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day when the tagger goes blind RAW novel - Chapter 3
3화
“사람이 오면 호랭이 네가 나서서 겁을 주고, 고라니는 울면서 흉흉한 분위기를 만들고. 혹시 모르니까 겨울나려고 준비해 둔 도토리도 던져 주면서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 경고해 주고.”
떠나면서 할 말은 아껴둔 보따리 풀듯이 많았다. 산영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굽혀가며 일러두고도 뒷간에 가서 볼일 보지 못한 낯이었다. 딱히 고라니가 울지 않아도 이미 새까만 옥령산의 초입은 사람의 발길을 막고 있었다. 꾀가 많은 짐승의 우두머리는 이미 다른 산으로 떠난 지 오래였고, 옥령산에 남은 것은 의리를 지키는 짐승과 이도 저도 성가신 무리뿐이었다.
하나 산영의 전부였다. 산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하늘로 오를 두레박을 끄집어내렸다. 평소 사람이 발견할 수 없는 깊은 굴속에 숨겨두었다가 이처럼 일이 생기면 찾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여럿이 있지만 옥령산 부근의 신령들은 두레박을 가장 선호했다.
옥령산 주변의 산도 고만고만한 것이 사람들은 이름조차 모르는 산이 태반이었다. 그런 조막만 한 산을 지키는 신령들은 거창한 방법,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방법을 꺼렸다. 우러러볼 사람도 없을뿐더러 괜히 자리를 비우는 것을 남한테 일러주는 꼴만 되니 말이다.
하늘에서 신령을 위해 나누어준 두레박은 하늘 도깨비와 연결되어 있었다. 엉덩이를 두레박에 딱 붙이고 앉아 세 번 잡아당기면 올려달라는 신호였고 두 번 당기면 내려달라는 신호였다.
하늘 도깨비는 몸집이 아가별만큼 컸다. 산영이 아무리 고개를 뒤로 젖혀도 하늘 도깨비의 생김새를 볼 수 없음이었다. 하늘 도깨비는 구름에 묶인 두레박을 관리하고 신령이나 귀한 땅의 손님이 하늘로 오를 수 있도록 줄을 끌어 올려주었다.
신령은 구태여 따지자면 땅보다 하늘의 사람이었다. 하늘의 기운이 탁하면 신령들도 제힘을 쓰지 못하고, 하늘의 기운이 맑으면 신령들도 산삼 먹은 것처럼 날아다녔다.
본디 하늘의 기운이라는 것은 까마득한 윗분들의 사정이라지만 천제가 잠들고부터는 아랫것들도 그날 그날의 날씨로 대략 알아맞힐 수가 있었다.
까만 먹구름이 몰려온다는 것은 윗분들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이고, 일곱 색의 옥무지개를 보낸다는 것은 하늘 잔치가 열린다는 것이고, 유독 볕이 따가운 것은 윗분들의 눈이 주시하고 있는 곳이렷다.
비장한 각오를 다진 산영의 팔이 두레박 줄을 세 번 잡아당겼다. 한 번 당길 때는 잠잠하고 두 번 당길 때는 움찔하더니 세 번 당길 즈음에는 두레박이 승천하기 시작했다. 잽싸게 두레박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산영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옥령산의 식구들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와 있지 말구, 어여 들어가.”
산영은 배웅 나온 짐승들을 내려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무꾼도 나무꾼이지만 이 틈을 노려 사냥꾼이 올지도 모른다. 저기서 태평하게 앉아 있는 토끼의 가죽을 한번 벗겨보자고 콧노래를 부르며 올 터였다. 아무리 호랑이가 지켜준다고 해도 호랑이는 한 마리고 지킬 것들은 수백 마리였다. 산영처럼 일일이 신경 써줄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산영의 흰 옷자락이 바람에 너풀거리는 도중에도 옥령산 식구들의 배웅은 끝이 나질 않았다. 가까스로 불길에서 살아남은 제비가 부리에 보자기를 물어 가져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올해도 풍작이 되길 바란다며 밥이나 지짐 따위를 두고 가는데, 산영이 심심할 때 그것을 한두 개 집어먹는 것을 알고서 챙기는 것이었다.
“아이고, 무겁게시리!”
산머리에 걸린 노란 달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였다. 산영은 날개 힘이 빠져가는 제비에게서 재빠르게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그래도 저렇게 자신을 위하는 옥령산 식구들을 보면 불길이 대수냐 싶었다. 짠 바닷물이 옥령산을 뒤덮어도 건져낼 것 같은 용기가 샘솟았다.
산영은 한쪽 손에 두레박 줄을 꼭 붙들고서 소리쳤다.
“달포면 된다! 달포면!”
이름난 산의 주인들이 강한 것은 하늘에서부터 힘을 얻어왔기 때문이다. 비실비실하던 신령들도 하늘만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기운이 팔팔 넘치곤 했으니. 무론 산영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으나 오늘날까지 본체만체한 것은 외로움 때문이었다.
산영은 날 때부터 혼자였다. 신령끼리 모여서 떠들고 하는 자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지 않은 것이 어느덧 수십 년이 넘었다. 다들 옥령산에 지극정성인 산영을 보고 오지랖이라며 놀려대고 신령이 되기 전에는 고작 빗방울이었냐며 조롱했다.
산영이 모욕감을 느끼고 옥령산에서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 모르며 보낸 건 아니지만 미움받으면서 꾸역꾸역 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늘로 올라가면 그러한 신령이 수두룩한 것을, 옥령산을 나름대로 잘 가꾸고 있다고 자신한 산영은 올라가 볼 생각조차 안 한 터였다.
“내가 어리석었지.”
호랑이 열 마리는 거느리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두세 마리 정도는 거느릴 힘이 필요했다. 이 또한 옥령산 붙박이의 극성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산영은 옥령산 덕에 태어난 몸이었다. 얼굴 모를 이의 손가락질이 무서워서 물러설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하늘 도깨비는 낮이면 청아한 연파랑 색이었다가 노을이 지면 붉은 색동 옷으로 갈아입고 밤이면 검붉은 옻색으로 변한다고 전해진다. 두레박을 끌어 올리는 큼지막한 손이 종종 달을 가리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땅의 사람들은 하늘로 사람이 올라가는구나 했다.
도깨비라는 족속들은 수줍음이 많아서 사람들 앞에 쉬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의 사람은 낮에 일하는 자들과 밤에 일하는 자들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별을 닦는 별지기들이 나와서 마른 걸레질을 하고, 달 중심에 있는 월성의 문지기가 불을 켜면 깜깜하던 밤하늘이 서서히 꽃단장하기 시작했다.
침이 고이도록 하품하며 나오는 월성의 사람들이나 별지기들은 명확히 밤에 일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땅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감격하리라 생각하고 있지만 산영이 본 땅의 사람들은 그들을 떡 찧는 토끼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산영이 탄 두레박이 삐걱거리며 위로 향했다. 세월이 흐른 만큼 겉은 낡았지만 하늘의 나무로 만들어져 천 년도 거뜬할 두레박이었다. 산영은 먹물 뿌린 듯 시커먼 아래를 내려보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레박에서 떨어지면 산신령이고 나발이고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구나. 산영은 두레박 줄을 꼬옥 쥐었다.
일하러 나온 별지기들이 촌스러운 산영을 보고서 배꼽을 잡았다. 백지장처럼 하얀 의복을 입는 이들은 신령밖에 없으니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 촌뜨기 신령 하나가 하늘로 올라가는구나 했다. 산영은 자신을 놀리는 에헤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윤이 나는 별 위에서 팔을 휘두르기에 맞장구치듯 손을 흔들어주었을 뿐이었다.
“내가 그리 고운가.”
옛날에 곱다고 소문난 신령이 두레박을 타고 올라가다가 납치를 당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월성의 주인이라는 자는 호색한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밤 구경을 하다가 그만 고운 신령 하나를 물어가 버리고 만 것이었다.
산영도 그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후로부터 더욱이 하늘로 올라가기를 꺼렸다. 사실 나무꾼이 헤집어놓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다시 빗방울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옥령산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았으리라.
어쨌든 놀음판 같은 하늘에 발을 들이기로 결심을 한 후였다. 옥령산을 무시무시한 산으로 만들지는 못해도 양심 없는 사람한테 두 번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산영은 주먹 쥔 손을 야무지게 흔들었다. 기왕 온 것 끝장을 보겠다.
하늘에는 낮과 밤이 없었다. 해가 지려는 것도 아니고, 달이 뜨려는 것도 아니었다. 하늘 한쪽에는 해의 기운이 반대편에는 달의 기운이 있었다. 낙조처럼 붉은 기운과 전야의 바다처럼 푸른 기운이 만난 중앙은 연분홍의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아래로는 봉우리가 하얀 산맥에 푸릇푸릇한 이파리로 가득한 나무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엄연히 하늘과 땅은 달랐다. 하늘은 이곳의 주인이 누군가를 가리느라 벌이는 싸움이 없었다. 하늘이고 땅이고 주인은 천제 하나뿐이었고, 그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땅밑으로 꺼지는 것이 순리였다. 하늘은 땅에 사는 신령의 그늘터이고 도깨비들의 고향이며, 하늘 산자락에 사는 천신들의 터전이었다.
두레박이 구름 끝까지 닿고서 멈추면 산신령인 산영이 가야 할 곳은 하나였다. 윗분들이 알아서 고생하는 신령들을 위해서 기운 좋은 곳을 마련해 두었다. 기력이 떨어지는 몸을 온탕처럼 담글 수 있는 은색의 강줄기가 길게 늘어져 있고, 한 입만 먹어도 봉사의 눈이 뜨인다는 과실을 주렁주렁 매단 나무가 지천에 있었다.
신령에게 허락된 장소는 대강 둘러만 보아도 알 수가 있었다. 걷다가 보면 나오는 강줄기를 따라서, 신령으로 보이는 이들이 바글바글한 곳에 은근슬쩍 발을 담그면 되는 것이었다. 지친 몸뚱어리는 하늘 기운을 품은 강줄기가 씻겨주고, 비어 있는 몸은 실한 과실로 채워주면 되는 것이었다.
수련이랍시고 누워서 떡이나 먹으면 되는 일이니 어느 누가 신령 팔자 부럽지 않다고 할쏘냐. 땅의 사람들이 은하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상 신령들의 목욕 터이니 말이다.
하나 마악 하늘에 도착한 산영의 눈에는 그것이 달리 보였다. 말로는 모든 신령이 쓸 수 있을 것처럼 해도 막상 가보면 그건 또 아니올시다였다. 목이 좋고, 탐스러운 과실이 손만 뻗으면 닿고, 어깨까지 강물이 차오를 수 있는 자리는 이미 연륜 있는 신령들이 꿰찬 후였다. 괜히 이 땅에 이름이 알려진 산들과 강이 있겠나.
하늘에 와서 기운을 몽땅 끌어다가 인계로 가져가니 과연 천 년의 이름을 들먹일 힘이 생기는 것이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