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63
463화. 무슨 속셈이지?
그날 밤은 휘영청 달이 밝았다.
“네가 천하제일도인가.”
흑사련주는 한눈에 말을 걸어 온 상대가 범상치 않은 고수임을 알아보았다.
억누른 살기는 살갗을 저밀 듯 예리했고, 전신에 흐르는 기운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호위들을 모두 떼어 두고 훌쩍 떠난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찾아온 것을 보면 좋은 의도로 찾아왔을 리도 없었다.
그러나 흑사련주는 경계심보다는 반가운 감정이 먼저 들었다. 일평생 강한 도객을 만나면 그래 왔듯이.
“그래. 내가 천하제일도다.”
팽가주를 꺾은 지 열흘도 되지 않은 때였다. 완벽하지 않은 몸 상태. 내상과 부상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흑사련주는 자신의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 그 칭호를 얻기 위해 그가 지나온 길에는 예상치 못한 수많은 싸움이 있었다.
“네게 생사결을 청한다.”
“하하! 용건이 간결하니 좋구나. 이것만 마저 마시고 붙어 보자.”
흑사련주는 들고 있던 호리병을 호쾌하게 비운 후 적월을 뽑았다. 달빛 아래 붉은 도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흑사련으로 돌아가기 전에 오랜 친우인 추혼궁귀를 만나러 갈 계획이었다. 누구보다 먼저, 자신이 직접 승리를 알리고 싶었다.
헌데 약속 장소까지 산 하나를 남기고 낯선 도객과 마주쳤다.
“들려줄 무용담이 하나 늘겠군.”
그들이 마주 선 이름 모를 야산이 대결 장소가 되었다. 절세의 도객들이 생사결을 앞두고 공력을 끌어올렸다. 휘몰아치는 기파에 나무들이 비명을 질렀다.
“목숨을 노리기 전에 별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겠지? 나는 천하제일도, 도마다.”
“사도.”
“말수가 적은 친구로군.”
지금보다는 성격이 가볍던 시절이었다. 피식 웃은 흑사련주는 적월을 상대의 미간에 겨눴다. 선수를 양보하겠다는 말에 사도는 거절하지 않았다.
끔찍한 칼이었다.
산이 갈라지고 하늘이 찢어졌다. 백여 합을 나누기도 전에 흑사련주는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붉게 물든 하늘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사도, 대적 불가의 괴물.
“충성을 맹세하면 살려 주겠다.”
“……누구에게?”
만신창이가 되어 묻는 흑사련주에게, 사도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각 인형 같은 얼굴로 말했다.
“혈마신교.”
“……!”
그 순간 흑사련주는 죽음을 각오했다. 이 싸움이 자신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흑사련까지 마수를 뻗으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에.
“……내 목숨을 걸고 너를 죽이겠다.”
“의미 없는 목숨이로군.”
흑사련주는 모든 공력을 쥐어짜 내 적월에 담았다. 사도 또한 경시하지 않고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그 순간,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온 유성우가 사도를 덮쳤다.
퍼어어엉!
도망쳐!
추혼궁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흑사련주는 몸을 돌렸다. 그러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뒤쫓아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무시했다.
사흘 밤낮을 도망치다가 결국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추혼궁귀의 등에 업혀 있었다. 그녀의 옷에도 여기저기 혈흔이 번져 있었다.
“궁귀…….”
“아무 말도 하지 마.”
“…….”
흑사련으로 돌아온 후, 흑사련주는 자신의 방에 처박혔다.
바깥에서는 흑사련의 무인들이 련주가 천하제일도가 되었다며 칭송했으나, 정작 흑사련주의 마음은 지옥에 있었다.
절망적인 패배.
게다가 구차하게 도망치기까지 했으니, 스스로에게 커다란 환멸을 느꼈다. 수십 년간 놓지 않았던 칼을 놓고 폐인처럼 지냈다.
콰앙!
방문을 부수고 쳐들어온 추혼궁귀가 멱살을 움켜쥘 때까지.
“언제까지 이렇게 병신처럼 있을 거야?”
“…….”
“차라리 폐관에 들어. 미친 사람처럼 도를 휘두르라고. 당신답게. 처음 진 것도 아니잖아. 천하제일도? 그깟 칭호가 뭐라고. 제발 좀 한심하게 굴지 마!”
“……내가 갑자기 폐관에 들면, 혈교가 본련을 노릴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수 없을 거야.”
건장한 사내의 멱살을 내던지듯 놓은 추혼궁귀가 서슬 퍼렇게 눈을 뜨며 말했다.
“흑사련은 내가 감시하겠어. 그러니 당신은 수련에만 전념해.”
“……왜 그렇게까지 하지? 본련을 싫어하지 않았나?”
추혼궁귀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흑사련주를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흑사련보다 혈교가 더 싫거든. 그리고 천하제일도란 칭호는 당신처럼 오만하고 재수 없는 사내에게 어울려.”
“하하. 하하하……!”
흑사련주는 한참을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다소 힘이 빠진 웃음이었으나, 그 눈에는 점점 사그라들었던 불꽃이 돌아왔다.
그 모습에 추혼궁귀도 비로소 안심한 표정이었다.
“실없이 웃기는. 폐관은 언제 시작할 거야?”
“……지금 당장.”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났다.
* * *
“오랜만이군.”
흑사련주는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사도를 바라봤다.
상대는 변한 것이 없었다.
살갗을 저밀 것 같은 농밀한 살기도, 목각 인형을 보는 것처럼 표정이 없는 얼굴도.
폐관 초기에는 저 모습을 흉내 내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어떻게든 격차를 좁히고자 수많은 날을 몸부림쳤다.
십 년 전에는 대적 불가의 괴물이었던 자.
‘과연 지금은 어떨까?’
폐관동에 들어가 십 년간 몰두했다.
평생 쌓아 온 도법을 낱낱이 해체하고, 분석하고, 새롭게 정립했다. 그 과정을 셀 수 없을 만큼 반복했다.
때로는 광인처럼 몇 날 며칠 동안 칼을 휘둘렀고, 때로는 면벽 수련에 임하는 중처럼 곡기를 끊고 수십 일간 참오했다. 불쑥불쑥 생겨나는 심마와 싸우며 쉼 없이 정진하고 깨쳤다.
그리고 지금.
“예전만큼 강해 보이지는 않는구나.”
흑사련주의 입술이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와 하늘을 물들인 어둠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많군.”
사도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사파의 종주들. 한 명 한 명이 제법 고강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경계심을 드러내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다 백수룡과 눈이 마주친 순간, 사도의 시선이 못 박힌 듯 멈췄다.
“…….”
무표정한 얼굴이 한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었다.
상대의 기파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는 탓이었다. 흡사 끓어오르는 기름 같았다. 분명 신경이 날카로워질 정도로 강한 무인으로 여겨지는데, 호흡이 불규칙하고 몸이 과하게 긴장돼 있었다. 눈빛이 흔들리고 얼굴은 창백했다.
사도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저것이 감정적으로 커다란 동요라는 것은 학습으로 알고 있었다.
사도가 백수룡에게 물었다.
“나를 아나?”
“…….”
백수룡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조리 말할지도 몰랐다. 머릿속에 수많은 대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어떤 것도 이 상황에 적절하지 않았다.
“다시 묻지. 나를 아나?”
“…….”
백수룡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아는 당당한 모습과는 딴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도여. 다른 자들은 신경 쓰지 마라. 너는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닌가.”
흑사련주가 사도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단 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그 즉시 사도의 시선이 흑사련주를 향했다.
“……강해졌군. 예상보다 더.”
눈동자가 살짝 커진 사도의 중얼거림에, 흑사련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는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 것이다.”
화아아아악!
칠흑처럼 어두운 공력의 파동이 하늘을 뒤덮었다.
얼핏 마공처럼 맹렬했지만 기운 자체는 정순했다. 일평생 치열하게 칼을 휘둘러 온 흑사련주의 일념처럼.
“내 싸움이다. 그 누구의 참전도 허락하지 않는다.”
흑사련주의 선언에, 합공을 해야 할지 상황을 살피던 사파 종주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쾅!
발 구름 한 번에 축융봉이 흔들렸다. 동시였다. 다른 무인들이 흔들리는 땅에서 중심을 잡을 때, 두 절세도객은 칼을 뽑으며 솟구쳤다.
허공에서 두 절세고수의 눈이 마주쳤다.
흑사련주의 칼이 사선으로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사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 칼을 휘둘렀다. 검게 물든 하늘에 핏물이 번지듯 붉은빛이 침범했다.
쩌어어어엉!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나무들이 비명을 지르고 바위가 흔들렸다. 산등성이 아래에 있던 동물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합(一合)에 축융봉의 절반이 날아갔다.
두 도객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자연재해에 가까운 사건을 일으키고도 표정은 하나같이 무심했다.
“방금 것이 팔 할.”
흑사련주의 눈매가 슬쩍 휘었다. 그가 즐거운 듯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구 할로 가지.”
“…….”
다시 검은 벼락이 명멸했다. 출수가 극쾌의 영역을 넘어서며, 공기가 뒤늦게 퍼버벙! 소리를 내며 터졌다. 사도의 칼이 정확히 그 궤적을 가로막으며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콰콰쾅!
굉음이 천지를 떨어 울렸다. 수십 개의 벽력탄이 일제히 터진 듯했다.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라기엔 지나친 폭력이었다.
“좋구나. 이번에는 전력으로 가겠다.”
“…….”
흑사련주는 십 년 동안 새롭게 정립한 무상도법의 진수를 마음껏 풀어냈다. 천하의 모든 칼이 이곳에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그 정점에 이른 경지라 말하는 듯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도객의 신들린 듯한 춤사위였다. 혈교의 사도조차 그것을 감당하기 힘든지 점점 밀리는 기색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저것이 천하제일도…….”
“……뒤에 도를 빼도 될 것 같은데.”
“우리 앞에서 보여 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던가.”
사파의 종주들조차 경외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흑사련주의 모습을 바라봤다.
강자에 대한 동경은 무인의 본능이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강호 정점에 있는 초고수들의 생사결. 특히 흑사련주와 대립각을 세운 적이 있는 귀령왕은 팔뚝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아니야…….”
녹의수사는 짓눌린 신음 같은 목소리에 놀라 옆을 바라봤다.
백수룡의 상태가 아까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독 더 이상했다.
그와 같은 절세의 고수가 식은땀을 흘리다니?
[사형. 괜찮으십니까?]녹의수사의 걱정 어린 전음에 백수룡은 이를 꽉 악물고 심호흡을 했다.
삼호.
과거의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이 비껴가기라도 한 것처럼, 기억 속의 마지막 모습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뭔가 잘못됐어.”
“……뭐가 말입니까?”
녹의수사는 다른 종주들이 듣고 있다는 것도 잊고 육성으로 물었다. 다른 종주들도 눈으로는 두 절세고수의 싸움을 쫓고 있었지만, 귀는 백수룡의 목소리에 기울였다.
“……저래선 안 돼.”
예상치 못한 옛 제자와의 만남은 백수룡이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안 된다니. 대체 무슨 말이냐?”
귀령왕이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와 동시에 흑사련주의 칼이 사도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바닥에 내리꽂히는 옛 제자를 바라보며, 백수룡은 단언하듯 말했다.
“사도는 저렇게 약하지 않아.”
““……!!””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흑사련주만이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사도에게 다가갔다.
“무슨 속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