고 의지를 준 곳이오. 이곳을 되살리려고 나는 그동안 끊임없이 노력했소. 하지만 실패했소. 이제 이렇게 폐인이 되어 돌아가고 있구려. 하지만 오늘 보니…… 해남도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구려……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을…… 공연히 되돌리려 했던 건지도 모르겠소…… 그런가 보오, 산천은 그대로이나 사람만이 그러하지를 못하는구려.”
푸른 바다 저 앞으로 다가오는 해남도를 바라보며 방학천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해남도의 냄새가 가득 들어왔다. 정말로 변하지 않는 냄새다.
“그가 왜 우릴 살려줬을까요?”
당화는 또 같은 물음을 냈다. 시선은 해남도를 바라보면서다. 그런데 이번의 물음은 이전과 달랐다. 정말로 방학천 자신에게 묻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맹호 그는…… 우리에게 기회를 준 것 같소.”
“기회요?”
“다시 검을 들고 살 것인지 다른 삶을 살 것인지를 선택할 기회요.”
“그가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당화는 말이 없었다.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해남도의 포구만 바라봤다.
“우리는……”
다시 입을 연 당화는 시선을 돌려 방학천을 직시했다. 뒷말을 이어냈다.
“……여기서 살아요.”
허망함이 사라지는 당화의 눈동자를 보며, 그녀가 낸 ‘우리’ ‘여기서 살아요’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하고 가슴에 새기면서 방학천은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방학천의 커져가는 웃음소리를 따라 당화도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해남도의 푸른 바람은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 * *
강서와 호남의 경계에 있는 정강산은 울울창창한 수림으로 산의 위용을 과시했다. 과연 녹림이 본거지로 삼을 만한 산세였다. 만추를 맞은 산은 울긋불긋 만산홍엽의 자태를 드러내는 가운데 잎이 지고 있었다.
“수고했다.”
흑풍의 목을 쓰다듬어 준 목계백은 내려서서 장도만을 들었다. 푸릉 거리는 흑풍의 숨소리를 뒤로 두고 산으로 들어갔다. 녹림의 산채를 방문할 필요는 없었다. 종패가 설명해준 산길을 따라 매화곡으로 나아갔다.
매처학자, 목응신라로 짐작되는 그가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해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한다. 정강산에서 유일하게 매화나무들이 있는 곳이라 했다. 계절이 겨울로 가는 즈음이라 매화를 볼 수야 없겠지만 목적은 그게 아니다. 매화나무를 심고 목계백이 오기를 기다린 자, 그를 봐야 한다.
울울창창한 정강간의 속살을 파고 들어가던 목계백은 목적한 곳에 다다랐다. 매화나무들이 군락을 지은 것처럼 자라고 있는 골짜기, 매화곡이다. 그 중앙에 난 작은 숲길 끝에, 작고 정갈한 모옥이 한 채 보였다.
장도를 움켜쥔 목계백은 모옥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