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25
525화. 너희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
“윤회연옥진?”
위지열은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라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그 이름을 곱씹었다.
그는 혈교 팔대 가문의 가주였으나 평생 야장으로 살아온 사내였다. 혈교가 부리는 온갖 괴력난신에 관해선 모르는 게 더 많았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환영이라기엔 지나치게 정교했다.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과 지독한 유황 냄새, 극양지공을 익힌 그조차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지거늘.
이를 어찌 진법이라 할 수 있는가.
마치 다른 세상으로 옮겨온 듯하지 않은가?
“어르신. 우선 약부터 드시죠.”
백수룡은 가져온 내상약과 영약을 위지열에게 복용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신만 겨우 차렸을 뿐, 그의 몸은 엉망이었다.
“바로 화령신공을 운기하세요.”
“하지만 그러면 자네가…….”
“저 편하자고 하는 겁니다. 어서.”
“……알겠네.”
위지열은 군말없이 가부좌를 틀었다. 백수룡은 그의 명문혈에 손바닥을 대고 기를 불어넣었다.
산공독을 먹였는지 내공이 흐트러져 있었지만, 역천신공의 기운이 단숨에 산공독을 태워 버렸다.
‘그래도 단전을 부수진 않아서 천만다행이야.’
아마 위지열이 가진 가치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노령으로 약해진 육신에 단전까지 부서지면 목숨을 건사하기 힘드니, 일단 산공독으로 내공을 억눌러 두었으리라.
백수룡은 위지열이 운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준 후 곧바로 손을 뗐다. 동시에 주변 경계를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일대가 용암과 기암괴석이 가득한 지역으로 변한 후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덕분에 백수룡은 주변 환경을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었다.
‘사부들에게 들었던 모습과 같아.’
윤회연옥진.
혈교가 절세고수를 포획하기 위해 만들어 낸 비장의 무기.
과거에 네 사부들조차 끝내 이 진법을 뚫어 내지 못하고 혈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도 나름대로 온갖 진법을 다 겪어 보았다만…… 그것만큼 지랄 맞은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환영이라기보다는 정말 다른 세계로 들어간 기분이었지.
-느껴지는 모든 것이 달랐어. 몸이 평소보다 몇 배는 무거워지고, 감각이 멋대로 날뛰었다. 공력을 운용하기도 힘들었지.
-혹여 그 진법에 갇히게 된다면 필히 조심해야 한다. 마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그 안에서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극독을 마시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백수룡은 사부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떠올리며 조용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활짝 펼쳐진 기감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위지열이 최소한 소주천을 끝내고 원기를 다소 회복할 때까지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순간 마치 붓으로 그린 것처럼, 두 사내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공간에서 나타났다.
한 명은 핏빛 승복을 두른 대머리 거한, 다른 한 명은 허리춤과 등에 검을 다섯 자루나 찬 강퍅해 보이는 인상의 노인이었다.
그 중 대머리 거한이 커다란 두 손을 합장하며 말했다.
“명성이 자자한 청룡신협 시주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투전혈승(鬪戰血僧).
줄여서 혈승(血僧)이라고도 불리는 대마두였다.
한때 소림의 촉망받는 기재였으나, 호승심이 지나쳐 마공에까지 손을 댔다가 그걸 알게 된 동문 사형제를 무참히 살해하고 도망친 자였다.
당연히 소림사는 그를 파계하고 무림공적 명단에 올렸는데, 십팔나한의 추적을 끝내 뿌리치고 이십 년이 넘도록 종적이 묘연했다.
그리고 오늘, 혈승은 자신의 별호에 걸맞는 혈교의 장로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저놈. 검객이라 하지 않았나? 왜 검이 아니라 도를 들고 온 게야?”
그 옆의 까탈스러운 인상의 노인은 풍도검귀, 혈승과 마찬가지로 줄여서 검귀(劍鬼)라 불리는 전대의 마두였다.
보검에 대한 욕심이 남다른 자인데, 검을 차지하기 위해 상대를 죽이고 빼앗는 것으로 유명한 악인이었다.
혈승과 마찬가지로 무림공적이 되어 쫓기다가 종적을 감춘 것이 십여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는 허리춤과 등에 다섯 자루나 되는 보검을 가지고 다녔는데,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예기를 지니고 있었다.
“도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만…… 일단 그거라도 챙겨야겠구나.”
검귀는 청룡신협이 검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게 못마땅한 듯 보였다.
“너희는 혈교의 장로들인가?”
백수룡은 그들의 전신에서 사납게 들끓는 마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혈승이 껄껄 웃었고, 검귀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과연 무림십존이군. 시주께선 우리 둘을 동시에 마주하고도 여유만만하구려. 그것도 뒤에 지켜야 할 부상자까지 두고서 말이오.”
혈승이 혼자 앞으로 나섰다. 검귀는 자신까지 나설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구경했다.
“시주. 그것 아시오? 수십 년 전에 천하를 오시하던 절세고수 여럿이 이 진법 하나를 깨뜨리지 못하고 사로잡혔다 하더군. 산을 부수고 하늘을 가르는 신위를 떨치는 고수들이 고작 술법 하나를 깨지 못했단 것이오. 처음에는 소승도 믿지 않았는데…… 실제로 보니 대단하지 않소?”
소림에서 파계된 자가 아직도 스스로를 소승(小僧)이라 칭한다. 그 자체로 소림에 대한 기만이자 모욕. 그러나 혈승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조롱이 담긴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대장로에게 받은 지시는 무리하지 말고 시간을 끌라는 것이었소. 최소한의 피해로 청룡신협을 사로잡으라는 것이지. 그 덕에 시주는 거기에 느긋하게 서 있는 것이고.”
“…….”
“지금쯤 시주도 느끼고 있을 것이오. 이 안에 가득한 마기를. 호흡을 할수록 시주의 몸 안에는…….”
“닥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도중에 말이 끊겼음에도 혈승은 화를 내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면 그저 덩치 큰 인자한 스님이 따로 없었다.
“소승은 동자승일 때부터 선문답을 좋아했다오. 어디 한번 해 봅시다.”
물론 백수룡은 혈승과 선문답 따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때문에 곧바로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너희의 이번 계획에 사도도 포함되어 있나?”
“……!”
느긋하던 혈승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뒤에서 킬킬거리며 듣고 있던 검귀도 웃음을 멈추고 백수룡을 노려봤다.
“시주가 어째서 본교의 사도를 궁금해하는 것이오?”
“……함께 온 모양이군.”
상대의 반응이 곧 대답이었다. 백수룡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도 중 누군가가 이곳에 왔다. 그 말은 악가의 분가에 남겨진 사람들이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백수룡은 조금 더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놀랍군. 그렇소이다. 지금도 사도께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지. 어떻소? 이제 그만 투항하겠소?”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려는 혈승의 수작에, 백수룡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비웃음을 흘렸다.
“사도가 여길 왜 들어와? 마공을 익히지 못한 자들은 이곳에서 숨을 쉬는 게 독을 들이마시는 것과 다름없을 텐데, 굳이 마공을 익히지 않은 사도를 투입할 이유는 없지.”
“시주가 어떻게 그런 것을……? 설마……!”
당황해하던 혈승의 표정이 조금씩 경악으로 물들었다.
청룡신협의 말이 맞았다. 마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윤회연옥진 안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대장로는 절세고수라고 해도 기껏해야 반 시진을 버티면 다행일 거라고 했다. 그 이후에는 몸 안에 점점 마기가 축적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을 것이라고.
그런데 지금까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백수룡의 신색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평온했다.
설령 만독불침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 애초에 진법 안에 존재하는 마기는 단순히 독이라고 할 수 없는 기의 한 종류였다. 마공을 익히지 않은 무인들에게 치명적일 뿐.
때문에 마공을 익히지 않은 자라면 내공으로 끊임없이 마기를 태우며 밀어내야 했고, 그 과정이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청룡신협은 그런 모습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으하하하하! 시주도 마공을 익혔던 것이구려! 본교와 싸우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 온 정파의 신성이 마공을 익혔다니! 온 천하가 기만을 당했구나!”
쩌렁쩌렁한 웃음에 천지가 진동했다. 갑자기 발생한 지진에 그들이 딛고 선 기암괴석의 틈새로 흐르던 용암이 위로 튀어 올랐다.
백수룡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혈승을 도발했다.
“부러운가 보지? 누군 마공을 익혔다는 이유로 무림공적으로 찍혀서 쫓기다가 혈교까지 기어들어 갔는데. 나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자 웃음을 멈춘 혈승의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하찮은 도발인 줄 알지만 참기가 쉽지 않구려. 시주. 소승과 한번 겨루어 봅시다. 그대가 어떤 마공을 익혔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라오.”
혈승의 승복이 찢어질 것처럼 거칠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윤회연옥진의 공능은 외부세계로부터 단절하고 지형을 바꾸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공을 익힌 자들에게는 더 강한 힘을 공급하고, 그 흉성을 자극해 고통을 모르는 전사로 만든다. 혈교의 장로쯤 되는 자이니 참은 것이지, 지금 혈승은 청룡신협을 처죽이고 싶은 살심으로 가득했다.
“소승은 소림의 신공과 혈교의 마공을 접목시켜 그 위력을 더욱 배가시켰소이다.”
혈승은 두 발을 적당히 벌리고 왼 주먹은 중단 높이에서 앞으로 뻗고, 오른 주먹은 허리에 붙여 기수식을 취했다. 자세는 평범했으나 그의 전신에서 부드러운 무채색의 기파가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
천하에서 제일 정순하다 알려진 소림 무공의 바탕 위에 마공을 연성했다. 곧이어 혈승의 주먹을 검은 기류가 휘감더니, 이내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파가 휘몰아쳤다.
콰콰콰콰!
사납게 몰아치는 힘의 파편이 사방을 할퀴어 댔다. 그가 서 있는 바닥 주변으로 깊게 파인 상흔이 여럿 새겨졌다.
“시주. 부디 조심하시오. 그대를 실수로 때려죽이고 싶지는 않으니.”
더 이상 인자한 미소를 짓던 중은 없었다.
혈승은 흉악하고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히죽 웃었다.
“병신들.”
그를 마주한 백수룡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혈승의 신형이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바로 앞에서 나타날 때까지도 그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너희는 정말 하나도 바뀌지 않았구나.”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사부들을 사로잡아 뇌옥으로 처박은 혈교의 절진이 언젠가 자신에게 사용될지도 모른다고.
미리 예상했고, 대비하고 왔음에도 화가 났다.
인질을 잡아 자신을 이곳으로 끌어낸 혈교의 작태가.
이따위 비열한 방식으로 유인당해 무릎 꿇었을 사부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해서.
쩌어엉!
벼락처럼 뽑아 낸 적월로 혈승의 주먹을 쳐 냈다. 주먹에 담긴 거력이 대단했다. 전력으로 쳐 냈음에도 뒤로 몇 걸음 밀릴 정도였다.
“시주! 어서 마공을 꺼내시게!”
잔뜩 흥분한 혈승이 충혈된 눈으로 외치며 재차 주먹을 휘둘러 왔다. 두꺼운 주먹에 맺힌 맹렬한 기파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살이 찢어질 듯했다. 그 기파는 점점 더 강해졌다.
“고민 중인가? 이 주먹을 피했다간 뒤에 있는 배교자가 죽을 터인데.”
“…….”
백수룡의 등 뒤에는 위지열이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섣불리 피했다가는 위지열이 공격에 휘말릴 것이다. 그 순간 노인의 육신은 갈가리 찢어지리라.
백수룡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보여 주지.”
“으하하하! 이제야 제대로 겨루어 보겠군!”
혈승이 광소를 터트리며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악!
백수룡의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으며 끝에서부터 붉게 물들었다.
역천신공이 풀려 나오며 그를 짓누르던 모든 억압이 사라졌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활력이 넘쳤다. 윤회연옥진이 그를 더 이상 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여, 역천……!”
혈승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고, 그 주먹이 저절로 멈칫했다. 찰나였지만 억겁과 같은 순간이었다.
백수룡은 보석 같은 적안으로 혈승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요사스러운 눈동자와 마주한 혈승은 천적을 만난 짐승처럼 몸이 굳었고, 백수룡은 느긋하게 적월을 위로 들어 올렸다.
캬아아아아!
역천의 힘 안에서 혈천의 수라가 깨어났다.
순간 일대가 온통 피처럼 붉게 물들고, 칼을 든 수라의 형상이 나타나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그 가공할 살기가 그물처럼 혈승의 몸을 옭아맸다.
“사도의, 무공까지……!”
역천신공에 이어 수라혈천도까지.
혈승의 눈에 경악과 공포, 억울함 따위의 감정이 스쳤다.
상대가 익힌 무공이 저 둘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섣불리 덤벼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백수룡은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움찔대는 혈승에게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차라리 소림 무공에 집중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졌을 거야. 지금처럼 조잡한 무공 따위는 만들지 않았을 테니.”
“조잡……!”
혈승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강해지기 위해 마공을 익히고 사형제를 죽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쌓아온 무공을 부정당하는 것보다 더한 모욕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청룡신협의 말처럼 마공에 손을 대지 않고 소림에 남아 무공을 연마했다면, 자신이 죽인 사형제와 함께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평생 외면해 왔던 가능성이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서야 인정했다. 밀려드는 후회는 그 어떤 상처보다 고통스러웠다.
“나, 나는……!”
“변명할 상대는 지옥에 가서 찾아.”
백수룡은 싸늘한 표정 그대로 적월을 내리그었다.
촤아아아악!
혈승의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정확히 둘로 갈라졌다.
그의 마지막 표정은, 후회와 자책으로 점철돼 있었다.
푸화아아악!
뒤늦게 치솟는 피를 피해서 백수룡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머지 하나를 찾았으나, 검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도망쳤나.”
그러나 찾지 못할까 걱정하지는 않았다.
혈마안이 보석처럼 빛나며 술법 내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