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17
517화. 알려 줄 것이 있다
청룡학관과 주작학관의 두 번째 대결이 끝난 후.
“빙백신공이라……. 오랜만이군.”
염왕이었다. 여민의 하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그의 시선은 먼 과거를 보는 듯 아련했다.
“빙백신공을 겪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백수룡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북해빙궁의 절학인 빙백신공은 중원에서 쉽게 만나 볼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염왕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백수룡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다.
“옛날에, 빙월신녀라는 절세고수와 겨룬 적이 있다.”
“……!”
백수룡이 눈을 부릅떴지만, 다행히 염왕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노인은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며 탐스러운 수염을 쓸어내렸다.
“내 평생 여인에게 그토록 망신을 당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허어. 형님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까?”
노군상의 물음에 염왕이 클클 웃었다. 다른 강사들도 안 듣는 척하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놈아. 나는 뭐 처음부터 십존이었는 줄 아느냐? 빙월신녀의 무공은 당시 나보다…… 음. 반수 정도는 위였지. 서로의 뛰어난 무공에 감탄한 우리는 며칠 동안 매일같이 비무를 이어갔다.”
다들 쉽게 듣기 힘든 전대 십존의 옛이야기에 흥미로워했지만, 백수룡은 언젠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그러다 문득, 전에 풍월화공의 집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은예린 주변에 날파리들이 어찌나 많이 꼬였는지 아나? 특히 무공 좀 한다면서 성가시게 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전부 다 묵사발을 내서 돌려보냈지.
풍월화공과 검노가 서로의 술잔을 채워 주며 해 주었던 은사부의 옛이야기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말해 주겠다며 술에 취해서 떠들던 풍월화공의 들뜬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했다.
-한 번은 양강무공을 익히고 온 놈이 있었지? 이름이 사마 뭐시기였는데, 은예린한테 한눈에 반했다면서 대뜸 겨루어 달라고 조르더니…….
-아주 호되게 처맞고 울면서 돌아갔지.
-그래도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었어. 그렇게 맞고 다음 날, 그리고 또 다음 날, 한 열흘은 다시 나타나서 덤비더라니까?
풍월화공과 검노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풀어주던 옛이야기 속 주인공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큽…….”
“갑자기 왜 웃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수룡이 진실을 아는 줄도 모르고, 염왕은 자신의 과거를 상당 부분 왜곡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한때 스쳐 지나간 인연이지. 훗날 다시 만나 못다 한 승부를 겨루기로 했으나…… 서로 바빠 만나지 못하였구나.”
염왕은 이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차라리 다시 만나지 않은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혹여나 그녀와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면, 귀한 손주들을 만나지 못할 뻔하였으니…….
염왕의 따스한 시선이 사마영과 사마현을 향했다. 백수룡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런 뻔뻔한 영감탱이 같으니.’
사실이야 어쨌든, 사부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꽤 반가운 일이었다.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백수룡이 전낭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며 말했다.
“서로 한 번씩 이겼으니, 이제 마지막 대결이 남았군요.”
“결국 동전을 던져야겠군.”
첫 번째 대결과 두 번째 대결에서 한 번씩 승리했으니, 마지막 종목으로 승부를 결정짓게 되었다.
“동전 던지기는 공평하게 악가의 무인에게 부탁하도록 하지.”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악가의 무인 하나가 불려와 동전을 하늘 위로 던졌다.
휘익!
모두의 시선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동전의 움직임을 좇았다.
앞면이 나오면 청룡학관이 대결 종목을 결정하고, 뒷면이 나오면 주작학관이 종목을 결정한다.
당연히 이기는 쪽이 유리한 종목을 고르게 될 테니, 동전의 앞뒤가 승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휘이잉-
돌연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동전을 감싸더니, 앞면도 뒷면도 아닌 옆면으로 바닥과 수직이 되도록 사뿐히 안착시키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갑자기 누가…….”
누가 봐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일에, 모두의 시선이 바람이 불어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단발머리에 얼굴에는 주근깨가 있는 소녀가 큰 눈을 반짝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연소하! 너 지금까지 어디 숨어 있었던 거야!”
사마영이 대뜸 소리치며 다가가자, 연소하가 그 거리만큼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헤실헤실 웃었다.
“술이 덜 깨서 졸려가지구…….”
당당히 숙취 때문에 안 나왔다는 발언에, 사마영이 뒷목을 잡았다.
“너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 당장 이리 안 와!”
“잠깐만요! 그 전에 제 얘기 먼저 들어주시면 안 돼요?”
당장이라도 내뺄 수 있도록 거리를 확보하는 뒷걸음질 보법에서 도가 무공의 현묘함이 느껴졌다.
백수룡은 그것이 무당파 절기인 제운종이라는 것을 알아보곤 가볍게 혀를 찼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군.’
덤으로 보통 망나니가 아닌 것으로도 보였지만, 청룡학관 소속이 아니니 속이 터지는 것은 그가 아닌 사마영이었다.
“허허. 무슨 생각이 있어서 나섰을 테니, 한번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게 어떤가?”
다행히 노군상이 나서서 사마영을 말렸다.
사마영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연소하를 노려보았으나, 그 이상 어쩌지는 못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연소하는 강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정작 대결을 하는 건 저희들인데, 선생님들이 종목을 전부 정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마지막 대결은 학생들이 직접 정하면 어떨까요?”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그와 별개로 충분히 타당한 의견이었다.
“학생들이 직접 정한다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강사들도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서로를 바라봤고, 학생들 중 일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소하 학생. 좋은 의견이라도 있나?”
백수룡의 질문에, 연소하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대결은 전원이 참여하는 단체전으로 하면 어떨까요?”
“……단체전? 설마 패싸움이라도 하자는 건 아닐 테지.”
몇 번 당해 본 역사가 있는지, 염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다는 듯 연소하를 바라봤다.
그러나 연소하는 이미 주작학관과 청룡학관 학생들을 둘러보며 설득하고 있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때? 몇 명이서 대표로 나가서 졌다고 다른 학관 애들을 선배라고 부를 수 있어? 정작 우린 주먹질 한번 못 해 봤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젓자, 연소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그럼 다들 동의하는 거지? 다 같이 마지막 대결에 참여해서 승부를 결정 짓는 걸로!”
“……구체적으로 어떤 대결이냐가 중요하겠지요. 선배님.”
사마현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묻자, 연소하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번쩍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바로 저거!”
청룡학관과 주작학관의 숙소가 있는 방향이었다.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연소하의 손가락이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시작해서, 상대 학관의 깃발을 뺏는 쪽이 이기는 거야. 어때?”
청룡과 주작이 그려진 깃발이 각각의 숙소 옥상에 걸려 펄럭이고 있었다. 악가에서 학생들이 숙소를 헷갈리지 말라고 준비해 준 깃발이었다.
“깃발 뺏기라…….”
“재미있겠는데?”
“그럼 공격과 수비부터 나눠야겠는데.”
“의외로 전략이 중요할지도…….”
웅성웅성.
연소하의 제안에 학생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흥미로워하는 가운데, 청룡학관 측에서 학생들을 대표해서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훗. 그거 재미있겠군.”
하필이면 독고준이 손바닥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당소소와 함께 의원을 찾아간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청룡학관의 입장을 대변할 만한 두 학생이 모두 부재한 상황에서, 자칭 청룡학관의 대표가 도를 뽑아 들고 외쳤다.
“청룡학관 동아리 연합회장, 나 파천도 헌원강이 그 제안을 받아 주마!”
청룡오망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려 헌원강을 외면하고 백수룡은 얼굴을 감싸 쥐었으나, 헌원강은 끝까지 굴하지 않은 채 당당했다.
“좋아. 그럼 청룡학관도 동의한 거지?”
활짝 웃은 연소하가 고개를 돌려 강사들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자신의 의도대로 상황을 주도한 소녀의 능력에, 강사들은 혀를 내둘렀다.
“쯧. 소하 저 녀석……. 하여간 이럴 때만 귀신같이 나타난다니까. 군상아.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허허. 재미있겠군요. 저는 좋습니다.”
두 관주 역시 ‘깃발 뺏기’를 마지막 대결 종목으로 하는 데 합의했다.
단, 안전을 위해 세부적인 규칙이 추가되었다.
날이 있는 무기 대신 목제 무기를 사용하고, 검풍, 검기, 장풍 등 공력을 외부로 발출하는 것도 전부 금지하기로 했다.
“그럼 차라리, 아예 오후 합동 수업을 깃발 뺏기로 대체하는 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시간도 애매하니 점심 먹고 나서 제대로 준비해서 붙어 봅시다!”
한 번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강사들도 당연히 소속된 학관이 이기기를 바랐다. 도시락을 펼친 학생들과 강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허허허! 청춘이구나!”
“보고 있으려니 피가 끓는군. 우리는 참여하면 안 되겠지?”
그리고 그 모습을 구경하는 관주들이 가장 신이 난 모습이었다.
* * *
점심시간 이후, 청룡학관과 주작학관은 각자의 숙소 건물을 앞에 두고 다시 만났다.
점심시간 중에도 학생들은 서로를 경계하듯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고, 청룡학관은 헌원강을 중심으로, 주작학관은 사마현을 중심으로 편제가 짜였다.
진형을 짜고 서로 대치한 모습이 실제 전투의 긴장감을 방불케 했다.
방어조를 짠 학생들은 깃발 주변이나 숙소의 주요 길목에 자리를 잡고, 공격조 학생들은 건물 아래에 내려와서 각자 목제 무기를 꼬나쥐고 있었다. 그곳이 공격의 시작 지점이었다.
“주작학관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이기자!”
주작학관 공격조를 이끄는 사마현이 학생들을 돌아보며 의욕을 고취시켰고.
“전부 죽여!”
청룡학관 공격조의 선두에서는 어깨에 목도를 툭 걸친 헌원강이 눈을 희번들하게 뜨고 살기를 뿌렸다.
그리고 백수룡은 그 중간에서 심판을 맡기로 했다.
“다들 흥분해서 다치지 않게 조심하도록.”
우와아아아아!
죽여어어어어!
“……전혀 흥분을 가라앉힐 기세가 아니군. 하여간 반칙하는 놈, 그리고 부상자는 선생님들이 끌어낼 테니까 그렇게 알고…….”
낮게 한숨을 내쉰 백수룡은 인내심의 한계를 보이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럼 깃발 뺏기 시작!”
곧바로 서로에게 달려든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충돌하고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강사들은 혹시나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곳곳에서 대기했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악연호는 숙소 옆 건물 옥상에서 학생들을 지켜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피식.
망아지처럼 날뛰기는 해도, 저토록 활기 넘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강사로서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과거의 자신이 그러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저렇게 즐거운 훈련을 볼 줄이야.”
악가의 분가에서 웃는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악연호는 자신의 미소가 어색한지 입가를 매만졌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악가의 하급무사인 동걸이 다가오고 있었다.
“악연호 도련님. 가문에서 찾으십니다.”
“날? 누가…….”
“잠깐이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악연호는 잠시 머뭇거렸다. 바로 하루 전에 악비에게 뺨을 맞은 것이 떠올라서였다.
그러나 가지 않으면 동걸에게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옛 친우는 자신과 달리 악씨 성조차 받지 못했다. 처벌이 뺨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잠깐만.”
악연호는 근처에 있는 강사에게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한 후, 동걸을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악연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님.”
산동악가의 소가주.
훗날 창왕을 뛰어넘으리라 평가받을 만큼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유명했고, 이제는 가문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진 야망이 넘치는 여인.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으나, 악연호가 어린 시절에 알고 지내던 악연화는 그렇게 단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할까.
“너는 물러가거라.”
“예.”
동걸이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난 후, 악연화는 물끄러미 악연호를 바라봤다. 악연호는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고개를 푹 숙였다.
“네게 알려 줄 것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잠시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악연호가 방 안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겹다고 느낄 때, 연화가 입을 열었다.
“……가주님을 조심해라.”
악연호는 고개를 번쩍 들어 연화를 바라봤다.
그것은, 그가 과거에 딱 한 번 보았던 적 있는 굳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