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r is too good at sailing RAW novel - Chapter 126
125화 만악의 근원 (3)
“아이고 힘들다.”
오늘도 힘든 타향살이.
아니, 타궁살이를 하고 돌아왔다.
보통 나 정도 위치에 오른 사람은 한마디 대충 던져주면 다들 선문답으로 알아듣고, 알아서 좋게 해석해 주던데.
어떻게 된 게 내 주변에는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밖에 없는 건지.
“고생하셨습니다. 전하.”
이소군과 다른 이들이 입구에서부터 맞이해주었다.
현관문이 아니라 대문 입구.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지만, 이런 소소한 예의를 보고 내일도 다시 일할 기운을 얻는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다음에 올 때 치킨이라도 사 들고 오고 싶네.
“전하야.”
무함마드가 반갑게 맞이하다가 의문이 떠올랐나 보다.
조금 전까지 질문 세례를 받았는데 집에서도 받아야 하나.
“왜?”
“전하는 왕이잖아.”
“그렇지.”
“근데 왜 말단 선원보다 열심히 일해? 그것도 인부처럼.”
“인부 맞아. 황제 폐하께 고용된 고오급 인부지.”
이상할 일은 아니다.
한국에서나 CEO가 사장님이지, 미국에서는 대주주나 이사회에 고용된 노동자니까.
그래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더라도 배당만큼은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다.
근데 한국에서는 왜 창업자들이 주식 시장에 상장해놓고 지가 회사의 주인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상장하는 순간 회사의 주인은 주주인데 말이다.
그래서 전생에 내 꿈 중 하나가 주총꾼이었다.
주주총회꾼 말고.
서부 개척 시대 총으로 주식을 빼앗고 다녔던 리얼 주총꾼.
“근데 전하는 왕이기도 하잖아.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가 있어?”
“있지.”
“왜?”
“이게 뭐냐?”
주머니에 있던 은자를 꺼냈다.
“은자지.”
“은자는 화폐지?”
“그렇지.”
“대명의 화폐는 남해 곳곳에서 쓰이고.”
심지어 일본도 명나라에서 화폐를 받아다 쓴다고 한다.
영락전이라나.
한마디로 명나라의 화폐는 이 시대의 기축통화다.
“물물 교환이나 현물로 교환하는 거 말고, 이렇게 화폐로 거래하는 질서를 화폐 경제 제도라고 해.”
영어를 안 쓰니까 힘들다.
시스템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
“그리고 화폐 경제 제도는 태생부터 사기다.”
“예?”
“그렇습니까?”
내 말 한마디에 다들 깜짝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내가 헛소리를 많이 하고 약을 팔 때가 많아서 그렇지, 돈에 진심이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으니까.
“근데 이제 좀 들어가면 안 될까?”
“안으로 드세요. 짐은 저에게 주시고요.”
“고마워.”
이소군에게 짐을 넘겨주고 별채로 이동했다.
뒷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인지 다들 따라왔다.
무함마드 이 자식.
평소에는 일 시킨다고 인사만 하고 도망가면서.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다.
별채로 들어가니, 이미 더운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세수하고 손을 씻었다.
목욕은 저녁 먹고 나서 해야지.
“화폐가 사기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데, 고새를 못 참고 무함마드가 물었다.
처음 봤을 때는 다들 돈을 그리 깊이 생각하는 것 같지 않더니만.
이제 돈맛을 봐서 그런지, 돈을 많이 벌어봐서 그런지 생각이 바뀐 것 같다.
긍정적인 반응이라 생각한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돈도 벌어본 놈이 잘 번다.
상단에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내 주머니도 채워질 테고.
“봐봐. 화폐는 없어지나?”
“마모되기는 하잖아.”
“그럼 화폐가 없어지는 속도가 빠를까, 새로 만들어지는 속도가 빠를까?”
“은광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은자를 예시로 들었지만, 보통은 구리로 만든 동전이나 철로 만든 철전을 쓰잖아.”
“아, 그러네.”
게다가 지금 일본에서는 열심히 은광을 개발하고 있다.
대마도에서도 하고 있고, 이와미 은광도 모리미인가 요리미인가한테 채굴권을 받아서 개발에 들어갔고.
곧 은이 쏟아지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화폐를 만든다고 해서 그게 전부 돌고 도는 건 아니잖아. 부잣집 창고에 박혀 있을 수도 있지. 곡식처럼 은이 썩는 것도 아니니.”
“정답이야.”
“응?”
“경제가 잘 돌아가면 화폐도 잘 돌아간다. 별문제 없지. 근데 어느 순간 돈이 안 돌아. 부잣집 창고 속에 잘 모셔져 있느라고.”
아무리 화폐를 많이 발행해도, 시중에 돌아다니는 화폐가 많지 않은 이유다.
그렇다고 무제한으로 찍어낼 수도 없다.
이 시대의 화폐는 금속 화폐니까.
아까 파사이 술탄국의 조정에서 걱정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금이나 은이 쭉 빠져나가면 공급자와 소비자, 상품이 있어도 거래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돈이 없어서 물물 교환으로 해야 하니까.
화폐량의 부족으로 경기 둔화나 경기 침체가 일어나는 것이다.
“화폐의 양은 점점 늘어나는데, 정작 돌아다니는 화폐는 적어.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화폐의 가치가 오르려나?”
“하지만 쌀 같은 물건의 생산량도 점점 늘어나잖아?”
“가끔 전하의 말은 너무 어려워. 쉽게 설명해주면 안 될까?”
나도 그러고 싶다.
근데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스태그플레이션을 대체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나도 답답해.
“쉽게 말할게. 현재를 기준으로 매년 평균 10분의 4리만큼의 물가 상승이 일어난다. 그만큼 화폐의 가치가 녹는다고 봐도 된다.”
0.04%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고 보면 된다.
현대에서는 매년 2% 정도의 인플레이션을 이상적으로 보는데, 그건 생산량이 뒷받침되고 지폐가 유통되기 시작했을 때나 할 수 있는 이야기고.
“대표적으로 은을 봐봐. 원래 은자 한 냥은 동전 1000문이었어. 근데 지금은 1200문에서 1300문 정도 하잖아.”
“은자도 화폐고, 동전도 화폐잖아?”
“동전이 더 본래 의미의 화폐에 가깝고, 은은 귀금속에 가깝지.”
내 주변에서는 개나 소나 은자를 쓰니까 흔해 보이는데, 은자는 진짜 고액권 화폐다.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미안하다. 널 이해 못 시키는 걸 보면, 나도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 말이 떠오르네.
서울대 교수들 수준 정말 낮다고.
어떻게 나를 가르치는 데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느냐고.
내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서울대생이 익명의 서울대 게시판에 쓴 글이다.
나는 해양대학교 나왔다.
“요점만 말할게. 화폐라는 건 태생부터 가치가 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어.”
“왜?”
“그냥 외워.”
주입식이다.
주입식 교육이야말로 가장 우수한 교육 체계다.
일단 지식을 욱여넣고, 깨달은 놈만 골라서 쓰면 되는 거지.
“따라서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보다 내 수입이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빨라야 해.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1년에 10분의 4리(0.04%) 늘리는 정도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 속도가 미친 듯이 빨라지는 시점이 온다.”
장영실이 내 밑에서 열심히 배워서 증기기관을 만들었다면, 그 시대가 훨씬 빨리 왔을 텐데.
상관없다.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으면 집단지성을 믿고 단체로 갈아버리면 개중에서 훌륭한 일개미가 나와서 만들어 줄 거다.
“그때가 오면 지옥이 되는 거야?”
“그건 아니지. 임금도 빠르게 올라갈 테니까.”
“뭐가 문제야?”
“일해서 버는 임금, 그러니까 노동 소득이 돈을 굴려서 얻는 이득인 자본 소득을 따라갈 수 없어진다.”
“지금도 그렇잖아?”
“지금은 선녀라니까.”
지금은 다 같이 가난한 사회다 보니 크게 티가 안 난다.
‘조선 부자의 엄청난 사치!’라고 해봐야 고기에 후추를 넣어서 먹는 정도니까.
“따라서 그때가 오기 전에 지금 바짝 벌어놔야 한다.”
“그때가 언제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50년 내로는 오지 않을까 싶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까?”
“‘50년 내’라고 했다. 10년 뒤에 올 수도 있다는 뜻이야.”
자본주의는 자본 수익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노동 수익은 보장해주지 않는다.
대체 불가능한 인재들의 노동을 제외하면 말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지만.
문명을 극도로 발전시킨 원동력이지만.
이면을 까뒤집고 보면 자본주의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다.
“근데 전하는 왕이잖아. 돈도 많고. 그런데 뭐가 그렇게 급한 거야?”
“너희는 물론, 창해 주식 상단의 모든 고용인들과 백성들까지 부자가 되어야 하니까.”
“왜?”
“그래야 대명과 조선에서 생각을 바꿀 거 아니냐.”
게다가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나면 아무리 영락제라도 나를 죽이기 힘들어진다.
영락제뿐만 아니라 뒤를 이은 황제들도 나를 적으로 돌리기 껄끄러워지겠지.
민심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테니까.
“그런 거니까 다들 열심히 일해라. 때가 되면 3차 영끌 보여준다.”
“1차는 창해 주식 상단을 설립한 거였고, 2차 영끌도 했었어?”
“몇 년 안에 한다.”
“뭘?”
“배 타고 구라파에 간다고 했잖아.”
유럽으로 향하는 신항로 개척.
아마 그때가 되면 확실히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세계의 역사를 바꿨다고.
***
뭔가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댔지만,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
믈라카에서는 인간의 광기를 과소평가해서 크게 데였는데.
다시는 방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또다시 경솔하게 혓바닥을 놀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화상들을 죽여라!”
“부자들을 잡아라!”
이 시대의 사람들은 한국인들처럼 자본주의 돼지들을 보며, 풀 죽은 시바견처럼 ‘호에엥. 세상이 나빠요!’라고 징징대지 않았다.
대신 죽창을 들고 일어났다.
파사이 술탄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최초로 지배층이 이슬람교도로 이루어진 나라.
하지만 지배층이 이슬람교도인 나라라고 해도, 백성들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자파힛 제국의 영향으로 힌두교도가 많다.
따라서 돼지기름으로 만든 연지를 팔았다고 해도 권력자들만 분개할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순진했다.
“저놈들이 우리의 딸과 땅을 뺏어간 돼지들이다!”
“저들이 먹이! 우리는 사냥꾼!”
이슬람교를 믿는 귀족들은 자기 백성들을 빠르게 선동했다.
화상과 외국 부자들이 너희의 딸과 땅을 뺏어갔다고.
믈라카 왕국과 마찬가지로 파사이 술탄국도 거의 도시 국가 수준.
나중에 아체 술탄국에 흡수되면서 급격하게 세력을 불리지만 그건 100년 뒤의 일이다.
지금은 선동을 도시 내에서만 하면 되기에, 분노는 빠르게 전염되었다.
“죽창을 들어라! 녀석들도 찔리면 죽는다는 걸 알려줘라!”
“화인들은 개짓거리를 해도 죽을 거라는 위기의식이 없으니까 예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피도 붉다는 것을 알려주자!”
동남아시아에서 화교는, 유럽에서 유대인 포지션.
‘일부’ 악덕 화교 상인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은 악착같이 열심히 일하는 것뿐인데도 미움을 받는다.
벵골 술탄국은 잘 모르겠고, 한타와디에서도 화상들이 상당히 ‘활약’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러다 계속 꼬이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용왕 전하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정직하게 사고판 죄밖에 없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믈라카의 화상들처럼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왜 나한테 몰려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