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62
462화. 철벅
“왜 자꾸 따라다니는 거요?”
백수룡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뒤에서 따라 오는 흑사련주를 바라봤다.
회합장으로 돌아갈 줄 알았건만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더니, 슬렁슬렁 게으른 호랑이처럼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회의가 좀처럼 안 끝나서 말이지.”
흑사련주는 축융봉 중앙에 있는 회합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간단한 천막이 처져 있었는데, 천막 안에서 사나운 기파와 고성이 한 번씩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천막이 강풍이라도 맞은 듯 흔들렸다.
“……귀찮은 협상은 질색이라. 돌아가 봤자 궁귀의 짜증이나 감당해야 할 테지.”
미간을 찌푸린 흑사련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아예 백수룡의 옆에 따라붙으며 말했다.
“무료하니 논도(論刀)비무라도 하지 않겠나?”
“……논도가 뭐요? 보통은 논검이라고 부르지 않나.”
논검(論劒)비무는 직접 싸우는 대신 말로 무공을 겨루는 것인데, 실전뿐만 아니라 이론에도 정통한 백수룡은 논검비무에서 거의 져 본 적이 없었다.
‘뇌옥에서 사부들한테 진 이후로는 한 번도 진 적이 없었지. 딱히 자주하지도 않았지만.’
달리 말하면 백수룡은 논검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상대가 천하제일도라 불리는 흑사련주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검을 찬 자들이나 논검이라 부르지. 우리와 같은 도객들은 논도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진중한 사내의 표정에, 백수룡은 썩 어울려 주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딱히 도객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소.”
“그런…….”
흑사련주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곧 그의 눈빛에서 비장함이 감돌았다.
“안 되겠군. 오늘 너를 도객의 세계로 이끌어야겠다.”
“그냥 혼자 있게 내버려 두면 안 되겠소? 내가 지금 좀 생각이 많아서.”
“번뇌를 잊으려면, 다른 일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지.”
이래서 무공에 미친 놈들하고는 상종하는 것이 아닌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수룡이 결국 흑사련주의 제안을 승낙했다.
“알겠소. 대신 논검에서 지면 다시는 귀찮게 하지 마시오.”
“저 바위가 좋겠군.”
두 사람은 널찍한 바위에 마주 앉았다.
천하를 오시하는 절세고수들의 논검비무.
소문이라도 난다면 한 구절이라도 얻어듣기 위해 구름처럼 인파가 몰려올 사건이지만, 정작 두 사람의 표정은 평온했다.
“나는 천하의 수많은 도객들과 칼을 논하였다. 이십여 년 전부터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으니, 내게 패한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천하제일도의 배려인지 도발인지 모를 말에, 백수룡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피식 웃었다.
“알겠으니 눈에 힘 좀 빼시오. 그렇게 노려보면서 설전을 벌이니 다들 겁먹어서 항복했겠지.”
“……선수를 양보하지.”
“사양하지 않겠소. 좌로 보법을 밟으면서 횡소천군으로 기문혈을 노리겠소.”
“첫수부터 거침이 없구나. 태산압정으로 찍어누르며 일보 전진. 비틀어 흘리고 곧장 신정혈을 취하겠다.”
두 사람의 입에서 초식의 상세한 움직임이 구술되었다. 동시에 그들의 머릿속에서 칼을 휘두르는 서로의 심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한 움직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절세고수들의 눈에서 광채가 흐르고, 흥이 난 것처럼 어깨와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좌 삼보. 곡지혈. 한 치 아래.”
“일보 물러나며 철판교. 차올리며 거궐을 노린다.”
“허! 허릿심이 대단하군.”
“련주의 집중력도 대단하오. 좀처럼 틈이 없어.”
점점 서로의 심상이 정교하게 맞아들어 갔기에, 나중에는 말을 많이 나눌 필요도 없었다. 비슷한 격의 고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흑사련주는 백수룡의 무공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응용력에 감탄했고, 백수룡은 흑사련주의 집요함과 견고함에 놀랐다.
직접 칼을 부딪치지 않고 말로 겨룰 뿐이지만, 그들의 경지가 워낙에 높기에 서로 깨닫는 바가 적지 않았다.
가볍게 시작된 논검비무는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었으나 두 사내는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쉼 없이 입을 움직였다.
몰입을 먼저 깬 쪽은 흑사련주였다.
“련주!”
자신을 찾는 추혼궁귀의 목소리에 흑사련주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아쉬운 얼굴로 백수룡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그럽시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사파의 종주들이 천막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제대로 결론이 난 분위기는 아니로군.”
“난상토론이 될 거라고 예상은 했으니……. 오늘 안에 끝나면 다행일 거요.”
저들 모두가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는 사파의 종주들이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기도 하고, 타협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서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 양보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는 정파와는 달랐다. 사파는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한 자들이며, 그만큼 타협이 쉽지 않았다.
큰 틀에서야 이미 합의가 끝났지만, 세부적인 것들은 백수룡도 끼어들기 조심스러운 부분이었다.
“승부는 다음에 꼭 내도록 하지.”
미련을 덕지덕지 남긴 흑사련주는 느릿하게 추혼궁귀에게 걸어갔다.
“궁귀. 이야기는 잘 됐나?”
“전부 주둥이를 화살로 꿰어 버릴까 하다가 참았어. 당신은?”
“맹룡휘와 논도비무를 했다. 아쉽더군. 칼이라도 하나 여분이 있다면 직접 부딪쳐 볼 텐데…….”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칼바보의 이야기에, 추혼궁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 놀러온 줄 알아? 누군 사파의 망종들이랑 협상하느라 골 아파 죽겠는데, 련주란 인간은 유유자적하게 놀고 있어?”
“궁귀. 분명 나가도 된다고 한 건 자네였…….”
“일각만 쉬었다가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으니까, 내 옆에 앉아서 인상이라도 쓰고 있어.”
“……그리하지.”
흑사련주로서의 권위만은 끝까지 지키겠다는 듯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들의 대화를 전부 엿들은 백수룡은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잡혀 사는군.’
흑사련주.
처음 보고 판단했던 인상과는 다른 면모가 많은 인물이었다. 삼흉이자 천하제일도라는 명성은 저 사내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백수룡은 녹의수사에게 다가갔다. 흑사련주와는 달리 그는 주변에 기막부터 펼치고 물었다.
“협상에 진척은 좀 있었어?”
“쉽지 않을 듯합니다.”
녹의수사는 조금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파 연맹이 결성되리란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혈교는 그들의 이익을 위협하는 공공의 적이자 초유의 사태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부적인 사항을 조율하는 것에 애를 먹고 있었다.
[전부 고집이 세. 누구도 양보하려고 하질 않고 기싸움만 벌이다가 끝났다.]벽안귀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잠시 전음으로 대화를 나눈 백수룡은 다시 녹의수사에게 말했다.
“나도 다시 회의에 들어갈게.”
백수룡은 직접 나서서 협상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볼 생각이었다. 녹림과 악인곡은 그의 동맹이니 어렵지 않을 것이고, 귀령왕에게는 적당한 보상을, 가장 만만치 않아 보이는 추혼궁귀와도 조건을 맞춰 볼 셈이었다.
“……사형께선 좀 괜찮으십니까?”
녹의수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침부터 백수룡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괜찮아.”
백수룡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옛 제자들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론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혈교를 완벽하게 고립시킨다.’
사파 연맹이 결성되면, 그다음에는 무림맹과 정파무림을 설득할 계획이었다.
전례가 없었던 정파와 사파의 동맹. 그래야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혈교가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 단일 세력이었다. 정파무림과 사파무림이 힘을 합친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단순히 이기는 것을 넘어 압도해야 한다.’
혈교를 구석에 몰아넣고, 이쪽에서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최대한 전쟁을 빨리 끝낼 계획이었다.
그래야만…….
‘너희가 더 많은 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 테니.’
백수룡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위선이라고 해도 좋았다. 언젠가 마주하게 될 옛 제자들. 그 녀석들의 손에 더 이상의 피가 묻지 않았으면 싶었다. 혈교와의 전쟁을 압도적으로 빠르게 끝내고 싶은 이유였다.
하지만 신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는 없었다. 누구도 예기지 못한 변수는 급작스럽게 들이닥쳤다.
휘익!
백수룡과 흑사련주가 동시에 무기를 뽑으며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창룡신검과 적월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였다.
“무슨 짓이오!”
“갑자기 무슨!”
사파의 종주들, 그리고 그들의 호위들이 놀라서 일제히 물러나거나 무기를 뽑았다. 그들은 아직 느끼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침묵이 찾아오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추혼궁귀를 시작으로, 사파 종주들의 표정이 하나둘 굳기 시작했다.
“온다.”
흑사련주의 작은 중얼거림과 동시에.
불현듯 모든 소리가 멎었다.
축융봉을 노니는 산새들의 지저귐, 바람에 풀들이 나부끼는 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마저 사라졌다.
시간이 갑자기 멈춘 듯했다. 축융봉 아래에서, 몹시 이질적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철벅. 철벅.
분명 사람의 형상인데 도무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쪽으로 늘어뜨린 칼이 유독 크게 보였다.
저것은 칼에 들러붙은 망령이라고 해야 할까. 설명하기 힘든 비현실적인 현상이 걸어오고 있었다. 본래 검은색이었을 검붉은 장포를 걸친 채, 등 뒤로 이어지는 발자국마다 선명한 핏자국을 남기면서.
흡사 목각 인형 같은 표정으로.
“……!”
“……!”
사파의 종주들이 동시에 숨을 멈췄다. 본능적으로 전신을 긴장시켰다. 살을 저밀 듯 농밀하고 은은한 살기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오히려 일정한 수준 이하의 무인들은 그 존재감을 미약하다고 느꼈다.
“웬 놈이냐!”
벽안귀의 수하 중 하나가 일갈하며 앞으로 나섰다.
악인곡에서 차출되어 따라온 절정의 고수로, 사파의 종주들 앞에서 자신의 무공을 뽐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앞으로 나선 그는 불청객에게 성큼 다가가며 창으로 위협했다. 창두에 맺힌 기운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쳤다.
“분명 전부 내려가 있으라고 말했는데. 어디서 온 놈이냐? 썩 꺼지지 않으면…….”
“……멈춰!”
벽안귀가 엉덩이가 가벼운 수하에게 서둘러 외쳤을 땐, 이미 상대의 도가 휘둘러진 후였다.
푸화아아악!
앞으로 나섰던 사내는 자신의 무기와 함께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무너졌다. 지독한 혈향이 바람을 타고 번졌다.
철벅.
자신이 만든 피 웅덩이를 밟고 선 채, 사도가 입을 열었다.
“……흑사련주.”
모두가 돌처럼 굳어 버린 가운데, 흑사련주만이 입꼬리를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사도.”
그 순간, 흑사련주의 몸에서 풀려나온 어둠이 하늘을 물들였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