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104
103화 예정된 재앙 (3)
학질.
고대부터 있었고, ‘학을 떼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청나게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병이다.
현대에도 완벽한 해결책이 없어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이는 전염병.
이는 학질원충의 숙주가 모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전파 숙주가 아니므로 학질원충은 인간을 살려둘 이유가 없고.
모기를 매개로 전파되기 때문에 아무리 예방하려 해도 전염력이 높으니까.
그래서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이는 동물 2위가 바로 모기다.
1위는 같은 인간이고.
이런 이유로 말라리아 관련 연구는 노벨상 단골 소재다.
600년 뒤에도 확실한 치료제는 없을 정도로.
이 시대에 쓸 수 있는 치료제는 퀴닌.
근데 이거 원산지가 남아메리카다.
다행히 더 효과적이라는 약이 있는데 바로 아르테미신.
개똥쑥에 있는 어떤 성분이다.
하나 더 다행인 것이 개똥쑥은 매우 흔한 약재라는 점이다.
“차도를 보이고 있어. 역시 자네의 말이 맞았군.”
오랜만에 재회했을 땐 근심 가득했던 정화의 표정이 풀렸다.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었습니까?”
“탕약으로 만든 것은 효과가 거의 없었네.”
고온에 끓이면 아르테미신 성분이 파괴되나?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에 쓰인 대로 개똥쑥 한 움큼을 물에 담근 후 짜낸 즙을 마시게 하는 거였네.”
“술로 담근 건 효과가 별로 없었습니까?”
“마실 수가 없었네. 고열이 나고 있는데 어떻게 술을 먹이겠나.”
그렇게 말하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대가 가져온 개똥쑥으로 담근 술은 엄청난 인기일세.”
“왜 그럴까요?”
“믈라카 왕국에는 회회도(이슬람교도)가 많네. 술을 금지하지. 하지만 이건 약이지 않은가.”
“…….”
“덕분에 학질이 빠르게 잡히고 있네. 약을 꼬박꼬박 잘 먹거든. 이렇게 약을 좋아하는 환자들은 처음일세. 허허허.”
“그렇다면 상품으로 만들어도 될 것 같군요. 혹시라도 외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상점이 아니라 의원에 넘기는 방식으로요.”
“자네는 참 신기하단 말이야.”
“예?”
“나는 재물을 모으는 것과 백성을 위하는 건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자네는 백성을 위하면서 재물을 모으지 않는가.”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지금 내게 100억이 있다고 해도 스마트폰은 못 만든다.
반도체를 만들어내는 것부터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현대에서는 100만 원이면 이를 누릴 수 있다.
후추나 향신료도 그렇다.
현대에서는 매우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지만, 조선에서는 어지간한 거부도 누리기 힘든 사치다.
돈을 벌기 위해 연구하다 보면 다른 이의 삶을 윤택하게 해준다.
어찌 보면 현대인에게는 당연한 상식이 아닐까.
“그것이 제가 주장한 중상주의 방법입니다.”
“좋네. 나 역시도 상업을 중요하게 생각해. 믈라카 왕국만 해도 상업을 중시하여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말일세…….”
정화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쌓인 게 많았나 보다.
“상인들이 대부분 자네 같지 않아. 상업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상인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일세.”
“무슨 일 있었습니까?”
“내 앞에서는 엎드리지만, 농민이나 시골 사람에겐 자꾸 덤터기를 씌우고 고리대금을 하네.”
“회회교에서는 이자를 받는 걸 금지하지 않습니까?”
이자라는 개념은 가축이나 땅을 빌려주는 데서 시작되었다.
땅을 빌리면 곡식을 수확하고, 가축을 빌리면 새끼를 치면서 더 늘어난다.
하지만 돈을 심는다고 돈이 열리지는 않는다.
번식하지도 않고.
따라서 돈은 빌려줘도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이 시대의 철학이다.
그래서 힌두교나 기독교는 물론, 상업을 권장하는 이슬람교도 대부업을 죄악으로 생각한다.
“금지하지. 하지만 다른 명분으로 이자를 받아내네. 예를 들어 돈이나 집을 빌려주고 감사금이나 사례비, 혹은 소개비 명목으로 돈을 받는다거나.”
“저는 돈을 빌리면 이자를 받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그 돈으로 더 큰 돈을 벌 기회를 넘겨주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못 벌 수도 있지 않은가. 오히려 손해를 보거나 쉽게 낭비할 수도 있고.”
“그건 제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지요. 일단은 제 돈으로 돈을 더 많이 벌 기회를 놓친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를 기회비용이라고 부릅니다.”
“설령 자네 말이 옳다고 해도 이자가 너무 높아.”
“동의합니다.”
이자가 100%는 물론, 10,000%인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이런 걸 누가 빌리느냐.
농민들이 빌린다.
예를 들어 이자를 1(一)할로 했는데, 나중에 보니 10(十)할이 되어있다든가.
심지어는 1,000(千)할로 바뀌어 있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를 막기 위해 ‘一’이 아니라 ‘壹’이라고 쓰는 등 여러 대책을 쓰고 있지만, 농민들은 이를 잘 몰라서 크게 당하고는 한다.
문자를 몰라서 사기 계약에 당하기도 하고.
“그래서 제가 직접 돈을 빌려주거나 안전하게 보관해주는 은행을 만들까도 생각합니다.”
“자네가 한다면 믿을 수 있지.”
“다만 아직은 인재가 부족하고, 자금도 여유가 없는지라 바로 시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자네의 능력을 믿지만, 이왕이면 빨리해주게.”
정화는 깊은 의미를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시 상인들을 탄압할 수밖에 없게 될 테니.”
***
정화가 말라리아와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이.
나는 믈라카 술탄국의 술탄을 만나러 갔다.
상업 중시 국가인 만큼 조용히 거래만 하다 가고 싶은데.
명색이 왕이다 보니 그런 게 안 된다.
대만 국왕이라는 칭호는 그리 값어치가 없다.
하지만 명나라의 번왕이란 이름값은 매우 무겁고, 해적왕 진조의를 끝장낸 용왕이라는 이름값은 매우 높다.
아유타야와 마자파힛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친명 외교가 중요하고.
계속해서 해적들을 척결하려는 믈라카로서는 해적 소탕의 상징인 용왕을 가만히 놀려둘 수 없다.
“어서 오시구려. 우리나라에 잘 오셨소.”
“반갑습니다. 대만 국왕 강해인입니다.”
믈라카 술탄국의 술탄은 매우 반가운 표정이었다.
나 역시도 마주 웃어주었다.
다만 허리나 목을 숙이지는 않았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예법이다.
명나라의 내번왕이 된 이상, 내가 고개를 숙여도 되는 이는 영락제뿐이니까.
“나는 대명어를 모르니 이제부터는 역관을 통해 말하겠소.”
“조왜어라면 저도 할 줄 아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마자파힛 제국의 위세가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다고는 해도, 남해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는 조왜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대제국을 건설했으니까.
“정말 그렇소?”
“전문적인 용어는 모르지만, 기초 회화는 할 수 있습니다.”
“오오. 정말이구려.”
믈라카 술탄은 조왜어로 살짝 시험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 때부터 기초 문법과 회화는 할 수 있었다.
환생하고 나서는 당연히 까먹었는데, 공부하니까 다시 기억이 새록새록 나더라.
게다가 말레이시아어와 인도네시아어, 심지어 대만 원주민의 대만 제어까지 같은 계통의 언어라서 공부하기도 쉽다.
이쪽 계통 표준어는 조왜어.
그만큼 마자파힛 제국의 위세가 강력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대월어는 다르지만, 참파어도 이쪽 계통이다.
“믈라카에 와보니 어떠한가?”
“무척 좋습니다. 대만국도 이처럼 번영하기를 소망합니다.”
“내 듣기론 라자 나가에게 뛰어난 안목과 혜안이 있다고 들었소만…… 혹여 이상한 점은 없던가?”
라자는 왕, 나가는 용이라는 뜻.
즉, 용왕이다.
이제 곧 갈 나라인 한타와디 왕국의 왕 라자다릿의 라자도 왕이라는 의미.
위대한 라자는 마하라자라고 부르는데 대왕이라는 뜻이다.
“그렇군요. 저는 믈라카 술탄국의 국교가 회회교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힌두교의 세가 강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음? 나는 술탄이 아니라 왕일세. 또한, 무슬림이 아닌 힌두교도일세.”
“네?”
출생의 비밀을 들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만약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면 그대로 뱉어버렸지 않았을까.
“이거 참 유감입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군요.”
“하하하. 괜찮네. 안 그래도 이슬람교로 개종할 생각이었으니.”
왕의 파격적인 발언에도 양옆에 있던 신하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이미 결정된 사항인 듯싶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왕국의 방침을 생각하면 이슬람교가 국익에 더 도움이 되니까.”
중동 상인들이 향신료를 찾아 이 믈라카 해협을 자주 통과하곤 한다.
이슬람교는 상업에 호의적인 얼마 안 되는 종교이기도 하고.
그러니 당연히 더 도움이 되겠지.
“그래도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3년 뒤에 결혼하기로 약속한 부인이 파사이의 공주일세.”
파사이는 필리핀 마닐라 인근의 왕국이다.
국교는 이슬람교.
이슬람교도와 결혼하려면 배우자가 개종해야 하는 만큼, 명분으로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었다.
국교를 바꾸겠다는 것도 아니고, 왕이 결혼하고 싶다는데.
“남해에서는 이슬람교의 교세가 점차 강해지는군요. 작년에는 술루 술탄국이 건국되기도 했고요.”
베트남 남쪽, 싱가포르 동쪽, 자바섬 북쪽에 있는 큰 섬, 보르네오섬.
보르네오섬과 필리핀 사이의 바다를 ‘술루해’라고 한다.
술루 술탄국은 술루해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나라.
본래는 마자파힛 제국의 신하국이었으나, 아랍인 탐험가 샤리프 울 하심이 파라미술리 공주와 결혼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독립했다.
선왕인 라자 바긴다는 딸밖에 없었고, 샤리프 울 하심은 무함마드의 후손인 하심 가문의 사람이었던 덕이다.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어떤 종교가 가장 현실적이고 국익에 도움이 될지는 분명하니까. 그러고 보니 용왕은 유학자라고 했나?”
“유학자이긴 합니다만, 유교인은 아닙니다. 저는 어떤 종교든 다 가치 있고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왕이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종교인은 항상 다툰단 말이야.”
“그렇긴 하죠.”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핵무기를 겨누고 으르렁대는 거 보면 진짜 웃을 일이 아니다.
어쩌면 창해 주식 상단은 탄생 시점부터 거대한 폭탄을 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명나라의 힘이 강력하니까 질서를 잡고 있지만 말이다.
“용왕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좋겠다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모든 종교를 다 중요하게 생각하니까요.”
“하하하. 그렇다면 그대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는 것도 재밌을지도 모르겠군.”
“종교……라고 하기엔 어렵습니다만, 나름의 원칙을 세우고 있습니다.”
“어떤 건가?”
“평등, 황금률, 권리와 의무, 사회 계약 등이지요.”
이것을 정리한 것이 십계명이다.
대만국은 물론 창해 주식 상단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
“어려운 말이구먼. 다른 건 알 것 같은데 황금률은 무엇인가?”
“유학식으로 말하면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 되겠군요.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슬람교나 힌두교에도 그런 말이 있지.”
사실 거의 모든 종교나 문화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규칙이다.
하지만 세상은 가혹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남들이 싫어하거나, 내가 싫어하는 걸 남들이 좋아하는 예가 많으니까.
나는 상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사대부들은 보통 상업을 싫어하고.
나는 비교하는 거나 오지랖을 싫어하는데, 이걸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덕분에 인생이 고달프다.
“원칙은 훌륭하나, 왕이 원한다고 해서 백성이 따르는 것은 아닐세. 재앙을 피하고 싶다면, 라자 나가도 미리 대비하는 걸 추천해 드리오.”
불안하게 자꾸 왜 그래.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어쩌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경험적으로 안다.
일어날 확률이 있는 일은 결국 일어나더라.
그것이 안 좋은 일이라면, 매우 희박한 확률이라도 반드시 일어난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내가 굴러다니는 걸 보며 재미있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언 감사합니다. 명심하지요.”
“하하하. 귀한 손님이 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내 그대를 위해 연회를 준비했네.”
“감사히 받지요.”
***
“…….”
연회는 재미없었다.
아니, 실망했다.
영화 이나 기타 중동 영화에서 나오듯이 이슬람의 연회에는 밸리 댄서들이 매우 섹시한 옷을 입고 관능적인 춤을 출 거라 기대했는데.
어쩌면 내 망가진 도파민 체계도 만족시켜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였으나…… 그딴 거 없었다.
전통 음악이 울려 퍼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눈다.
이게 끝이었다.
심지어 술도 마시지 않는다.
대체 뭔 재미지?
중대장은 너희에게 실망했다.
“라자 나가.”
“말씀하세요.”
“그러고 보니 전에 제독 정화가 이런 말을 하더군. ‘강해인이 있었다면 기발한 방법으로 해결해줬을 텐데.’라고.”
“……아니요. 기발한 방법이라는 건 항상 튀어나오는 게 아닙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귀찮을 것 같은 느낌이다.
미리 피하자.
“그래도 기왕 왔으니, 한번 살펴보기라도 함이 어떠한가?”
“제가 곧 한타와디 왕국으로 떠나야 해서요.”
“잘만 해결된다면, 앞으로 100년 동안 창해 주식 상단에는 관세를 면제해 주겠네.”
“알라후 아크바르.”
브라흐마와 알라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무슨 문제입니까?”
“이슬람 상인과 힌두교 상인이 주석 채취권을 두고 부딪혔는데…….”
아. 썩을.
종교 문제는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잘못 건드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