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108
1108화 누구의 부탁이오?
“난 그들을 믿지 못한다. 자고이래로 가장 탐욕이 많은 생령이 누구였던가? 너는 인간이 그들의 야심과 욕망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 보는가? 게다가 네가 좋게 보는 엽현이란 아이, 겉보기에는 심성이 착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자기 주변인들과 동생을 위해서라면 우주라도 멸망시켜 버릴 자가 아닌가!”
“…….”
“나는 직접 그들에게 출수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이 우주가 알아서 죄를 물을 테니까. 우스운 사실은 그들은 여전히 눈곱만치도 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번 오유겁은 이전의 것들과 비교해 최소 열 배 이상은 더 강력하다. 이번에야말로 요행으로도 살아남을 자는 없을 것이니, 오유계는 다시 한번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겠지!”
말을 마친 천도는 그대로 등을 보이며 떠나갔다.
홀로 남은 소도는 한동안 침묵에 빠졌다.
결국, 천도가 하고자 하는 것은 한쪽에 서서 방관하고 있다가, 때가 왔을 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누구에게도 죄를 짓지 않으니 굳이 인과에 얽힐 일도 없을 테고, 동시에 이 세상과 상계의 강자들도 깨끗이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손도 대지 않고 코 푸는 격.
그녀를 원망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녀를 누가 탓할 수 있으랴.
기껏해야 부채질 정도 한 것이 전부인 것을.
나머지는 모두 우주의 생령들이 자처한 것 아니던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의 천도는 이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도왔다면, 지금은 방조하고 있는 것뿐이다.
천도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소도.
그녀의 눈빛이 다소 복잡하다.
소도는 알고 있었다. 예전의 천도는 얼마나 선량한 존재였는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소도는 소매를 펄럭이며 자리를 떠나갔다.
발밑의 무수히 많은 시체를 남겨두고서.
* * *
한편 음암계에 도착한 상주는 그야말로 놀라서 자빠질 지경이었다.
거의 지옥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이때의 음암계는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그나마 피해서 걸어가려면 반드시 발에 피를 묻혀야만 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장내를 바라보며 상주가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 겨우 살아남은 음암계 강자 하나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누가 이런 것이냐!”
“…엽현입니다.”
이 말을 들은 상주의 눈동자가 순간 붉게 물들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이냐! 고작 윤회경에 불과한 검수가 음암계 전체를 괴멸시킨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더냐!”
상주가 안정을 되찾은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제야 그는 음암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 엽현이란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엽현은 혼자였다는 것이다.
혼자서 음암계를 모두 쓸어버릴 수 있는 능력.
상주는 몰려오는 두통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번에 입은 피해는 실로 비참할 정도였다.
“후… 상계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더냐?”
곁에 있던 무인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도우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상주의 표정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애당초 엽현 쪽을 맡기로 한 것은 상계쪽이었다. 그런데 엽현이 음암계를 이 지경으로 만들 때까지 그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고?
상주는 다시 몸을 부르르 떨며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때 그와 함께 도착한 무천이 소리쳤다.
“그들은 그저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 했던 것뿐입니다!”
눈을 뜬 상주는 무심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이때, 돌연 허공이 크게 갈라지더니 뒤이어 한 남자가 공간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를 발견한 순간, 장내 모든 음암계 강자들의 분위기가 흉흉하게 바뀌었다.
눈앞의 남자에게 일말의 호감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곧바로 상주의 앞으로 날아온 남자.
그의 몸은 반쯤 투명했는데, 이는 본체나 영혼이 아닌 그저 하나의 투영(投影)에 불과했다.
남자는 잠시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장내를 둘러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이렇게 될 줄은 우리도 전혀 생각지 못했소.”
“왜 막지 않은 것이오?”
상주가 두 눈을 똑바로 뜨며 묻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출수하지 않은 건 아니오. 다만 천도에게 막혔을 뿐이오.”
천도!
순간 상주의 눈빛이 가늘게 변했다.
“그녀는 분명 그대들에 의해 감금된 상태가 아니었소?”
“탈출했소.”
상주는 기가 막힐 뻔 했지만, 이내 수긍하고 말았다.
천도란 여인은 그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상주, 우리는 확실히 엽현과 그 주변인들 그리고 천도를 얕잡아 본 듯하오. 하여, 이번에는 출수하기 전에 그들의 대해 철저하게 조사할 것이오.”
“그럼… 우리 음암계는 어찌하면 좋겠소?”
상주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남자의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상황에서 그들이 기댈 곳은 상계뿐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음암계로서는 결코 엽현이나 천도에 대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대들은… 조용히 지내고 계시오.”
“조용히 지내라고? 어떻게 말이오? 만약 엽현이 당장 쳐들어오면 뭐로 막는단 말이오?”
이에 남자가 검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가 손을 펼치자 두루마리가 검은빛으로 변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잠시 후, 신비한 기운이 하늘에서부터 나타나 음암계 전체를 뒤덮었다.
“이는 상계의 결계요. 만약 그들이 이 결계를 뚫고자 한다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그리고…”
남자가 소매를 펄럭이자 이번에는 두 명의 흑의인이 상주의 뒤편에 나타났다.
“그들의 경지는 주재경 절정, 웬만한 주재경 강자로는 쓰러뜨릴 수 없을 것이오. 만일에 대비해 그들을 이곳에 남기도록 하겠소.”
이때 상주가 돌연 질문을 던졌다.
“그대들은 언제쯤 도착하는 것이오?”
“기다리시오. 우리도 방법을 강구하고 있으니. 어쨌든 그대들은 만유서옥을 차지하는 데만 집중하면 될 것이오.”
“만유서옥은 도대체 어떤…”
상주의 질문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나에게 물어야 소용없소. 나 역시 그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알지 못하니까.”
“아…….”
“그럼 통지가 있을 때까지 상처를 돌보고 계시오. 이번에 큰 손실을 입은 만큼 다음번에는 반드시 일격에 끝내야만 하오.”
말을 마친 남자는 점점 희미해지더니, 상주가 보는 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남자가 사라진 후, 상주 곁에 있던 무천이 나직이 속삭였다.
“아무래도 저들을 믿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후… 믿지 않으면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이냐? 저들 대신 엽현과 천도를 막아 줄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
“어쩔 수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말이다.”
상주가 고개를 흔들며 말하자 무천이 무슨 말을 꺼내려다 도로 집어넣었다.
이를 본 상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너도 알고 있을 게다. 당시 천도가 우리를 충분히 전멸시킬 수 있었음에도 살려 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는 것을. 역시 우리가 그녀의 손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선 상계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상계에 천도를 꺾을 만한 힘이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두고 보자꾸나. 분명 반전이 있을 게다. 상계의 저력이 겨우 이 정도일 리가 없으니 말이다.”
고개를 돌려 주변에 산처럼 쌓인 시체를 바라보는 상주.
점점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져갔다.
* * *
무족.
어느 대전 안, 엽현이 침대 위에 누워있고, 그의 곁에는 아목이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엽현에게서 넘쳐나던 살의와 난폭한 기운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아목은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엽현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그저 능글맞기만 한 엽현이지만 엽령만 관련되면 미치광이로 변해버리는 것이 다소 걱정스러웠다.
이때 죽은 듯 누워있던 엽현이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이에 아목이 재빨리 그의 손을 붙들었다.
“깨어났느냐?”
대답 없이 천천히 눈을 뜬 엽현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워 자리에 앉았다.
“동생… 내 동생은?”
“걱정할 것 없다. 그녀는 무사하니까.”
“무사…”
엽현이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러댔다. 이때의 그는 음암계로 갔던 것만 생각 날 뿐, 그 후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풍마상태에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생각이 나질 않는 게냐?”
“음… 그런 것 같소.”
“너는 음암계에서 많은 음암생령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아목은 엽현에게 음암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말해 주었다.
잠시 후, 엽현이 고개를 들어 아목을 바라보았다.
“내가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단 말이오?”
“그래.”
이에 엽현이 황급히 천주검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별 달라진 부분을 찾아내지 못했다.
다음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았으나, 이 역시 완전히 정상이었다.
엽현이 고개를 들어 아목을 바라보자 아목이 부드럽게 말했다.
“아마 네 혈맥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평소와 다를 바 없지만, 일단 혈맥이 활성화되면 원래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지지 않을까 싶다.”
혈맥의 활성화.
풍마상태!?
엽현은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 상태에 들어서면 기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성의 끈도 놓아버리지 않던가!
아목 역시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의 네 공력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증가하지만 그만큼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차하면 네 자신조차 집어 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되도록 그 힘은 쓰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구나.”
“그게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소.”
엽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 역시 풍마상태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긴 하지만, 화를 내기만 하면 그렇게 되어버리니 스스로도 답답한 노릇이었다.
“후… 우선 령이에게 데려가 주시오. 그 아이를 봐야겠소.”
“그러자꾸나.”
잠시 후, 아목은 엽현을 데리고 무명의 비석이 있는 봉분에 도착했다.
이때 두 사람 앞에 묘지기 노인이 나타나 엽현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았다.
“이제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건가?”
엽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장, 그때 왜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해주지 않았소? 그대 덕에 애꿎은 음암계만……”
“놈!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발작해서 떠난 주제에 입은 살았구나. 젊을 때 혈기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일찍 죽는 법이다. 알겠느냐?”
“…알겠소.”
노인이 손을 들어 뒤편의 봉분을 가리켰다.
“네 동생은 저 안에 있다. 다만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나오지 않았구나.”
“음… 위험하진 않은 것이오?”
엽현의 질문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을 게다. 안에 있는 존재는 네 동생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다. 즉, 대단한 기연을 만난 것이라 봐야겠지.”
이때 엽현이 걸음을 옮겨 무덤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머리를 숙여 무덤에 바짝 몸을 기댄 순간, 한 줄기 강렬한 기운이 무덤 밖으로 튀어 나왔다.
순간 엽현이 깜짝 놀라며 황급히 태극순을 펼쳐 들었다.
쾅-!
굉음과 함께 수백 장 멀리 튕겨 날아간 엽현!
그가 자리에 멈춰 섰을 때, 태극순은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다.
이를 보자 엽현은 물론 아목 역시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인간 최강의 방패인 태극순에 상처가 생겼단 말인가!
딱딱한 표정으로 봉분을 응시하는 엽현.
안에 도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묘지기 노인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엽현과 아목.
이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누가 있는지는 모른다. 내 임무는 그 존재가 깨어날 때까지 지키는 것뿐이니까.”
“누가 그대에게 이곳을 지키라 했소?”
엽현의 말에 노인이 그의 눈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청색 장삼을 입은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