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Swordsmith RAW novel - Chapter 28
2.
새벽 첫닭이 울며 시작된 남궁세가의 하루는 분주했다. 세가의 하인과 식솔들이 시작하는 청소가 집안 곳곳, 전각 여기저기서 진행됐다. 아마도 매일의 일과인듯,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동은 정확하고 거침이 없었다.
청소가 끝나고 제법 아침 기운이 돌 무렵 연무의 기합소리가 세가를 울렸다. 연무장에서 진동하며 터지는 진각소리와 파공음들을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손님들을 다 깨웠다. 하지만 아무도 연무장으로 가 보진 않았다.
강호에서 남의 연무를 훔쳐보거나 지켜보는 건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더더군다나 남궁세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무내용이 그저 체술에 불과할지라도 그렇다. 그래서 적호단과 은천장 사람들은 귀만 기울였다.
첫닭이 울기 전부터 잠에서 깨어 있던 목계백은 창룡각 밖으로 나갔다.
“기세가 대단하군.”
연무의 기합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린 그 말을 비격이 곁으로 다가와 받았다.
“남궁세가니까.”
당연한 진리를 말한 것처럼 비격의 얼굴엔 외경심이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은 목계백을 바라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밤의 일 때문이다. 자전도객의 첫째제자 진평을 베고, 결국 허관웅까지 베어버린 일.
“어젠 정말로 놀랐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어.”
감탄을 드러나는 비격에게 목계백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운이다. 운이 좋았어.”
“운이라고? 운으로 자전도객 허관웅을 벴다고? 세상의 누가 그 말을 믿겠냐?”
“봤잖아. 이거.”
목계백은 흑의 앞섶을 열고 찰갑을 보였다. 검은 쇠조각들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흉갑을 이룬 갑옷, 그 한가운데에 찍어 가른듯한 형상이 있었다.
“칼자국이 남았구나. 자전도의 일격이 남긴 자국이야.”
눈빛을 더욱 빛내며 다가선 비격은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목계백의 앞섶을 잡고 벌렸다.
“이런, 난 여인네가 아니야.”
“헛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봐. 자세히 좀 보게.”
비격은 찰갑에 남은 칼자국을 손으로 따라가며 훑었다. 찌그러진 쇳조각 비늘들은 겨우 매달려 있는 형국이었다.
다른 충격을 받지 않아도 얼마 안 있으면 떨어질게 분명했다. 그만큼 자전도의 공격이 강했다는 이야기다.
아니, 달리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전도객 허관웅의 공격이 아니었나?
보통 흉갑 같으면 갈라졌을 터다. 그런데 이건 그마나 형상을 유지했다.
보통물건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건 흉갑 뒤의 사람이다.
강타당한 충격은 고스란히 받은 거다. 그런데 멀쩡하다면?
“너, 몸은 괜찮은 거냐?”
미간을 모은 비격의 물음에 목계백은 씩 미소를 지었다.
“보다시피.”
“가슴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뼈가 상하거나, 아니 하다못해 멍이라도……”
“멍은 들었어. 하지만 괜찮다. 상처는 어젯밤에 다 치료했다.”
그랬다. 남궁세가주는 자신 집안의 의원들에게 목계백을 치료토록 했다. 허관웅과 겨루며 그 칼에 다쳤던 상처들은 다 치료받고 감쌌다. 팔과 목 등에 그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제법 황당한 일이다.
“정말로 괜찮은 거냐? 그런 부상은 두고두고 속병이 될 수도 있다?”
“말했잖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비격은 어이가 없었다.
“하 참 나, 아무리 강골 강근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정도면 금강불괴라고 해도 되겠다.”
“금강불괴는 무슨, 준비하고 산 덕분이지.”
“그러게, 그 준비란 게 정말로 효과를 본 밤이었지. 몸에는 갑옷을 걸쳤고 팔에는 쇠로 만든 비구를 찼으니 말야. 비구는 알았지만 흉갑은 몰랐다.”
진평과 천하루란 반점에서 격돌할 때 팔로 칼을 막아냈다.
그걸 본 이들은 다들 목계백의 팔에 칼날을 막을 만한 강철비구 같은 게 있다는 걸 짐작했다.
하지만 어제는 그걸 넘어 흉갑으로 자전도를 받아냈다.
“흉갑은 고쳐야겠는 걸?”
“돌아가면 고쳐야지.”
“그렇군, 너에겐 그걸 고쳐줄 어른이 계시지. 이젠 연강막주가 되신.”
“그래, 잘해주실 거다.”
목계백의 미소를 보며 마주 미소 짓던 비격은 문득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넌 정말로 무얼 하려는 거냐?”
목계백도 미소를 지우고 비격의 눈을 응시했다.
“내가 두려운가?”
비격은 목계백의 물음에 반발이 드는 걸 느꼈다.
상대는 기껏해야 이제 스물둘 먹은 애송이다.
물론 그 애송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는 자이지만 세상의 객관적이고 공통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렇다.
서른을 넘긴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동년배처럼 구는 것도 어이없는 일이다.
하지만 두렵다. 눈앞의 이자 목계백이 두렵다. 자전도객을 베어버린 이자가.
어렴풋이 드는 생각은, 옅게 입은 이 부상들도 진실은 아닐 수 있다는 거다.
“난 이제 알 것 같다. 넌 우리 대동보를 택해 들어온 거야. 네 계획이었던 거지. 뭔지 알 수 없는 너의 필요에 의해서 대동보를 선택한 거다.”
말없이 비격의 눈을 직시하던 목계백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맞아.”
예상하던 대답을 들은 비격은 눈동자에 힘을 주며 물었다.
“뭐지? 네가 원하는 것이?”
날카롭게 곤두선 비격의 눈동자, 그 시선을 받아내며 목계백은 한마디를 했다.
“대동보가 원하는 거.”
비격은 미간을 확 좁혔다.
“뭐?”
목계백은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보주님이 원하는 거. 네가 원하는 거. 대동보란 이름으로 원하는 거.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다. 즉, 목적과 추구하는 방향이 같다는 거지.”
“그럼 네 말은……”
“난 대동보라는 배를 찾아 확인하고 올라탄 것뿐이다. 왜냐고 묻는 것 바보짓이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거야. 남은 건 서로 간의 공조다.”
“공조?”
“믿고 협력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지.”
“너의 그런 마음을 보주님이……”
“알고 계시다.”
그렇다, 그랬던 거다. 그래서 보주가 목계백을 따로 보는 것이다.
“그런 거구나…… 하지만,”
내려가던 시선을 다시 올린 비격은 명세기가 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을 했다.
“왜 대동보였지?”
“나한테 맞으니까.”
“너에게 맞다?”
“그래, 나한테 맞는 그릇이 대동보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고 꿈꿀 수 있는 그릇이지.”
“만만하다는 말이냐?”
“정확한 표현이다. 그게 자존심 상할지는 모르지만 현실이다. 봐서 알겠지만 남궁세가가 어떤 곳인가? 내가 자전도객 허관웅을 베어 넘긴 것은 대동보사람들과 은천장 사람들을 놀래켰다. 물론 남궁세가 사람들도 놀랐지. 하지만 강도가 달라. 그들은 그냥 놀라고 만 것뿐이야. 왤까?”
“당연히…… 남궁세가 정도라면……”
“그래, 남궁세가이니까 그런 거다. 이 가문엔 나정도 되는 자가 발에 채일 거다. 이런 곳에선 두드러질 수도 없고 뭔가를 해볼 기회도 없어.”
“그래서 대동보를 선택했다는 거냐?”
“발길이 그리로 향했기도 했고, 비금도를 치려는 대동보의 계획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맞아 떨어진 거지. 필연에 우연이 겹쳤다고 해야겠군.”
“필연에 우연……”
중얼거리는 비격에게 목계백은 대수롭잖게 말했다.
“일은 시작됐다. 남은 건 열심히 움직여 결과를 만들고 수확하는 거야. 더 이상 나한테 신경 쓰는 건 시간낭비다. 보주도 그렇게 결정했을 거다.”
“보주님도?”
“당연하지. 지금 우린 남궁세가에 와 있다. 이제 잠시 후면 진정한 시작이 될 거다.”
비격이 목계백을 무겁게 응시하는 동안 아침식사를 하란 전갈이 왔다.
“이제부턴 행동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목계백과 비격에게 당부한 명세기는 바로 돌아섰다.
잠시 기다리던 은천장주 은발야와 춘추검 오세명, 파랑검 호일도가 명세기와 목례하며 역시 돌아섰다.
짧은 순간 눈빛을 섞은 그들의 뒤를 목계백은 따라갔다.
말없고 엄숙한 분위기 속의 행보는 남궁세가 무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어졌다.
내원을 돌아 후원을 지나고 별채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동안 긴장은 고조됐다.
걸음을 옮겨 갈수록 주변 기세가 점점 강해졌기 때문이다.
칼날 같은 기세가 장벽처럼 퍼져 있는 이유를 곧 알게 됐다.
별원을 지난 곳에 있는 인공가산의 암벽에 철문으로 이뤄진 출입구가 있었다.
그 앞에 남궁세가의 셋째 남궁삼룡 남궁여립이 서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들 오십시오.”
공손하고 정중하게 맞이하는 남궁여립의 눈빛은 한순간 명세기와 섞였다. 둘만이 있던 자리에선 위세하던 남궁여립도, 상전을 대하듯 하던 명세기도 서로 모른 척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 교환을 목계백은 봤다.
‘여기가 생존자 여인을 보호한다는 곳이로군.’
짐작을 씹으며 명세기의 뒤를 따르던 목계백은 남궁여립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모른 척 했다. 지금 저자와 사소한 것이라도 엮임이 생겨선 곤란하기에 그렇다. 그래선지 남궁여립도 이내 시선을 거뒀다.
인공 가산의 안에 만들어진 비밀장소는 형옥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안전장소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석재를 다듬어 벽돌처럼 축조한 내부는 정갈하고 반듯했다.
통로 이곳저곳에 방처럼 꾸며놓은 공간이 있고 안쪽에는 정방형의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 남궁륜 등이 있었다.
“이제들 왔군.”
명세기가 얼른 고개 숙이며 예를 취했다.
“기다리시게 하여 송구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짓는 남궁륜의 옆으로 남악권사 무천룡이 담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무천룡의 시선은 목계백을 향해 뻗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으론 무당도사 태현자가 있었다. 두 제자를 대동한 모습은 잔잔하게 가라앉은 호수 같았다.
“갈홍은 아직인가?”
남궁륜이 묻는 그 순간에 입구로부터 기척이 들려왔다.
“송구합니다. 늦었습니다.”
늦은 인사를 하며 나타난 자, 황산대협 갈홍은 지난밤 보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역시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인 남궁륜은 모두에게 알렸다.
“이제 우리가 직시하고 있는 문제의 당사자, 살인음적의 손아귀로부터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생존자를 만나게 될 것이야. 각자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대로 알리고 돌아선 남궁륜은 무당태현자에겐 공손한 어투로 따로 말했다.
“태현도장과 무당의 후의에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태현자는 역시 공손히 받았다.
“당연한 일을 치사하시니 오히려 송구합니다. 흉사와 흑막이 있는 일을 밝힘에 무당이 한 손을 거들 수 있다면 어딘들 가지 못할 것이고 무슨 일이든 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물며 이번 일은 남궁세가에서 준비하시고 밝히시는 일, 무당은 그저 참관인에 불과하지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말끝에 도호를 읊는 태현자의 태도는 정중하고 기품이 있었다.
동시에 무당의 입장을 명확히 밝힌 것이었다.
남궁세가의 청을 받아 왔지만 아직 분명한 것은 없다. 우리는 지켜보는 입장이고 너희가 주도하는 일이라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남궁륜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재차 치사했다.
“허허허. 강호에 대 무당이 있다는 것 자체가 홍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불의하고 부당한 일에 이리 나서 올바름을 밝히고자 하시는 무당의 뜻과 기상, 이야말로 사마외도를 물리치는 정의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삿된 무리들은 무당이 두려워 떨고 있을 겝니다. 허허허허.”
태현자가 다시 도호를 외며 읍하자 남궁륜은 본론으로 돌아갔다.
“자, 이제 당사자를 보도록 하십시다.”
남궁륜의 말이 떨어지자 남굼삼룡 남궁여립이 안쪽의 문을 열었다.
벽처럼 되어 있는 문의 안쪽에 그들이 있었다.
세 사람이다. 그들에게로 모두가 다가갔다.
한사람은 침상에 누워있다. 말려버린 시신처럼 피골이 상접했다.
피부는 검게 죽었고 쭈글쭈글했으며 숨소리는 가늘었다.
머리가 긴 것으로 여자임을 판별할 수 있었다.
그 밖의 모습은 여자라고 볼 수 없었다. 그냥 살아있는 시체였다.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은 오른쪽 팔과 왼쪽다리가 절단되어 없다는 것이고, 가슴도 바위에 깔린 것처럼 주저앉아 있었다.
침상의 곁에는 늙은 남녀가 있었다.
시체 같은 여자의 부모라 짐작되는 그들은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남궁륜 등을 향해 제발 구원해 줄 것을 바라는 시선을 던졌고, 고개 숙이고 내쉬는 숨소리엔 원한의 이갈림이 배어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 절절하고 원통스러워 보였다.
“자, 이제 당사자에게 묻도록 하지.”
남궁륜이 지시하자 남궁여립은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가 여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힘들겠지만 대답해 주시오. 그래야만 당신의 원한을 풀 수가 있소.”
겨우 숨만 내쉬던 여인이 바들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러는 것처럼 보였다.
남궁여립은 부친 남궁륜과 모여서 인물들을 한번 돌아 본 후 물었다.
“당신을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구요?”
여인은 바들바들 떠는 전신의 힘을 모아, 힘겨운 숨소리로 입술을 벌려, 아주 작은 한마디를 뱉어냈다.
“혁……리……검천……”
귀를 가진 자들 모두, 침상 앞에 선 모두가 눈을 이를 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