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20
520화. 선택권은 더 이상
“준비는 언제 끝나지?”
악비의 질문에 불사마존은 식사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 선연한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마음이 조급한가 보군. 곧 끝날 테니 기다리시게.”
클클 웃은 불사마존은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았다. 그의 옆, 피를 빨린 무언가가 힘겹게 신음하며 악비에게 손을 뻗었다.
“살려, 주세요…….”
이미 사람이라고 부르기 힘든, 목내이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그럼에도 살려 달라며 필사적으로 도움을 청했다.
“대, 대협…….”
기골이 장대하고 무복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이야기 속에서 듣던 정파의 협객처럼 보이는 사내를 향해 간절히 애원하는 손.
“치워라.”
눈살을 찌푸린 악비가 낮게 중얼거리자, 무형의 기파가 뻗어 나와 말라비틀어진 손을 쳐 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털썩.
결국 숨이 끊어진 목내이가 옆으로 축 늘어졌다. 그 표정은 고통과 분노로 점철돼 있었다.
불사마존이 시체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가련한 것. 정파의 협객이 나타난 줄 알고 헛된 희망을 가졌다가 더욱 고통스럽게 갔구나. 함께 있는 것을 보고도 상황 판단을 못 한 겐가?”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지.”
악비는 불쾌하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불사마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혈교의 대장로를 노려보는 혐오감 어린 시선의 뒤에는 상대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이 숨겨져 있었다.
‘괴물 같은 늙은이.’
불사마존이 익힌 불사마공은 상대의 피를 빠는 것으로 내공과 선천지기를 취하고, 그로써 불사(不死)라는 말에 어울리는 재생의 공능과 강대한 힘을 얻는다.
그 마공을 극성까지 익힌 불사마존은 악비가 태어나기 전부터 악명을 떨친 혈교의 절세고수였다.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게. 아직 오지 않은 인원이 있으니.”
불사마존은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어조로 악비를 달랬다. 산동악가의 수신호위들이 주인을 대신해서 살기를 내뿜었으나, 불사마존은 가소롭다는 듯 클클 흘려낼 뿐이었다.
“하나같이 충성심이 깊군. 어려서부터 교육을 잘 시킨 모양이야.”
“너희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물러나라.”
수신호위들을 물린 악비는 불사마존과 마주 앉았다. 둘 다 기세를 끌어올리지 않았음에도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 듯했다.
악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약조한 시간이 지났다. 슬슬 내가 복귀하지 않으면 저들도 이상하게 생각할 터. 너희도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닐 텐데.”
“클클. 당대의 악가주는 인내심이 많이 부족하군. 초조하면 먼저 가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내 눈으로 직접 혈교의 전력을 확인하기 전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쯧쯧. 이렇게 신뢰가 없어서야……. 애초에 늦게 도착한 것은 너였거늘, 노부가 그때 성을 내던가?”
“덕분에 내가 지금 참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군.”
미간을 찌푸린 악비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쾅!
충격파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 기운을 정면에서 맞은 불사마존의 수염과 장포가 찢어질 듯 펄럭였다. 뺨에는 가벼운 생채기마저 생길 정도였으나,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클클. 십존께서 화가 나셨군. 너희들로는 성에 안 차는 모양이구나.”
불사마존은 태연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검붉은 피풍의에 흑립을 눌러쓴 자들이 말없이 도열해 있었다.
그 선두에 선 흑립인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창왕에게 저희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수십 년 전 정파무림의 총공격으로 사멸했다고 알려진 혈교의 무력대들.
불사마존 뒤에 도열한 자들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워진 무림이 경험한 적 없는 혈교의 정예 부대 중 하나였다.
‘하나하나가…… 내 수신호위들에 비해서 약하지 않다.’
악비는 불사마존의 뒤에 도열한 자들의 전력을 가늠했다.
많은 시간과 재화를 들여 육성한 자신의 수신호위들에게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실력은 분명 감탄할 만한 수준이었으나, 악가의 분가에 모여 있는 전력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했다.
청룡신협과 염왕.
여기에 전대 고수인 노군상, 그리고 그의 입술에 상처를 만들어 낸 남궁세가의 셋째를 떠올리면 더더욱.
“……고수의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설마 내가 거들길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악비는 이 싸움에 악가의 명운을 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피를 흘리는 것은 혈교여야 했고, 자신과 악가의 전력은 마지막에나 나설 계획이었다.
그래야만 그가 원하는 바를 모두 쟁취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혈교의 전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다면…….
“이만하면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제안은 처음부터 못 들은 것으로 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악비가 서늘한 시선으로 불사마존을 바라봤다.
악비는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차라리 간웅(奸雄)이라 불리는 편이 더 어울리리라. 악가를 천하제일세가로 만들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도박을 시도할 바에야,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나았다.
악비가 그대로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클클. 그래.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그건 누구보다 우리가 잘 알아.”
불사마존이 앞에 놓인 차로 입가심을 한 후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본교는 청룡신협에 의해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지.”
“…….”
지금까지 청룡신협으로 인해 죽은 혈교의 장로만 셋이고,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던 천살마저도 실패했다.
그밖에도 많은 계획이 청룡신협 탓에 어긋나고 말았다.
교의 부활을 알릴 신호탄이었던 남궁세가를 제대로 불태우지 못했고.
오랫동안 공을 들여 포섭한 무림맹의 세작을 색출해 모든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다 죽어 가던 개방의 방주를 살려 내 정파의 정보 체계를 뒤흔드는 것마저 막아 냈다.
북해빙궁을 흡수하는 일에 실패한 것 또한, 같은 기간 청룡신협의 행적이 묘연했던 것으로 볼 때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최근에 크게 다쳐서 돌아온 삼사도와 종적을 감춘 사사도의 행방도 청룡신협이 관련되어 있을지 몰랐다.
불사마존의 눈에 스산한 살기가 감돌았다.
“……몇 번이나 수모를 당했지. 게다가 놈의 정체 또한 아주 의심스럽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 교의 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장로들을 척살하기 시작한 절세고수.
심지어 혈교에서도 일사도 외에는 제대로 익힌 자가 없는 절세검공, 무극검까지 익혔다 들었다.
하여, 대장로는 자신이 직접 혈교의 정예를 이끌고 이곳까지 왔다.
“본교는 이번에야말로 청룡신협을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본교 최강의 전력을 동원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최강이라? 그런 것치곤 실망스러운데.”
악비의 빈정거림에도 조용히 차를 음미하던 불사마존은 문득 객잔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악비의 표정이 굳었다.
“마침 하나둘 오는군.”
잠시 기다리자, 승복을 두른 대머리 거한과 허리춤과 등에 검을 다섯 자루나 찬 노인이 객잔으로 들어와 대장로에게 가벼운 예를 취했다.
“어서 오게. 삼장로. 사장로.”
삼장로 투전혈승.
사장로 풍도검귀.
불사마존에게 예를 취하는 그들을 본 악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고수다.’
전신이 긴장하며 몸에 힘이 들어갔다. 싸워서 이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쉽게 승부를 낼 만한 자들도 아니었다.
“본교의 장로들일세. 이쪽은 악가의 가주시고.”
간단히 통성명을 나눈 후, 불사마존이 장로들에게 물었다.
“삼괴는 회유하는 데 성공했나?”
“곧 이곳으로 데려올 것이오.”
혈승의 대답이 있고 잠시 후, 사나운 기세를 뿜어내는 사내 셋이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인상이 험상궂었는데, 얼굴이며 몸에 거칠게 쓸린 흔적과 멍 따위가 희미하게 남겨져 있었다.
전에 본 무림공적의 명단에서 그들의 용모파기를 떠올린 악비가 낮게 신음했다.
“명부삼괴?”
명부삼괴(冥府三怪).
십대악인이라 불리며 명성을 떨치는 사파의 고수들로, 한 명 한 명이 뛰어난 고수인 데다 셋이 의형제를 맺고 몰려다니며 이십 년이 넘도록 온갖 악행을 저지른 말종들이었다.
각각 검, 창, 채찍을 다뤘는데, 이십 년 넘게 붙어 다니며 익힌 합격술은 십존조차 상대할 수 있을 정도라는 소문이 있었다.
명부삼괴의 첫째인 일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적의를 드러냈다.
“지랄. 혈교에서는 고독을 먹이고 협박하는 것을 회유라고 하나?”
“클클. 독기가 바짝 들어 있구나. 걱정 말거라. 이번 일이 끝나고 본교에 귀의하면, 내 직접 고독을 빼내 줄 것이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명부삼괴는 혈교에게 사로잡혀 억지로 끌려온 듯했다.
‘대체 누가 저들을?’
명부삼괴의 명성과 실력을 생각해 보면, 큰 상처 없이 저들을 사로잡은 혈교의 저력이 어마어마함을 알 수 있었다.
“클클. 어떤가? 이래도 고수가 부족한가?”
“…….”
불사마존이 돌아보며 묻는 말에, 악비는 객잔 안에 모인 면면들을 확인했다.
혈교의 장로 셋과 십대악인 셋.
여기에 더해 객잔 바깥에 대기 중인 혈교의 전력까지 고려하면, 설령 구파일방 중 하나라도 충분히 도모해 볼 만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을 그대로 말할 이유는 없었다.
“이제야 구색은 갖춘 듯하군.”
“클클. 걱정 말게나. 아직 끝이 아니니.”
“……뭐?”
묘하게 웃은 불사마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누가 와도 여유로웠던 그의 표정에 처음으로 긴장감이 어렸다.
“오셨소.”
상대의 기척이 가까워지기도 전에, 소름끼치는 한기가 객잔 안에 스며들었다.
싸아아아-
객잔 밖에서부터 불어온 새하얀 바람이 객잔 안의 기운을 급속도로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겨울이 들이닥친 듯했다. 눈보라와 함께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박.
“빌어먹을…….”
“아직도 뼈가 쑤시네…….”
“끄응…….”
수십 년간 악명을 떨치며 천하를 활보하던 명부삼괴가 비루먹은 개처럼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사박.
여인이었다. 새하얀 무복에 소매만 붉게 물들인 모습이었다.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바닥을 걸어오는데, 발자국 대신 하얀 서리가 걸음마다 맺혔다.
“사도여.”
불사마존은 예의를 갖춘, 동시에 경계하는 듯한 태도로 사도를 맞이했다.
‘저 여인이…… 혈교의 사도.’
악비는 눈을 부릅떴다.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혈교의 전설적인 존재와 마주한 순간, 악비는 하마터면 그대로 창을 뽑아 찌를 뻔했다.
상대는 기세를 담지 않은, 그저 무감정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는데도.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는 악비와 달리, 사도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마치 아무런 관심을 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대장로. 네가 말한 것들을 데려왔다.”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찬 공기를 타고 흘렀다. 혈교의 두 번째 사도. 그녀의 무심한 시선이 명부삼괴에게 잠시 향했다. 그 순간 십대악인이라 불리는 명부삼괴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수고하셨소. 교에서 데려온 그자는 바깥에 두셨소이까?”
고개를 끄덕인 사도가 물었다.
“계획은?”
“아직은 시작할 단계가 아니외다. 필요한 시기에 연통할 터이니, 편히 쉬고 계시면 되겠소.”
고개를 끄덕인 사도는 몸을 돌려 객잔을 나갔다. 그녀의 기척이 멀어지고 나서야 명부삼괴는 참았던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사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악비에게 대장로가 다가와 말했다.
“더 이상 고수가 부족하다는 소리는 하지 말게. 그만큼 우스운 허세도 없으니.”
“…….”
악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부족하기는커녕, 혈교의 전력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에.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자신의 야망을 위해 혈교를 끌어들였으나, 뒤늦게 이들을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땐, 악비에게 선택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클클. 잘 생각했네. 헌데…… 계획을 조금 바꿀까 하는데.”
불사마존이 섬뜩하게 웃으며 악비를 바라봤다. 그 눈에서 광기가 서린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