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00
399화. 오늘은 아닐세
“백선생 말인가?”
노군상은 그 질문에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되물었다. 시선은 계속 학관 곳곳을 훑고 있었다.
곽두용도 함께 주위를 경계하며 대답했다.
“예. 학관이 이 난리가 났는데 백수룡이 안 보이는 게 이상해서요.”
자연스러운 의문이었기 때문일까, 노군상은 별달리 의심하는 기색 없이 대답해 주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네. 아마 어딘가에서 천살을 찾고 있겠지.”
“천살이라면……?”
“살막 최고의 살수. 그자의 손에 절세고수들도 여럿 명을 달리했지. 살수들의 세계에선 그야말로 전설처럼 전해지는 별호일세.”
절세고수마저 죽일 수 있는 살수라는 말에, 곽두용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그 모습을 힐긋 본 노군상이 흐리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나. 천살이 우리를 직접 노릴 일은 없을 게야.”
“어,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야……. 등잔 좀 이리 줘 보겠나?”
노군상은 곽두용에게 등잔을 받아 화섭자로 불을 붙였다.
화륵!
등잔에 불이 붙으며, 건물 안이 희미하게 밝혀졌다.
두 사람은 동아리 건물들을 수색하는 중이었다.
혹시 숨어 있을지 모를 살수들을 색출하고, 아직 대피하지 않은 학생들이 남아 있다면 찾아서 보호할 계획이었다.
“조심하게. 어디서 살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말이야.”
“예에…….”
곽두용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나마 외부에는 횃불이 곳곳에 켜져 있었지만, 건물 내부는 칠흑처럼 어두운 데다 공간도 좁아 기습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진 말게.”
“기, 긴장 안 했습니다.”
곽두용의 긴장도 풀어 줄 겸, 노군상은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했다.
“천살은 자부심이 대단한 자라네.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미치광이이기도 하지. 그래서 흥미가 없는 일에는 아예 나서지 않아.”
“그 말씀은…….”
“맞네. 천살에게 우린 죽일 만한 가치도 없는 셈이야.”
“그래 봤자 살수 주제에…….”
곽두용이 불쾌한 듯 중얼거렸지만, 표정은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노군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껄껄 웃었다.
“놈이 오만한 것이 우리에겐 오히려 다행 아니겠나. 지금쯤 백수룡 선생을 노리고 있겠지, 우리한테는 관심도 없을 게야. 우린 그사이에 다른 살수들을 색출해서 제거하면 되는 것이고.”
찰나의 순간, 곽두용의 표정에 묘한 기색이 스쳐 갔으나, 한 걸음 앞에서 걸어가는 노군상은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관주님은 천살에 대해서 무척 잘 아시네요?”
“허허. 늙으면 이런저런 풍문을 주워듣기 마련이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닐세.”
곽두용은 그 말이 지나친 겸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배로만 따지면, 무림에 노군상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은 정말 극소수였다.
천수관음(千手觀音) 노군상.
소림의 속가제자 출신으로, 오십여 년 전 혈교와의 전쟁에 참여해 혁혁한 공을 세우고 생환한 영웅 중 한 명.
비록 그 전쟁에서 입은 부상 탓에 강호에서 은퇴하다시피 하였고, 말년에 청룡학관의 관주 자리에 앉고도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하였으나……. 노군상은 여전히 무림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었으며, 그의 연륜과 통찰력, 인맥은 결코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벌써 십오 년쯤 되었군.”
등잔을 들고 앞서 걸어가던 노군상이 문득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살에게 옛 친우가 죽임을 당한 적이 있네. 그래서 한때 놈을 찾겠다고, 나름대로 조사하고 다닌 적이 있지.”
“죄송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허허. 자네가 죄송할 것은 없지.”
무림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사.
보통 사람이라면 이 분위기에 아무리 궁금해도 침묵했겠지만, 곽두용은 눈치가 없고 소문을 좋아했다.
즉, 이런 말을 듣고 절대로 그냥 넘어갈 성격이 아니었다.
“혹시 그, 돌아가신 친구분이 누군지 여쭤봐도 됩니까?”
노군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네. 나뿐만 아니라 친우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
“죄, 죄송합니다…….”
“아닐세. 옛 생각이 나서 먼저 떠든 사람은 나였으니. 지금 들은 이야기는 그냥 한 귀로 듣고 잊어주게나.”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곽두용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그 이후로 계속 천살을 찾으신 겁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
노군상의 눈에 회한이 어렸다.
“당시 어렵게 살막에 의뢰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까지는 성공했네. 그리고 직접 내 이름을 의뢰했지. 천수관음 노군상. 그 당시만 해도 이름값이 제법 나가던 시기였으니.”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상상도 못 한 방법이라는 듯, 곽두용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허탈한 결말이었다.
“천살은 반응조차 하지 않았네. 의뢰는 거절당했지. 내가 한 의뢰임을 눈치챘거나…….”
노군상은 등불을 들어 복도를 비춰보았다.
그 순간, 저 멀리 흐릿한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목을 걸어도 흥미를 끌어내지 못할 만큼, 내가 보잘것없는 늙은이가 된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포기했다네.”
“전혀 아닙니다! 관주님은 여전히 대단한 고수이시고 또……!”
“목소리를 낮추게.”
노군상은 펄쩍 뛰려는 곽두용을 진정시켰다.
“말하지 않았나. 십오 년도 더 된 이야기라고. 이제 와 위로할 것 없네.”
“하지만…….”
등잔의 불빛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두 사람은 수색을 이어 갔다.
“그나저나, 운명이란 것이 참으로 얄궂지 않나?”
“예?”
오늘따라 노군상은 말이 많았다. 어두운 복도를 타고, 잔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친우의 복수를 포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룡학관 관주 자리를 제안받았거든. 고민 끝에 승낙했지. 말년을 보내기엔 썩 나쁘지 않은 자리였으니. 헌데 세월이 지나 다시 천살과 엮이게 되었으니…….”
“예. 정말 얄궂은 것 같습니다.”
곽두용도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돌려 노군상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관주님. 하나만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쉿.”
기척이 느껴졌다.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기척이었다. 두 사람은 눈짓을 주고받은 후 빠르게 움직였다.
얼마 가지 않아, 막다른 벽에 몰린 도망자들이 낭패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살수가 아니었다.
“너희들! 여기서 뭐하고 있어!”
동아리방에 숨어 있던 학생들로, 총 세 명이었다.
곽두용이 성큼성큼 학생들에게 다가가며 언성을 높였다.
“기숙사로 돌아가라는 안내 못 들었어? 밖에서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녔는데!”
“죄송해요…….”
“그, 그게…….”
학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술 냄새가 훅 풍겼다.
왜 숨어 있었는지 알 만했다.
몰래 음주한 사실을 들켜 징계를 받을까 두려워 동아리 방에 숨어 있다가, 선생님들이 나타나자 도망쳤던 것이다.
사정을 알게 된 노군상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혼은 나중에 낼 테니, 일단 따라오너라. 여기서 나가자꾸나.”
“네, 네!”
“죄송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노군상이 돌아섰을 때였다.
휘익!
세 학생이 동시에 노군상을 덮쳤다.
술에 취해 있던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 보고 있던 곽두용도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관주님!”
촤아악! 촤아아악!
살점이 찢어지고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살수들의 육신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과, 관주님……?”
곽두용은 두려운 표정으로 노군상을 바라봤다.
천수관음(千手觀音).
관세음보살이 천 개의 팔과 눈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대자대비의 상징이지만, 노군상에게 그 별호가 붙은 이유는 달랐다.
천 개의 팔로 마두들의 몸을 찢어 죽이고, 천 개의 눈으로 숨은 곳을 찾아내니, 과거 사파에서 마귀라고까지 불렸던 초절정의 고수.
방금 전의 그 형상이 천 개는 되지 못해도, 능히 수십 개는 되었다.
손에 젖은 피를 바닥에 툭툭 털어낸 노군상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돌아가세나. 살수들은 이들이 마지막인 것 같으니.”
“마지막이라고요……?”
“계속 떠들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우리를 죽일 작정이었다면, 주변에 있는 살수들이 전부 듣고 몰려왔을 게야. 그리고 한 번에 덮쳤겠지.”
“아……!”
노군상이 괜히 옛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었다.
그것 자체가 살수들을 끌어들이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전 그것도 모르고…….”
“허허. 그게 자네다운 모습이지.”
건물 밖으로 나오자, 주변이 훨씬 밝아졌다. 청룡학관 곳곳에 횃불이 켜진 덕분이었다.
두 사람은 다음 장소를 향해 움직였다.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하면 유대감이 형성되기 마련이었다.
노군상이 부드럽게 웃으며 곽두용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나만 너무 떠들었군. 자네 이야기도 좀 해 보겠나?”
“제 이야기요?”
“천주봉 혈사에 대해서 물어봐도 되겠나? 몇 안 되는 생존자라고 들었네.”
“그건…….”
천주봉 혈사.
이십여 년 전, 오대학관의 합동 수련을 위해 모인 천주봉에서, 정체 모를 자들의 습격으로 강사들과 학생들 수십 명이 죽은 끔찍한 사건.
그 흉수는 아직까지도 밝혀내지 못했다.
혈교의 잔당이거나, 마공을 익힌 사파의 고수들로 짐작될 뿐이었다.
당시의 생존자가 적은 탓에 진상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곽두용은 그중 한 명이었다.
“음. 당시에 저는…….”
잠시 머뭇거리던 곽두용은 순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군상에게 과거 살막과 얽힌 이야기를 들은 마당에, 자신의 이야기만 안 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곽두용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자네도 우여곡절이 많았군…….”
“예.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악몽을 꿉니다…….”
대화의 흐름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곽두용은 생존자들 외에는 극히 아는 이가 적은 천주봉 혈사에 대해서 생생히 증언했고, 노군상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역시 자네가 천살이로군.”
제자리에 멈춰선 곽두용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노군상을 바라봤다. 어느새 노군상은 그와 거리를 벌리고 서 있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한 적은 없었는데요.”
분명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는데.
누가 들어도 곽두용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만큼.
“이런 말 하기엔 죄송하지만, 관주님 실력으로는 제 변장을 알아볼 수 없을 텐데요.”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이야기였지만, 노군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으로는 알아보지 못했지. 백 선생이 준 청룡패도 반응하지 않았고……. 그저 심증만 있었을 뿐.”
“심증?”
“오래 살면 생기는 그런 감이 있네. 설명하기 어렵군. 비가 오는 날에 관절이 쑤시는 것과 비슷한 거라.”
“…….”
“하지만 확신하게 된 것은, 자네가 천주봉 혈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였네.”
“뭐가 문제였습니까? 내용은 완벽했을 텐데요.”
곽두용으로 변장하기 전, 천살은 그에 대해서 사전에 완벽하게 조사했다.
천주봉 혈사?
무림에서 쉬쉬하는 내용이더라도, 살막에서 못 알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너무 완벽해서 문제였지.”
“…….”
“곽두용 선생이라면 그 대화 자체를 피했을 것이네. 아무리 내가 빚을 지우듯 옛이야기를 먼저 해 주었다고 해도 말이야.”
“…….”
“헌데 자네는 쉽게 이야기하더군. 보통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쉽게 이야기하지 않아.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거든.”
“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하나 있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미치광이. 오래 살다 보면 종종 보게 되지.”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 천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감탄한 표정으로 노군상을 바라봤다.
“그런 것까진 미처 몰랐군요. 이번에 한 수 배웠습니다.”
청룡학관주 노군상.
무공은 별 볼 일 없는 늙은이지만, 그 연륜과 통찰은 과연 날카로웠다.
지금까지 아무런 관심이 없었는데, 지금은 죽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릴 정도로 말이다.
지이이익-
곽두용의 목 아래로 좌우가 쭉 찢어지듯 갈라지더니, 피부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불필요한 덩어리를 벗어 던지고, 그 안에서 호리호리한 체형의 곽두용이 걸어 나왔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래서, 관주님은 청룡학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실 생각입니까?”
두 사람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막연한 어둠과 등불에 일렁이는 두 개의 그림자뿐.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살수가 바로 앞에 있음에도, 노군상의 표정에는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청룡학관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 목숨도 걸 생각이 있네.”
노군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결사의 각오를 다진 눈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지만 오늘은 아닐세.”
“음?”
노군상의 눈은 웃고 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노고수의 연기는, 천하제일의 살수조차 속여넘길 정도였다.
“자네를 꼭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거든.”
“대체 언제…….”
천살의 표정이 살짝 굳는 순간.
휘리릭!
천살의 뒤편에서 내려선 기척 하나가,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안 어울리는 얼굴부터 벗지? 강제로 뜯어내기 전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청의무복이 세차게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