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528
528화. 어느 쪽 같습니까?
“자네! 괜찮은…….”
백수룡에게 다가가던 위지열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무언가 이상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싸움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수룡의 무복에 핏물이 번졌고, 살아 있는 것처럼 날아다니는 검들은 기회만 생기면 그의 목을 물어뜯을 듯했다.
위지열이 멀쩡한 몸 상태였어도 감히 끼어들기 어려운 고수들의 싸움이었지만, 그는 백수룡에게 한 호흡이라도 벌어 주기 위해 은밀히 움직였다.
그는 손자의 은인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내걸 각오가 돼 있었다. 그렇게, 위지열이 사장로의 뒤쪽으로 멀리 돌아서 접근해 갈 때였다.
돌연 일갈을 터트린 사장로가 전력을 다해 검을 쏘아 내더니, 그대로 싸움이 끝나 버렸다. 아직 몸 상태가 온전치 않은 위지열은 충돌 속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듣지 못했다.
어쨌든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한 위지열은 빠르게 백수룡에게 다가갔다. 상처가 많으니 지혈이라도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안에서는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죽지 못한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였다. 분명 백수룡의 목소리가 분명한데, 소름 끼치도록 귓가에 선명히 파고들었다.
“……백 선생?”
위지열은 다시 한번 백수룡을 불러 보았으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몽롱하게 눈이 풀린 사장로가 두서없이 쏟아 내는 이야기만 가만히 들을 뿐이었다. 그를 내려보는 백수룡의 뒷모습이 위지열에게는 몹시 생경하면서도 익숙했다.
“설마…….”
노인의 기억은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혈교 팔대 가문의 수장으로 남부럽지 않던 위세를 떨치던 때.
그러나 그런 지위조차 아무 의미가 없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있었다. 혈교의 말단 교도와 장로들이 평등하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던 초월적 존재.
혈마(血魔) 앞에서 교도들은 지금의 사장로와 같은 표정을 짓곤 했다.
“그만두게!”
위지열은 달려가서 백수룡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아니, 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 강력한 반발력이 일어나 위지열을 멀리 튕겨 냈다.
퍼엉!
“커헉!”
위지열이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백수룡에게 목이 잡혀 있던 사장로의 몸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이미 숨이 끊긴 그의 얼굴은 극심한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
그러나 백수룡은 자신의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 듯,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보석 같은 적안이 별빛을 담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의식은 현실과 허상,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경계에 걸쳐 있었다.
이것은 나의 기억이며.
수많은 기억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한때 그는 천하를 피로 물들인 대악인이었으며, 혹세무민하는 사파의 무리를 홀로 처단한 협객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종교에 귀의해 평생 사찰을 벗어난 적 없는 고승이었으며, 또 다른 생에선 글줄 하나도 읽을 줄 모르고 살아간 촌부이기도 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삶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선인과 악인의 삶이 있었다.
이것이 역천의 운명이다.
나른하면서도 퇴폐적인 목소리였다. 조롱기가 섞인 숨결이 귓가를 희롱하는 듯했다. 백수룡은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혈마여. 이번에도 너인가.’
그러나 예전처럼 막연히 그 목소리에 홀린 듯 빠져들지는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만나지 않았던가.
오히려 백수룡은 차분하게 물었다.
‘너는 몇 번이나 윤회를 반복해 온 건가?’
그때,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위지열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당장 역천신공을 멈추게!”
백수룡에겐 그 목소리가 아주 멀고 희미했다. 거의 들리지 않았다.
반면, 혈마의 목소리는 귓가에 속삭이듯 친근하고 가까웠다.
점점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구나.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목소리는 그 사실이 기쁜 듯했다. 백수룡은 눈을 감고 그것에 집중했다.
이것 또한 혈마의 안배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백수룡은 더 이상 무조건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피하기만 해선 끝이 나지 않아.’
상대는 심연에 존재하는 괴물이다. 놈을 이해하고 상대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그 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도박이지만…….’
앞으로 혈마에게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언제라도 꼭 해야만 하는 도박이었다. 차라리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지금이 적기였다.
너는 나를 이해할 것이다. 언젠가, 머지않은 날에.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놈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목적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없애 버릴 방법도 찾을 수 있으리라. 백수룡은 목소리의 심연으로 더 깊게 침잠했다.
우우우우웅-!
윤회연옥의 세계가 백수룡의 의지에 공명했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뒤틀리며 온갖 심상을 구현해 냈다. 혈마가 보여 준 기억들, 전생의 이십칠호의 기억들이 기괴한 형상을 이루며 나타났다.
캬아아아아아!
끄아아아아악!
쓰러져 꿈틀대던 마귀들이 뭉쳐서 더 거대한 괴물이 되었고, 반투명한 귀신들이 나타나선 서로 물어뜯고 싸우며 난장을 피웠다. 단단했던 바닥이 진흙처럼 흐물흐물하게 변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상황에서 위지열이 백수룡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백 선생! 제발 정신 차리게!”
“…….”
백수룡은 여전히 허공에 떠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밤하늘의 별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위지열이 그를 향해 절규했다.
“천이를 잊었나! 원강이, 민이, 수혁이, 상웅이가 자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단 말일세!”
역천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야. 나와 함께 가겠느냐?
혈마의 달콤한 속삭임과 위지열의 아득한 절규가 뒤섞였다. 백수룡은 꿈꾸듯 몽롱한 기분으로 심연 속의 하늘을 들여다보았다. 혈마가 그토록 원하는 하늘을.
그리고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함께 하늘을 열지 않겠느냐?
“학관에서 애들이나 가르치면서 평화롭게, 잘 먹고 잘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인생의 목표라고, 혈교가 방해되니 전부 없애 버릴 거라고 하지 않았었나!”
이것은 중원의 하늘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괴력난신들이 난장을 피우던 윤회연옥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
백수룡의 몸에서 시작된 폭풍이 사방팔방으로 번져 나갔다.
강풍에 휩쓸린 괴력난신들이 먼지로 흩어져 사라졌다. 위지열은 멀리 날아가지 않기 위해 바닥에 엎드려서 간신히 버텼다.
폭풍이 겨우 잠잠해진 후, 윤회연옥은 아무것도 없는 완벽한 무(無)의 세계가 되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도, 지상의 것들도 모두 사라졌다.
동시에 백수룡이 감았던 눈을 떴다. 일순간 그의 눈에서 붉은 광망이 폭발했다. 그의 몸이 천천히 지상으로 하강했다.
“크윽…….”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위지열이 바닥에 반 토막 나 떨어진 검을 주워들었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위지열이 백수룡에게 검을 겨누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대답 여하에 따라서 그는 백수룡을 찌르리라고 결심했다.
만약 백수룡이 역천신공에게 잡아먹혀 혈마가 되었다면, 그도 누군가가 자신을 죽여 주길 바랄 테니까.
“대답하지 못할까! 너는 누구냐!”
위지열이 반 토막 난 검으로 위협하며 다가가는 순간.
“어느 쪽 같습니까?”
그가 웃으며 되물었다.
* * *
북서쪽을 바라보던 불사마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시작된 모양이군.”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윤회연옥진이 발동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죽은 팔장로 혈령자와 견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술법가이기도 했다.
“……청룡신협은 지금까지 본교의 장로를 여럿 해친 자입니다. 혹시 모르니 지원 병력을 보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귀살대주가 다가와 물었으나, 불사마존은 고개를 저었다.
“전대 혈마지존께서 만드신 술법이다. 설령 청룡신협이 그 안에서 장로들을 죽인다고 해도, 밖으로 빠져나올 방법은 없다.”
더구나 지금 청룡신협 곁에는 위지열이란 짐까지 있었다. 이렇게까지 유리한 상황에서 당할 만큼 삼장로와 사장로는 멍청한 자들이 아니었다.
“클클. 위지 가주가 아주 큰 역할을 했어.”
일사도의 명령으로 교에 숨어든 세작을 찾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사마존은 위지열을 주목했다.
갑자기 돌아온 위지가의 가주. 제대로 세작 훈련조차 받지 않은 늙은이에게서 수상한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사마존은 위지열의 지난 행적을 낱낱이 파헤쳤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으나, 그의 손자가 청룡신협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아냈을 때는 쾌재를 불렀다.
“아무리 본인이 입이 무거워도, 그와 만났던 모든 자들이 그렇지는 않지.”
하지만 모든 증거를 찾고도 한동안은 같잖은 연기에 속아 주며 기다려 주었다.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청룡신협을 끌어낼 기회가 올 때까지 인내했다.
그리하여 오늘, 혈교는 지난 수십 년 이래 가장 큰 수확을 얻을 것이다.
“덕분에 청룡신협을 잡게 되었으니, 돌아가면 위지 가주에게도 상을 줘야겠다. 평생 본교를 위해 무기를 만드는 영광을.”
징그럽게 웃은 불사마존은 고개를 돌려 악가의 분가를 바라봤다.
청룡학관과 주작학관, 악가의 무인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서고 있었으나, 불사마존의 눈에는 곧 무너질 모래성처럼 보였다.
그는 주홍빛 장포를 펄럭이며 오연히 이곳을 내려보는 염왕을 응시하며 히죽 웃었다.
“늙은 생강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청룡신협을 밖으로 끌어냈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불사마존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데려와라.”
잠시 후, 귀살대의 무인들이 사지가 결박되고 입에 재갈이 물린 사내를 끌고 왔다.
“읍읍!”
사내는 악가의 무인이었다. 몰래 분가를 빠져나가 바깥에 소식을 전하려다가 잡힌 것인데, 얼굴이 허옇게 공포에 질려 있었다.
“클클. 용기는 가상했다만 솜씨가 부족했구나. 본교의 눈을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불사마존은 허공섭물로 사내를 들어 올렸다. 사내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강호의 잡것들은 듣거라.”
육합전성이 분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백 년 넘게 마공으로 내공을 쌓아온 노괴는 목소리에 실린 힘만으로 적들을 겁에 질리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내 너희에게 특별히 자비를 베풀었거늘, 이것이 너희의 대답이란 말이냐?”
불사마존은 포획한 악가의 인질을 띄운 채로, 악가를 향해서 느긋하게 걸어갔다.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육합전성만이 울려 퍼졌다.
“너희가 노부의 호의를 이토록 무시하니 어쩔 수 없구나.”
불사마존은 보란 듯이 허공에 띄웠던 악가 무인을 자신의 옆으로 내렸다. 그러곤 거침없이 그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콰직!
“끄으윽……!”
발버둥 치던 악가 무인의 몸이 순식간에 푸석푸석하게 말라 갔다. 건장하던 사내의 몸이 목내이처럼 쪼그라들기까지는 반의반 각도 걸리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에서 생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어, 어찌 저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인단 말인가!”
“네놈들은 인간도 아니다! 인두겁을 쓴 마귀들이로구나!”
악가의 분가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충격을 받았는지 안색이 창백해진 자들도 있었다. 특히 아직 어린 학생들은 온몸을 바르르 떨거나 딸꾹질을 하기도 했다.
“클클.”
불사마존은 가죽만 남은 시신을 옆으로 내던지곤 손등으로 입가의 핏물을 훔쳤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분노한 시선들 속에 섞인 두려움을 즐겼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불사마존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그의 등 뒤에 있던 혈교의 군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