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One Star Instructor Master Baek RAW novel - Chapter 644
644화. 부탁한다
그대로 인세를 멸망시킬 것만 같았던 거대한 폭발이 가라앉고.
“나는 전능한 존재이니라.”
지옥의 무저갱처럼 깊고 거대한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온 혈마의 목소리가 지상의 인간들에게 널리 울려 퍼진 순간.
“커헉! 끄허어억!”
“우웨에엑!”
정사연합의 무인들 중 절반 이상이 왈칵 피를 토했다.
혈마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윤회연옥진의 끔찍한 마기에 공명하면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싸우면서 내상을 입은 자들, 심신의 수양이 얕은 자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심마에 든 자들이 눈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무릎을 꿇고 피를 토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마치 그토록 적대시했던 혈마를 경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미타불……. 정녕 하늘조차 두려워할 마(魔)가 태어났구나.”
불존이 짙은 탄식이 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승복은 본래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찢어지고 핏물에 물들었고, 전신에 두른 황금빛 기운도 많이 희미해져 있었다.
“반드시 죽여야 할 사특한 존재이외다. 이곳에 모인 무인들이 모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찬가지로 피투성이가 된 검성도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혈마를 노려보는 노검객의 눈에는 서슬 퍼런 예기가 맺혔다.
소림과 무당의 두 절세고수는 혈마를 쓰러뜨리기 위해 동귀어진마저 불사할 각오를 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들이 혈마에게 닿기 위해서는 먼저 넘어야 할 벽이 있었다.
검성이 그 상대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검마(劍魔)여.”
수십 년 전 혈교로 진군했던 무림맹을 절망에 빠뜨렸던 절세검객. 무림이 쉬쉬하며 인정하지 않았던 천하제일검이 소림과 무당의 최고수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혈마의 발아래 쓰러져 있는 자는 너와 같은 사도가 아니던가?”
“…….”
검성은 일사도에게서 작은 빈틈이나마 찾기 위해 일부러 도발했다.
하늘에서 추락한 혈마가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온 순간, 검성은 일사도의 기파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곤 그의 표정을 살폈다.
다른 혈교도들처럼 저 사특한 괴물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검성이 일사도의 눈동자에서 엿본 감정은 끔찍하리만치 깊은 고통이었다.
“저자는 주군에게 버림받은 모양이구나. 참으로 혈교도들답다. 오직 피와 살육만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충의가 있을 리 없으니. 너라고 저 사도와 다르겠느냐?”
“……닥쳐라.”
일사도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싸움을 시작한 후 첫 대화였다. 그는 죽은 곤륜 장문인의 검을 검성의 미간에 겨누며 말했다.
“지존께서 행하신 일이다. 천한 강호의 잡배들이 감히 그 뜻을 헤아리려 하는가.”
스산하게 내뱉는 말투와 달리, 일사도의 눈동자는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당신은 단 한 번도 혈마의 뜻에 의문을 품은 적이 없단 말입니까?”
불존의 질문에 일사도는 심장이 저밀 듯한 고통을 느꼈다.
몽혼약에 취한 것처럼 정신이 다소 몽롱하고 붕 뜬 와중에도, 그 감각만큼은 선명했다.
-이 순간, 오래 기억하도록 하자.
사곤의 마지막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꾸욱…….
일사도는 검을 단단히 쥐었다. 전장에서 불필요한 잡념에 빠져선 안 된다. 그것이 상대의 의도라면 더더욱.
“나는 지존의 충실한 검일 뿐. 검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묻지.”
“불허(不許).”
쩌어어어엉-!
검성은 섬광처럼 날아든 일사도의 검을 겨우 막아 냈다. 불존이 그를 도왔다. 소림과 무당의 최고수들이 단 한 명의 적을 상대로 힘겨운 사투를 이어 나갔다.
“큭! 그 말이 진심이라면, 어찌해서……!”
무당의 절세검객은 과거에 자신의 팔을 자른 적을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일사도의 검이 맹렬하게 몰아붙였지만, 피륙에 상처를 내고 피를 쏟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의 입을 막지는 못했다.
“너는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인가!”
“…….”
검성의 꾸짖음에도 일사도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알지 못했으니까.
왜 자신의 눈에서 불필요한 수분이 흘러내리는지, 심장에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불쑥불쑥 지존을 향해 불경스러운 충동이 치미는지.
그리고 어째서 지존의 발아래 쓰러져 있는 친우의 이름을 사호가 아니라, 사곤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부르고 있는지.
“……죽어라.”
그저 검을 휘둘러 모든 것을 베어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고통과 번뇌마저도. 일사도의 검을 감싼 검강의 빛이 점점 더 짙어졌다.
“아미타불. 시주의 말이 ‘죽여라’로 들리는 것은 저희가 늙어서 가는 귀가 먹어서일 테지요.”
“대사. 아무래도 저 중생과 오늘 끝장을 봐야 할 것 같소.”
콰콰콰콰콰-!
불존과 검성 또한 공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혈마를 상대하기 위해 아껴 둔 선천지기까지 전부 끌어 올렸다. 그래야만 할 정도로 혈교의 사도는 강대한 적이었다.
다른 사도들도 정사연합의 고수들에게 둘러싸여 흉험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전부 죽여 주마.”
캬아아아아!
삼사도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오대세가의 고수들을 도륙했다. 혈천의 수라가 그의 등 뒤에서 포효했다.
“이게 너희들의 빙백무인가?”
콰콰콰콰콰-!
이사도는 자신을 포위한 북해빙궁의 고수들을 얼어붙게 만들 만큼 강렬한 냉기의 폭풍을 불러왔다.
사도들 한 명 한 명이 정사연합의 최정예를 상대로 압도적인 신위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 주변으로 시체가 쌓일수록 그들의 몸에도 상처가 늘어났다.
“…….”
백수룡은 하늘 위에서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았다.
윤회연옥진이 지상에 펼쳐진 이후, 전황이 일방적으로 기울고 있었다. 일정 수준 이하의 무인은 진법의 영향 아래에서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진 탓이었다.
반면 마공을 익힌 혈교도들, 탈혼마인들의 공세는 진법의 영향으로 더욱 거세졌다. 거기에 술법진에서 나타나는 마물들까지 더해지자 혈교의 전력은 몇 배로 강성해졌다.
고요한 시선으로 인세를 눈에 담던 백수룡의 눈과 혈마의 눈이 마주쳤다.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가?”
아득한 하늘 위에서 지상을 내려보는 백수룡과 무저갱 같은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와 하늘을 올려보는 혈마.
둘의 거리는 까마득하게 멀었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혈마가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내게도 길고 오랜 시간이었다. 너와 이렇게 마주하는 날, 함께 개벽을 이루는 순간을 기다리고 바라 왔지.”
작은 속삭임이 들릴 만한 거리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백수룡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바로 옆에 있는 듯 선명하게 울렸다.
혈마는 기쁜 듯 미소 지었다. 그의 발아래에는 사곤이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사곤…….”
백수룡은 혈마가 일부러 사곤을 죽이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 아래에서 모든 것이 통제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살려 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필요한 일이었다. 하늘은 변덕스럽고 오만한 폭군이기에. 그토록 많은 준비와 제물, 그리고 네가 필요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백수룡의 머리 위에서는 여전히 하늘이 거대한 규모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지상에는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지상의 고함과 비명이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시신이 언덕을 이루고, 대지가 핏물을 머금었다.
그럼에도 백수룡은 여전히 고요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혈마여!”
그때 혈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상으로 추락했던 천무학관주가 피 칠갑을 하고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내게 더 알려다오! 역천의 힘! 네가 이룬 무극의 이치를!”
적발적안으로 변한 천무학관주가 탐욕스러운 얼굴로 혈마에게 덤벼들었다.
수많은 이들의 눈이 그를 지켜보았지만, 지금 천무학관주 진량의 눈에는 혈마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천무학관주?”
“저분이 어째서 혈마와 같은 적발적안의 모습으로…….”
“대체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정사연합의 혼란이 극에 달했다. 아군이라고 믿었던 천무학관주가 혈마와 같은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느낀 경악과 분노, 배신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고금에서 제일 괴이한 존재여! 더 보여다오! 너의 무공을! 그로 인해 나의 무극을 완성할 수 있도록!”
역천신공을 익힌 두 존재가 가까워지면서, 천지 간에 도사리고 있는 역천의 기운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잡스럽다고 하였다. 너의 쓸모는 이제 다 했으니, 이만 사라지거라.”
혈마가 손을 휘젓자 강대한 힘이 발생해 천무학관주를 날려 버렸다. 그러나 천무학관주는 끈질기고 고강했다. 앙천대소를 터트리며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혈마에게 덤벼들었다.
“으하하하하하하!”
백수룡은 그 어지러운 혼돈 속에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윤회연옥진이 펼쳐진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의 감각에 느껴졌다.
전장뿐만이 아니다.
전장의 뒤편에 있는 도시. 그곳에 있는 청룡학관의 학생들, 가족들, 그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인간들의 기가 느껴졌다.
힘겹게 호흡하는 사곤의 기운도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꺼질 듯 희미했다.
일호, 이호, 삼호가 겪는 혼란과 그들의 심장에 새겨진 술법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한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하고 확실했다.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무언가 한 꺼풀 벗어 던진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 눈을 뜬 백수룡이 중얼거렸다.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 없다면…… 차악을 택하는 게 옳은 거겠지.”
[수룡아.]창룡신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해 보이지만, 백수룡은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계획이 있어. 통할지 안 통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대로 그냥 당해 줄 수는 없잖아?”
가볍게 웃어 준 백수룡은 창룡신검의 검신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마지막 인사였다.
[……이것이 너의 선택인 것이냐. 그래. 마지막까지 내가 아는 백수룡답구나.]백수룡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학생들을 지켜 줘. 부탁할게.”
백수룡은 창룡신검을 허공으로 띄웠다. 이기어검이었다. 아득하게 발달한 기감이 단숨에 제자들이 있는 위치를 찾아냈고, 창룡신검을 그곳으로 날려 보냈다.
백수룡이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지는 창룡신검의 모습을 바라볼 때였다.
“……백수룡!”
저 아래에서 남궁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새 적들과 싸우고 왔는지 무복에 피가 흥건했다.
피 한 방울 튀지 못하게 하던 결벽증적인 성격을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도 급했던 모양이었다.
남궁수가 백수룡을 올려보며 외쳤다.
“거기서 꼼짝 말고 있도록! 내가 갈 때까지…….”
“남궁수.”
백수룡은 남궁수를 빤히 바라봤다. 벼락을 담은 금안이 분노와 자책, 일말의 두려움으로 서서히 물드는 것을 바라보며 그가 말을 맺었다.
“부탁한다.”
그 한마디 말이면 충분하리라.
콰아아아아아아아-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검이 보였다. 창룡신검과 달리 은은한 붉은빛을 띤 검신은 그 자체로 불길함이 가득했다.
혈교의 신물이자 역천의 기운을 머금은 마병(魔兵)이 하늘에 시뻘건 상처를 남기며 날아오고 있었다.
“비로소……!”
혈마가 희열에 떨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콰악!
백수룡은 스스로의 의지로 손을 뻗어 혈마검의 검파를 쥐었다.
그 순간, 윤회연옥진으로 변한 세상이 한 번 더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