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471
471화. 그저, 궁금했다
흑사련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내공이 전부 빠져나간 몸이 적응되지 않아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몇 번 눈을 깜빡거리자 시야가 회복되었다.
“……저승은 아닌가 보군.”
이곳이 만약 저승이라면, 추혼궁귀가 저렇게 말로 형용하기 힘든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리 없었다.
“소지광, 너 이 자식!”
“……!”
와락 달려든 추혼궁귀가 흑사련주의 맥을 짚고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갑자기 따귀라도 맞을까 놀란 흑사련주가 움찔한 모습을 모두가 보았지만, 다들 모른 척해 주었다.
“……몸은 좀 어떻소?”
백수룡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큰 싸움이 끝나자마자 진기도인을 한 탓에, 그의 안색은 흑사련주보다 더 창백했다.
“좀 어색하고, 아프군.”
흑사련주는 자신의 몸을 낯설게 내려보며 말했다.
여전히 온몸의 혈도를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죽어 가던 목숨을 구한 것에 비하면 대수로운 수준은 아니었다.
“알고 있겠지만, 단전은 회복시킬 수 없었소.”
백수룡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흑사련주의 몸에서 수라혈천도의 기운을 전부 빼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미 찢어진 단전은 어찌할 수 없었다.
내공에 갓 입문한 자들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십존의 일좌이자 천하제일도라 불렸던 절세무인이 평생의 내공을 잃었다.
분명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상심이 클 텐데도, 흑사련주는 생각보다 덤덤한 표정이었다.
“거기까진 감히 바라면 안 되겠지. 구명의 은혜를 입었군. 꼭 보은하겠다.”
“그럼 좀 기다리시오. 대기 줄이 길거든.”
“……음?”
흑사련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백수룡이 힘없이 피식 웃었다.
“실없는 농담이오. 이런 농담이라도 지껄이고 싶은 기분이라……. 그리고 이건 다시 가져가시오.”
백수룡은 흑사련주의 애병인 적월을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흑사련주는 돌려받기를 거절했다.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게는 이제 그 녀석을 다룰 자격이 없다. 이런 몸으로는 신병이기를 감당하지 못해.”
우우웅!
적월이 울었다. 마치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흑사련주가 피식 웃었다.
“이 녀석아. 새 주인과 함께 잘 지내봐라. 곁에 다른 신병이기도 있으니, 친우가 생겨서 적적하진 않겠구나.”
그러자 창룡신검이 부르르 떨며 반응했다.
[나는 저 칼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마음에 안 들 건 또 뭐야?’
[일단 색부터가 불길하지 않으냐.]백수룡은 적월을 견제하는 창룡신검의 반응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국 적월은 백수룡이 가져가기로 했다. 잠시 실랑이가 있었으나, 추혼궁귀마저 쓸모도 없는 칼을 가져가서 뭐 하냐며 백수룡에게 떠넘겼다.
“……잘 간수하다가 자격이 있는 녀석에게 물려주지.”
“궁귀. 나 좀 일으켜 주게.”
흑사련주가 추혼궁귀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뒤편에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녹의수사와 벽안귀에게 말했다.
“나 때문에 기다리게 했군.”
내공을 전부 잃었음에도 흑사련주라는 사내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절대자의 위엄이 그를 떠받치고 있는 듯했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의 말에 집중했다.
“여럿이 죽고 다쳤다. 살아남은 자들조차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귀령왕이 죽었고, 흑사련주는 평생의 내공을 잃었다.
녹의수사와 벽안귀도 보름은 족히 요양해야 할 중상을 입었다. 상대적으로 추혼궁귀는 나은 편이었지만, 그녀 역시 거의 탈진 상태였다.
누구보다 부상이 심각한 사람은 백수룡이었다. 특히 등을 관통해 가슴 밖으로 빠져나온 검상은, 평생 흉터로 남을 터였다.
백수룡은 장걸이 구해 온 장포를 걸쳐 상처를 가렸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곧 무림맹이나 개방에서 몰려올 거요. 이렇게 난리를 쳤으니,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할 테지.”
오악 중 하나인 형산이 초토화될 정도의 싸움이었다. 멀리서도 충분히 그 진동을 느꼈으리라.
벽안귀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 꼴로 정파 놈들과 마주치면 꽤 골치가 아파지겠어.”
그럼에도 사파의 종주들은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직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녹의수사가 산 아래를 살피며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이제 회합을 마무리합시다.”
다들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흑사련주가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춘 후 말했다.
“직면한 혈교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서로의 이해관계를 떠나 당장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희는 어찌 생각하나?”
그들은 직접 맞부딪쳐 싸우면서 혈교가 가진 힘을 몸으로 체감했다.
단 두 명의 사도에게, 이곳에 모인 사파의 종주들이 몰살을 당할 뻔했다.
한가롭게 연합의 이해득실이나 따지고 있기엔, 적이 너무나 강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였다.
“흑사련은 기꺼이 전쟁의 선두에 서겠다.”
“녹림은 길을 만들고 연락책을 준비하겠소.”
“악인곡은 언제든지 싸울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종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수룡을 향했다.
직접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흑사련주가 무공을 잃은 시점에서, 그들의 구심점이 될 사람은 백수룡뿐이었다.
“……알겠소. 내가 임시로 사파연맹의 맹주를 맡도록 하지.”
사파연맹이 결성되었다.
* * *
천지가 개벽할 싸움이 있었다.
곧 무림맹이든 개방이든, 곳곳에서 무림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터였다. 그러니 그 전에 자리를 피해야 했다. 다들 최소한의 부상만 치료하고 서둘러 떠나기로 했다.
“세상에……. 이건 살아 있는 게 기적이구만!”
“가는 길에 가마라도 하나 구해야겠습니다. 형님은 돌아가는 동안 얌전히 누워만 계십쇼!”
“……법석 떨기는.”
장걸과 구길이 백수룡의 몸에 덕지덕지 금창약을 바르고 깨끗한 천으로 감는 동안, 백수룡은 사도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쫓아가려고?”
옆에서 비슷한 몰골을 한 흑사련주가 물었다. 추혼궁귀가 얼마나 꼼꼼하게 싸맸는지, 제대로 움직일 수나 있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오.”
피식 웃은 백수룡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룡학관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제 돌아가야지. 더 늦으면 나 잡으러 뛰쳐나올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서. 련주는 앞으로 어쩔 생각이오?”
“글쎄……. 일단 자리에서 물러나야지.”
흑사련은 앞으로 추혼궁귀가 련주가 되어 맡을 거라고 했다.
한동안은 충격이 크겠지만, 십존의 일좌인 추혼궁귀라면 반발이 그리 크지 않을 거라고.
“내공을 잃었지만 그래도 몸뚱이는 멀쩡하니, 논도나 하면서 후학을 양성해 볼까 싶기도 하고.”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백수룡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 제자들 중에 도를 다루는 녀석이 하나 있는데. 나와 달리 도법만 익혔소.”
“호오?”
흑사련주는 벌써부터 흥미를 보였다. 여전히 그는 도와 관련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내였다.
“꽤 괜찮은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흑사련으로 연수를 보내도 되겠소?”
“물론이지. 네가 칭찬할 정도의 후기지수라 이거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구나.”
흑사련주가 소년처럼 눈을 반짝였다.
백수룡은 피식 웃더니, 은근하게 권유했다.
“녀석이 마음에 들면, 무상도법도 좀 전수해 주시오.”
“……뭐라? 하하하! 아주 내 밑천을 다 긁어 가려고 하는구나!”
껄껄 웃는 모습이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무상도법은 수라혈천도 못지않은 신공이었다. 방금 백수룡은 그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무상도법을 익히면, 수라혈천도의 살기를 제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흑사련주는 기대감이 어린 표정으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고 있겠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응급 처치가 얼추 끝났다. 두 사람은 장포를 걸치고 일어났다. 이젠 정말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 또 봅시다.”
백수룡과 녹의수사 일행이 먼저 형산을 떠났다. 벽안귀도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잠시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흑사련주가 추혼궁귀를 돌아보며 말했다.
“궁귀. 우리도 가지.”
그러자, 추혼궁귀가 흑사련주에게 등을 보이며 무릎을 살짝 굽히고 허리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업혀.”
“음…….”
“설마 그 몸으로 걸어서 가려고? 아니면 뜀박질로 따라올래? 일부러 전부 떠날 때까지 기다려 줬으니까, 잔말 말고 업혀.”
“끄응.”
조목조목 맞는 말이라, 흑사련주는 얌전히 추혼궁귀의 등에 업힐 수밖에 없었다.
“……그럼 신세를 좀 질까.”
“처음 업히는 것도 아니면서 부끄러워하긴.”
그녀의 키가 웬만한 사내 못지않게 커서 바닥에 다리가 끌리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로 흑사련주는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흠흠. 궁귀.”
“왜?”
“이거 기억하나?”
흑사련주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적월의 손잡이에서 떨어진 푸른 수술이었다.
이십여 년 전, 추혼궁귀가 그에게 선물해 준 물건.
삼사도와 싸우는 와중에도 가까스로 지켜 낸 추억이었다.
“이게 뭔데?”
“……너무하는군.”
추혼궁귀가 피식 웃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사내에게 처음으로 해 본 선물이었으니까.
“언제 그걸 따로 챙겼어? 적월의 손잡이에 달려 있던 거잖아.”
“……이러려고 미리 떨어졌던 모양이야.”
흑사련주는 수술을 잠시 만지작거린 후, 피식 웃고는 품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휘익!
훌쩍 뛰어오른 두 사람의 신형이 석양을 향해 나아갔다. 잠시 후, 그들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 * *
“부상은?”
일사도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사사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사도가 수어(手語)로 대답했다.
-며칠 쉬면 된다.
일사도가 사사도의 가슴에 난 상처의 흔적을 보며 말했다.
“며칠 가지곤 어려울 듯한데…….”
그는 사사도의 육체와 호신강기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었다. 저 몸을 다치게 할 수 있는 무공은 천하에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저건, 희미하지만 무극검의 흔적이었다.
“……삼사도에게 듣기를, 사파의 머리들이 모인 자리에서 몹시 수상한 자를 만났다고 들었다.”
사사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말수가 적은 편이었기에, 일사도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직접 싸워 본 너라면, 그자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거라던데.”
흑사련주와 싸우느라 대부분의 기력을 소진한 삼사도는 먼저 일사도를 만난 후 쉬겠다며 돌아갔다. ‘심장을 스쳤다.’라고 중얼거리던 말이 일사도의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다.
“그자가 누군지 알 것 같나?”
사사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잠깐만 참거라.
맞닿은 가슴을 뚫고 들어와, 심장에 닿은 창룡신검의 차가운 감촉.
그 순간, 신검을 타고 상대의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옛 스승.
그와 관련된 수많은 증오스러운 기억들 속에서, 하나씩 낯선 장면들이 드문드문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원망하나?
흔들리던 눈빛. 주향을 풍기던 깊은 한숨, 괴로운 표정으로 꺼지라고 소리 지르던 모습.
-……비켜라. 너희만큼은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다.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순서도 맞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기억들이 아무렇게나 불쑥불쑥 떠올랐다.
혈교로 돌아오는 내내 그랬다.
-성대를 다쳤다고? 왜 진작 말을 하지 않았나!
아직 수어를 배우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사호는 바닥에 삐뚤빼뚤하게 쓴 글로 대답했다.
훈련을 하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래도 말했어야지! 내게 진작 말했으면 어떻게든……!
불같이 화를 내는 교관을, 당시의 사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왜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옛 스승이 지었던 표정은…… 이상할 정도로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너희에 대해 전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단 말이다. 죽이든 살리든.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지 다 이야기해라. 알았나?
돌이켜 보면, 그날은 평소보다 훈련이 조금은 덜 힘들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여러 기억들이 떠올랐다. 뭔가를 실수한 자신들을 대신해 마뇌에게 뺨을 맞는 모습이라든가, 훈련이 끝나고 자러 들어간 방에 놓여 있던 금창약 따위.
왜 지금까지 기억하지 못했을까.
“사호. 내 말 듣고 있나?”
일사도의 목소리가 그를 다시 현실로 불러왔다. 사사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였다.
“…….”
청룡신협 백수룡.
이름을 직접 듣기도 했고, 싸우면서 녹림십팔식, 무극검, 빙백신공까지 겪어 보았다.
그의 정체는 명백했다. 그럼에도 사사도는 거짓말을 했다. 당장 어떤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일사도에게 진실을 말했다면, 영원히 이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내게 알리도록.”
-알겠다.
옛 스승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밖으로 나온 사사도는 가슴에 난 상처를 꾸욱 눌렀다. 은은히 퍼지는 통증. 그러나 수십 년 만에 생겨난 궁금증을 없애지는 못했다.
“…….”
다음 날, 혈교의 네 번째 사도가 종적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