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188
제188화
원래 신간척지의 폭력조직은 미국의 이탈리아 마피아처럼 차별받는 난민들의 해결사 혹은 자경조직에서 출발했다.
그러다 보니 출신성분을 엄격하게 따졌다.
가끔 한국인 기본소득자들도 가담하려고 오긴 했지만 끽해야 3차, 4차 하청조직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근데 이거 뭐냐? 웡처우람, 아니 한국인 왕조림(王曺林)으로 불러야 하나? 프로그램 모를 줄 알아? 대충 조직에서 3년 정도 썩으면 국적과 함께 내륙으로 불러서 경찰로 신분 세탁해준다?”
“그, 그건.”
쎄잉꺼는 왕조림의 눈에 볼펜을 박아버렸다.
눈알이 터지고 격렬한 고통에 왕조림은 몸을 데굴데굴 굴렀다.
조직의 보스인 체잉꺼조차도 쎄잉꺼의 광기에 눌려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였다.
쎄잉꺼는 도대체 어떻게 얻었는지 왕조림의 경찰 인사카드를 손에 넣었다.
노란 카드에는 경찰 정모를 쓴 왕조림의 모습과 그의 인적 사항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노란 카드는 한 장이 아니었다.
쎄잉꺼는 포커를 하는 것처럼 인사카드를 부채꼴처럼 펼치고 얼음장 같은 눈초리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노려봤다.
“아직 바늘이 더 남아있겠지. 경고한다. 무사히 짭새짓하다가 한국 시골에서 동네 순경 노릇이라도 하고 싶다면 그냥 조용히 있다가 가는 게 좋을 거야.”
사다우카가 왕조림의 사지를 발로 누르고 한 명은 두 손으로 왕조림의 얼굴을 잡고 고정했다. 쎄잉꺼는 발로 놈의 눈알에 박혀 있는 볼펜을 눌렀다.
빠드드득.
끔찍한 소리가 나면서 볼펜이 왕조림의 머리에 깊숙이 박혔다.
피가 바닥에 꼴꼴 흐르고 방안은 피비린내로 가득했지만, 방 안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난 말야. 웡만허이랑 달라. 내 비즈니스에 방해만 안 된다면 내 온몸에 바늘이 박혀도 상관없어. 니들도 잠복경찰 생활하다가 잘하다가 정복경찰 되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 거지 뭐. 근데 말이야.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내 돈이나 사업에 똥물을 튀겼다간.”
쎄잉꺼는 죽은 왕조림의 머리를 발로 톡톡 건드렸다.
“이 꼴이 되는 거다. 알았냐?”
체잉꺼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은 차렷 자세를 하고 ‘하이, 에잉쵕!’하고 군기가 바짝 들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쎄잉꺼는 급작스럽게 들어왔을 때처럼 나갈 때도 예측불허였다.
그는 왕조림의 경찰 인사카드를 노란 지전 뿌리듯 허공에 휙 뿌리고 체잉꺼의 도박사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사다우카는 여전히 진동 블레이드를 웅웅거리며 체잉꺼의 조직원들을 겨누고 있었다.
저 무시무시한 근접전의 달인들을 상대로 싸움을 걸만한 배짱을 가진 놈들은 없었다.
블레이드의 소리가 웅웅거리다가 사라졌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은 계속 머릿속에서 파리가 왱왱거리듯 진동 블레이드의 환청을 들었다.
체잉꺼는 덜덜 떨면서 천천히 왕조림의 경찰 인사카드를 주워들었다.
인사카드는 복사본이 아니라 원본이었고 경찰 내규로 정한 극비문서라고 아래위에 찍혀 있었다.
도대체 쎄잉꺼는 이 카드를 어떻게 손에 넣은 것일까? 이건 경찰청 인사국장이나 경찰청장 외에는 열람할 수 없는 인사카드였다.
“이, 이 새끼 정말 짭새였어. 어, 어떻게. 어떻게 짭새 놈들이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분명 이중삼중으로 체크 했는데?”
체잉꺼는 쎄잉꺼의 정보망에 완전히 기가 죽었다.
쎄잉꺼가 웡꺼보다 우위에 있는 게 있다면 바로 정보였다.
“뭐, 뭘 멍하니 있는 거야. 치, 치워.”
체잉꺼는 왕조림의 시체를 얼른 치우라며 손사래를 쳤다. 놈의 심복이 TV 화면 중계를 보며 말했다.
“혀, 형님. 그럼 어떻게 하죠? 아직 히든카드가 많이 남았는데.”
“시발 뭘 어쩌긴 어째. 쎄잉꺼 형님이 말한 대로 해야지. 로봇에 대한 공격을 중지해. 하지만…….”
체잉꺼는 제리가 가장 선두에 달리는 것과 웡조림의 피가 튄 배당표를 번갈아 바라보고 입맛을 다셨다.
그는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탐욕스러운 남자였다.
쎄잉꺼가 볼펜으로 손을 찍어서 경고했는데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큰돈을 벌 기회는 있어. 쎄잉꺼 형님도 한두 건은 눈감아 줄 거야. 진가구. 김용기에게 전해라. 계획대로 진행한다고.”
진가구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왕조림의 시체가 실려 나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체잉꺼는 진가구에게 지우개를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어이, 진가구! 정신 나갔냐!”
“예? 예, 형님! 뭐, 뭐라고 말씀하셨죠?”
체잉꺼는 욱신거리는 손에 마약성 진통제를 직접 놓으며 씩 웃었다.
“야, 시체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하얗게 질려 있어. 설마 너 바늘이냐?”
“아뇨, 설마요. 그냥, 저 형님이랑 친하게 지냈는데 바늘이라니 너무 충격적이라.”
체잉꺼는 진가구에게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했고 진가구는 냉큼 담배를 놈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줬다.
“하긴, 저 뚱땡이 새끼가 짭새였다니. 나도 충격이다. 시발 이젠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체잉꺼는 날카로운 눈으로 진가구의 반응을 훑었다.
이럴 때 보면 체잉꺼의 눈은 파충류와 비슷했다.
인간의 온기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다.
진가구는 침착하게 체잉꺼의 담뱃불을 붙이고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믿을 놈 어디 있습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아무튼 진가구. 김용기에게 계획대로 한다고 전해. 그놈하고 누구지?”
“예, 쌈로이, 아카라 등입니다. 제가 알아서 말해 놓겠습니다. 형님은 걱정 마십시오.”
“그래애, 역시 진가구야.”
체잉꺼는 일부러 피 묻은 손으로 진가구의 뺨을 어루만지고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청소 로봇이 핏자국을 정리하고 체잉꺼는 중계를 보면서 다시 흥을 끌어올렸다.
그 사이 진가구는 전화기를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체잉꺼의 사무실은 중화대루보다 폐선지구에서 가까웠다.
옥상에서 보면 무의도 폐선지구의 높다란 배 끄트머리가 난민지구의 텐트촌 너머로 보였다.
진가구는 옥상으로 올라와 전화기를 들었다. 제일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김용기였다.
“헤이, 브레이브. 제리 잘 나가네요.”
– 어? 어, 진가구.
“제4 체크포인트에서 대기하세요. 체잉꺼 형님은 계획대로 하신답니다.”
– 저, 정말로? 하지만 제리가 우승할 수도 있잖아? 그, 그럼 나는 그 돈으로 빚을 갚으면…….
“장난하나? 미친 새끼가. 아저씨 정신 못 차려?”
진가구는 갑자기 반말을 했다.
“어른 대접했더니 지가 아주 진짜 어른인 줄 아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물건 간수나 잘하고 일이나 잘해. 안 그럼 당신 죽어.”
– 하, 하지만…….
진가구는 김용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머리를 북북 손으로 긁다가 지갑을 꺼냈다.
치파오를 입은 예쁜 아가씨가 진가구에게 기대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시발, 내가 지금 남 걱정할 때냐.”
진가구는 지갑을 뒷주머니에 꽂아 넣고 건물 아래쪽에서 움직이는 체잉꺼 패거리를 바라봤다.
이제 캐논볼 레이스는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제리와 어빈은 여전히 선두를 유지하며 늪지대를 가장 먼저 돌파했고 체잉꺼 조직원들도 후반부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가구는 담배를 끄고 옥상에서 건너편 옥상으로 이동한 다음 케이블 다발 밑에 몸을 숨겼다.
이곳은 하도 인터넷 회선이나 무허가 통신회선이 밀집한 곳이라 무선 통신이 잘되지 않았다.
진가구는 케이블 다발 속에서 커다란 사랑방 캔디 깡통을 꺼내고는 깡통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든 위성전화를 노려봤다.
이 전화는 비상회선이었고 어지간한 비상사태가 아니면 건드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케이블 다발 중에 파란색과 은색의 케이블을 찾아 위성전화의 케이블 단자에 꽂았다.
띠리리리리리.
이 위성전화가 연결되는 회선은 딱 하나뿐이었다.
x6 달려라, 메로스. 친구의 의지와 함께.
– 여보세요. 진가구? 무슨 일이지?
진가구는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쎄잉꺼가 본청의 인사카드를 가지고 있어요.”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회사 안에 놈들의 첩자가 있습니다. 웡처우람이 죽었어요. 난 그 사람이 경찰인지도 몰랐는데.”
– 웡처우람? 왕조림이 죽었다고?
“시간이 없습니다. 심 부장님, 저 좀 이곳에서 빼주세요. 놈들이 빼돌린 인사카드가 한 장이 아니에요.”
심 부장이 수화기를 막고 누군가에게 뭐라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부장님, 나 죽어요. 한하린. 그 애도 같이 빼주시고요. 다, 당장 틸트로터를 불러주세요.”
– 진가구.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자네도 알다시피.
“시팔! 내가 죽는다니까! 쎼잉꺼가 볼펜으로 웡처우람의 눈알을 쑤셨어!”
진가구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주변 눈치를 살폈다.
이 옥상은 케이블 회선 정리용 로봇도 잘 올라오지 않는 곳이었고 웅웅 대는 에어컨과 냉장고 냉각기 소음 덕에 그의 목소리가 새어나가진 않았다.
– 그보다, 첩보는 없나?
“첩보 같은 소리 하네. 말해주면 당장 데리고 가실 겁니까? 저 강원도 깡촌의 순경이라도 좋아요. 제발, 제발. 저 이러다 죽어요.”
– 정보부터.
“방벽을 노리고 있는 건 확실한데 방법은 잘 모르겠어요. 쎄잉꺼가 뭐라고 말하긴 했는데…….”
– 녹음은? 녹음을 확인하면 되잖아?
“미쳤어요? 핸드폰도 그냥 통화만 되는 걸 쓴다고요. 그딴 걸 녹음했다간 난 끝장이에요.”
– 쓸만한 정보를 줘야 나도 널 빼줄 거 아니야!
진가구는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눌렀다.
“시발, 진짜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3년이에요. 3년이라고오……. 차라리 지뢰처리부대로 군대에 지원했다면 벌써 귀화 허가받고 내륙에서 살았을 거예요.”
– 지뢰처리부대? 그거 사망률이 얼마나 될 것 같냐?
“그러니까 차라리 그게 낫다는 거죠. 매일매일 나처럼 지뢰를 등에 지고 사는 건 아닐 테니까.”
– 아무튼 정보 없으면 널 빼낼 명분이 없어. 진가구. 제발 너를 도울 수 있게 나를 먼저 도와줘라.
진가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진가구는 잠입경찰이었다.
그는 3년 동안 4차 하청조직에서부터 굴러서 빅3 바로 밑에 있는 체잉꺼 조직에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그동안 진가구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마약을 하기도 하면서 체잉꺼의 신뢰를 쌓았다.
하지만 쎄잉꺼는 어떻게 손에 넣은 건지 잠입경찰의 인사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아까 쎼잉꺼가 보여준 노란 인사카드에 진가구의 이름이 없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진가구는 자꾸 쎄잉꺼가 자신을 쳐다보던 그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분명 쎄잉꺼는 뚱땡이 왕조림을 볼펜으로 쑤시기 전에 진가구를 먼저 쳐다봤다.
“동작…… 어쩌고였어요. 쎄잉꺼가 체잉꺼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무슨 로봇들을 가능한 한 많이 살리라나? 그 이상은 몰라요.”
– 동작…… 동작동 데이터 센터인가? 거기라면 그래. 놈들이 노릴만한 곳이지.
동작동에는 중앙 데이터 센터가 있었다.
그곳을 공격한다면 한순간에 행정망을 마비시킬 수 있다.
– 진가구, 좋아. 아주 수고했다. 조금만 더 수고해라.
“조금만 더 뭐라고요? 이봐요.”
– 조금만 더 기다려. 이번 건만 잘 되면 포상금도 높게 책정될 테고. 아무튼 기다려 봐.
진가구는 참지 않고 폭발했다.
“심 부장 이 개새끼야! 기다리긴 뭘 기다려! 경찰 인사카드를 쎄잉꺼가 쥐고 있다고!”
대답은 없었다.
심 부장은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진가구는 전화기를 쥐고 벽에 쾅쾅쾅 내리찍었다.
위성전화가 부서지고 진가구의 손에 플라스틱 파편이 박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안 그래도 진가구는 뺨에 왕조림의 피를 묻히고 있어서 무슨 악귀처럼 보였다.
그는 부서진 전화기를 노려보다가 사랑방 캔디 깡통에 넣었다.
깡통 안에는 만약을 위해 부식 처리하는 약품병이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