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21
521화. 붉은 유성
스윽. 스윽.
조용한 방 안에는 붓으로 서찰을 적어 내려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적은 혈교일 거야.”
붓을 내려놓은 백수룡은 자신이 적은 내용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종이에 정갈한 붓글씨가 빼곡했다. 생각을 정리하며 적느라 평소보다 시간이 걸렸다.
“거의……. 아니, 분명히.”
백수룡은 악비가 손을 잡은 자들이 혈교라고 확신했다.
명백한 증거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건 추론을 넘어선 직관의 영역이었다.
혹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날 우선적으로 노리겠지. 혈교 입장에서는 몇 번이나 수모를 당했으니까. 이번에는 아주 작정하고 왔을 테니…….”
백수룡은 차분하게 적의 목적을 추측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유성 하나가 밤하늘을 사선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긴 꼬리를 남기고 떨어지는 별을 바라보며, 백수룡은 나타날 때처럼 갑자기 떠난 사호를 생각했다.
[무얼 그리 생각하느냐?]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창룡신검이 말을 걸어 오자, 백수룡은 어색하게 웃었다.
“붙잡을 걸 그랬나 싶어서.”
녀석은 어디로 갔을까.
혈교로 돌아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잠시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 떠났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싸움이 끝나고 돌아올지도 모른다.
“어쨌든 심장에 있던 혈마의 술법은 사라졌으니…….”
백수룡은 차라리 사호가 아주 멀리 떠나서 돌아오지 않길 바랐다.
어디든 정착해 평범한 삶을 흉내 내며 살아간다면 어떨까.
심지가 굳고 똑똑한 녀석이니, 무엇을 해도 잘 해낼 터인데.
그리고 훗날 혈교가 완전히 무너진 후에 다시 재회하게 된다면, 그땐…….
[네 제자들은 대체로 말을 안 듣는 편이지.]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한 창룡신검의 농담에, 백수룡은 피식 웃고는 창룡신검의 검신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건 그렇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백수룡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호의 표정이 자꾸만 신경 쓰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털어 내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사호보다 청룡학관 학생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할 때였다.
“저 녀석이 깨어나면, 잘 말해 줘.”
백수룡은 다 마른 종이를 잘 보이는 탁자 위에 두고, 창룡신검을 문진처럼 그 위에 올려놓았다.
[무슨 유언장이라도 남기고 떠나는 사람 같구나.]불안해하는 목소리에 백수룡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재수 없게 무슨 소리야? 저 자식이 아직도 무아지경에 빠져 있느라 상황을 전혀 모르니까, 미리 서찰 좀 써 둔 건데.”
백수룡은 고개를 들어 가부좌를 튼 채 침상 위 허공에 떠 있는 남궁수를 바라봤다.
“…….”
그는 눈을 감은 채 여전히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주변으로 반투명한 원형의 기막이 둘러쳐져 있었는데, 창룡신검이 펼친 보호 술법이었다.
파직, 파지지직!
술법의 내부에서는 벼락이 명멸하고 있었다.
기파와 소음을 모두 차단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방 안이 온통 잿더미가 되었으리라.
“깨달음 한번 요란하네. 얼마나 강해지려고 이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수룡은 다시 창룡신검을 바라봤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깨어나면 다행이지만, 만약 일이 터지면 나도 정신이 없어서 여기까지 신경 쓰지 못할 거야.”
그렇다고 함부로 깨울 수도 없었다.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깨달음이 멀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자칫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백수룡은 창룡신검에게 남궁수를 부탁했다. 술법으로 기막을 펼쳐 그가 깨어날 때까지 기척을 감춰 달라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창룡신검이 한숨을 쉬었다.
[답답하구나. 이런 때에 내가 곁을 지키지 못한다니……. 네 무공을 온전히 담아 내기에 그 녀석으로는 부족하거늘.]우우웅.
백수룡의 허리춤에서 적월이 부르르 떨었다. 마치 콧방귀를 뀌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을 잘 보필하거라! 돌아가서 부지깽이로 쓰이고 싶지 않으면!]우우웅!
선배랍시고 기강을 잡으려는 창룡신검과 무시로 일관하는 적월의 모습에, 피식 웃은 백수룡은 신병이기들을 공평하게 토닥여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남궁수를 향하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남궁수. 너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하겠지. 남궁세가에서도 그랬으니까.”
“…….”
“빨리 깨어나라.”
그 이상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백수룡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남궁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수학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 * *
이른 새벽.
먼저 연무장에 나와 주변을 살펴보던 악연호가 백수룡을 보고 다가왔다.
“궁수 형님은 좀 어때요?”
“똑같아. 깨어나면 바로 상황 파악하라고 서찰 하나 남겨 놓고 왔다. 일 터지면 그럴 시간도 없을 테니까. 별다른 일은 없었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악연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그의 시선은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악가 무인들을 향하고 있었다.
“계속 감시했지만 수상한 건 없어요.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요.”
수학여행 마지막 날.
오늘 일정에는 산동악가 고수들의 창술 시범과 진법 시범이 있었다.
즉, 악가의 고수들이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집결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백수룡은 만약 악비가 일을 벌인다면 그때가 적기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한 가지 변수가 발생했다.
“악비가 아직도 안 돌아왔다고?”
둘째 날 새벽에 떠난 악비는 아직까지도 분가로 돌아오지 않았다. 함께 데려간 부하들 중에서도 복귀한 자가 없다고 했다.
‘뭔가 이상해.’
산동악가가 악비 없이 무언가 일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염왕과 청룡신협 두 사람만 나서도 이곳에 있는 악가의 전력 정도는 쓸어버릴 수 있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을 터.
백수룡은 악가의 정문 쪽을 바라봤다. 일출이 서서히 어둠을 밀어내면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설마 눈치를 채고 발을 뺐나?’
미간을 좁힌 백수룡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때였다.
“형님.”
“오라버니.”
명일오와 제갈소영이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악연호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두 사람은 각자가 맡은 구역을 살펴보고 온 참이었다.
“저희가 확인한 곳은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인 것 같기는 해요.”
“그래……. 알았다.”
잠시 고민하던 백수룡은 명일오와 제갈소영에게 계속 살펴보라고 부탁한 후, 악연호를 불렀다.
“연호야. 잠깐 나 좀 보자.”
“네?”
그들은 보는 시선이 없는 실내 연무장으로 향했다.
문을 닫고 기막을 펼친 백수룡이 악연호에게 말했다.
“오전 일정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잘하면 배울 수 있을 거다.”
“……배우다니요?”
백수룡은 남궁수와 싸우던 악비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공을 제한한 채로 예상외의 강적과 싸워야 했던 악비는 생각 이상으로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야만 했고.
백수룡도 그 싸움을 단순히 구경만 하진 않았다.
기회가 될 때 상대의 사소한 습관이나 반복되는 투로를 읽는 것. 전생부터 들인 버릇이었다.
“남궁수와 싸울 때는 악비도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그런 것도 금방 사라졌지만…….”
“네?! 궁수 형님이랑 누가 싸웠다고요?”
상대가 평생 가축처럼 무시해 온 가문의 양자라면, 자신도 모르게 방심하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리라.
“그러니까 잘하면 한 번 정도는 가능할 거야.”
“대체 뭐가요?”
답답한 표정으로 묻는 악연호에게, 백수룡은 실내 연무장 한편에 놓여 있는 창을 들어서 겨누었다.
“기회가 오면, 네가 직접 악비한테 한 방 먹여 버려. 방법은 내가 알려 줄 테니까.”
“……!”
그 순간, 악연호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 * *
아침을 먹을 때까지도, 백수룡을 비롯한 강사들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당소소에게 빌린 은침으로 음식들에 독이 들었는지 검사해 봤지만, 은침의 색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시작할 리는 없지.’
아직까지도 악비는 돌아오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백수룡의 표정은 착 가라앉았다. 간혹 그에게 말을 걸려고 다가오던 학생들도 눈치껏 조용히 물러났다.
‘둘 중 하나인가. 이 안에 있는 가문의 무인들을 다 버리기로 결심했거나……. 자신도 버려졌거나.’
폭풍전야의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강사들뿐이었다.
괜한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학생들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은 탓이었다.
와하하하!
미친 거 아냐?
청룡학관에는 이런 거 없어?
뭐? 진짜로?
소년·소녀들의 친화력이란 상상을 초월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개와 원숭이처럼 싸워 대던 학생들이, 고작 하룻밤 만에 친해져선 삼삼오오 식당에 모여 떠들고 있었다.
피식.
“이것들이 바빠서 순찰을 제대로 못 했더니…….”
백수룡은 청룡오망과 연소하, 사마현이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간밤에 학생들 방을 돌아다니며 술이란 술은 전부 압수하고 주의를 주었지만, 순순히 잠들 녀석들이 아니었다.
다행히 망아지 같은 체력을 지닌 무림의 소년·소녀들이라 그런지, 밤을 새웠는데도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아침 식사 이후에는 약간의 휴식, 그리고 마지막 날의 오전 일정이 시작되었다.
“전부 대연무장으로 모여라!”
학생들은 소속에 상관없이 섞여서 대연무장에 집결했다.
첫날에는 물과 기름처럼 양쪽으로 나뉘어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학관별로 떨어뜨리는 게 일이었다.
“헌원강! 빨리 이쪽으로 안 와!”
“연소하! 너는 왜 청룡학관 단체복을 입고 있어?”
“헤에. 옷이 예뻐서 바꿔 입어 봤는데요?”
“……저 녀석들. 어제까지만 해도 치고받던 놈들 맞습니까?”
“으르렁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만…….”
강사들은 그 모습을 마냥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가주전과 그 일대에는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악가 무인들의 숙소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서구는 확인해 봤습니까?] [밤새 돌아가면서 하늘을 주시했습니다. 전서구나 전서응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수시로 전음이 오갔다.
두 관주의 협력에 강사들은 정보를 공유했다. 일부는 불안해하고 있었고, 일부는 청룡신협의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괜한 기우였던 것이 아닙니까?] [차라리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청룡신협이 조금 망신을 당하더라도 그편이 낫지요.]몇몇 강사들 사이에 불신과 방심이 퍼져 나가자, 관주들이 엄포를 놓았다.
[방심하지 마라! 수학여행이 끝날 때까진 언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다들 학생들의 안위가 걸린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게.]잠시 후, 산동악가의 소가주가 악가의 무인들을 이끌고 대연무장에 나타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악연화가 앞으로 나서며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악연호는 그녀의 눈 밑에 그늘이 져 있음을 알아보았다.
“……본가의 가주님께서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늘 일정에 참가하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대신 가문의 무인들을 통솔해 창술 시범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무림의 선배님들과 동도들,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창왕이 참여하지 않는다는 말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실망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러나 곧 시작된 악가의 단체 창술 시범은 그런 실망을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우와…….”
“대단하다…….”
“방금 그거 뭐야? 악가에 저런 창술도 있었어?”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감탄하고 즐거워했다. 오대세가에 버금가는 힘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산동악가 고수들의 창술 시범은 그만큼 화려하고 박력이 넘쳤다.
“굉장하구나…….”
특히 목형우처럼 창을 다루는 학생들은 제일 앞줄에서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였다.
그때,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 놓았던 백수룡이 정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중얼거렸다.
“온다.”
이어서 염왕, 노군상, 여러 강사들이 같은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쐐애애애액!
대기를 찢어발기며 한줄기 유성이 날아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백수룡이 새벽에 본 유성과 다른 것이 있다면, 저것은 불길한 붉은 꼬리를 남기며 학생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한 자루 창이었다.
“감히!”
염왕과 백수룡이 동시에 뛰어올랐다. 염왕의 손에서 피어오른 화염이 순식간에 새의 형상을 갖췄고, 백수룡은 적월을 뽑아 들었다.
화르르륵!
염왕의 손에서 뻗어 나간 화염이 창을 휘감으려는 찰나였다.
“잠깐!”
백수룡은 날아오는 창의 중간에 무언가가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염왕에게 소리쳤다. 염왕 또한 그걸 보곤 황급히 화염을 거두었고, 그 대신 백수룡이 창대를 옆으로 쳐 냈다.
쩌어어엉!
건물 벽에 절반이 넘게 틀어박힌 창이 부르르 떨렸다. 적월과 부딪쳤음에도 반으로 잘리지 않은 것을 보니 평범한 무기는 아니었다.
“뭐, 뭐야?!”
“갑자기 웬 창이…….”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건물 벽에 틀어박힌 창으로 향했고.
창대의 중간에 꿰여 있는 머리가 핏물을 뚝뚝 흘리며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으아아아악!
꺄아아아악!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하는 가운데, 악연화를 비롯한 악가의 무인들은 경계태세를 취하며 다가갔다.
산동악가를 향해 누군가가 창을 던졌다. 이것은 악가에 대한 조롱이자 도전이었다.
“감히 어떤 자가……!”
그러나 꿰뚫린 머리의 정체를 확인한 악가의 무인들은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이가 속출했다. 사방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가, 가주님?”
“헛소리! 가주님의 수급일 리가 없다!”
“하지만 저 창은 분명 가주님의……!”
두 눈알이 뽑힌 채 고통으로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은, 십존이라 추앙받는 절세무인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입에는 피로 쓴 서찰이 하나 물려 있었다.
백수룡은 누구보다 먼저 다가가 그 서찰을 빼내 읽었다.
본교가 원하는 것은 청룡신협뿐이다. 놈을 내놓는다면, 다른 자들은 살 수 있을 것이다.
거칠게 휘갈겨 쓴 글씨에는 선명한 악의가 담겨 있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백수룡은 서찰을 구기며 차갑게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