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word Alone RAW novel - Chapter 1376
1376화 포기할 것이냐?
바로 이때, 심연의 호수 가운데서 몇몇 그림자가 튀어 나왔다.
이들은 모두 몸이 투명한 것이 누군가의 분신인 듯했다.
여인을 발견한 이들의 눈빛엔 미증유의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호수에서 나온 이들은 모두 성도경 절정의 강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표정은 호랑이를 앞에 둔 강아지 새끼처럼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강자에 대한 공포심!
여인은 단 일검에 이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반항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 앞에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것조차 대단한 일이었다.
이때에도 고신연에 존재하던 수많은 탑들은 균열을 일으키며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하는 이때, 여인의 앞에 검은 장포를 입은 노인 하나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마치 우주 그 자체인 듯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성도경조차 넘어선 초절정 강자!
여인을 마주보고 선 노인이 가볍게 예를 차리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소철(蘇哲) 인사 올리겠소. 한데…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겠소?”
“없다.”
여인의 대답에 질문한 소철이 당황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멸하려 하는 것이오?”
“너희는 내 오라버니가 상대하기에 너무 강하다. 그래서 죽이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 소철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오빠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단지 그에게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살수를 펼친단 말인가!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강한 게 잘못이란 말인가?!
바로 이때, 여인이 쥐고 있던 검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 순간, 사방에 존재했던 검은 탑들이 일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모습에 장내 무인들의 안색이 더욱 잿빛으로 변해갔다.
이때 소철이 황급히 소리쳤다.
“손을 거두시오! 제발 부탁하겠소! 우리는 절대 그대 오라비라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오!”
소철은 무척이나 황당했다.
여동생이 이렇게나 강한데 어떤 멍청한 자들이 그 오라비에게 손찌검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때, 진동하던 여인의 검이 움직임을 멈췄다.
검이 잠잠해지자 장중의 무인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 혹시 그대의 오라버니가 암연(暗淵) 사람이오?”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에 소철이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심하시오. 우리는 절대 그대의 오라버니를 적으로 삼지 않겠소!”
“나는 이제 먼 곳으로 가야 한다. 내가 없는 동안 너희가 무슨 짓을 할지 어찌 아느냐? 아무래도 안심이…….”
이때 소철이 황급히 여인의 말을 끊어냈다.
“거, 걱정은 붙들어 매시오! 진심으로 아무 짓도 하지 않겠소!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그, 그래! 영혼에 걸고 맹세하겠소! 그럼 되지 않소?”
소철은 반쯤 정신 나간 모습으로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뭐, 뭐 하고 있는 거냐! 어서 맹세하지 못할까!”
소철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억울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었다.
소철의 말을 들은 무인들은 하나둘 스스로의 영혼을 걸고 맹세하기 시작했다.
여인은 말없이 이 장면을 지켜볼 뿐이었다.
맹세를 끝낸 무인들은 마음을 졸이며 여인의 입에서 떨어질 말을 기다렸다. 생전 처음 보는 사이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들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절망!
경지가 약한 무인이라면 혹시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들 정도 되는 강자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 검 한 방이면 자신들은 모두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것을!
한참이 지난 후, 드디어 여인이 등을 보이며 자리를 떠나갔다.
이 모습을 본 무인들은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로 이때, 여인이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무인들의 안색이 다시 백지처럼 창백해졌다.
이때 여인이 가볍게 소매를 펄럭이자, 한 장의 초상화가 무인들 앞에 펼쳐졌다.
바로 엽현의 초상화였다.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 이게 내 오라버니다.”
소철이 눈앞의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본 후, 다른 무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 모두 와서 보아라! 가까이 와서 자세히 들여다보란 말이다!”
무인들은 앞다투어 그림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얼굴에 난 점 하나까지 기억하려 애를 썼다.
“그럼… 혹시 보게 되면 절대 괴롭히지 말거라.”
이 말을 끝으로 여인은 돌아섰다.
잠시 후, 여인의 모습은 어두운 성공 속에 파묻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소철은 괜히 손으로 목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손안에 흥건히 땀이 묻어났다.
“제기랄… 누가 누굴 괴롭힌다는 거냐… 도대체 이 우주에 정의가 살아있긴 한 건가? 저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다니…….”
* * *
천계연, 천궁.
대전 안에 잠잠히 앉아 있던 백제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백제자의 검게 그을린 표정을 본 진무신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백제자는 대답하기에 앞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신풍과 천리가… 죽은 것 같소.”
죽었다!
진무신군의 얼굴에 당혹감이 일었다.
한참이 지난 후, 백제자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 여인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고수인 것 같소.”
“백제성군.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소. 곧 엽현이 어도에 도달할 것이오.”
“…….”
“그대의 고민은 알고 있소. 하지만 이제 정말로 시간이 없소. 놈은 이미 증도경 절정이오. 도총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어도경에 이르는 것은 시간문제요. 그렇게 되면 놈을 죽이는 일은 대단히 어려워질 수밖에 없소!”
백제자가 진무를 응시하며 대꾸했다.
“진무신군, 나는 여전히 먼저 놈의 신분과 배후를 확실히 밝혀내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오.”
“엽현의 신분?”
“그렇소. 녀석의 혈맥, 그 혈맥과 관련된 정보를 아직 알아내지 못했소. 만약…….”
백제자는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선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엽현에 대해 파고 들어갈수록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 것이다.
백제자는 다시 한번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원래 막념만 없으면 엽현을 처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여겼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가기만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이오!”
“…….”
“백제성군, 놈 뒤에 누가 있든,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돌이킬 수 없소. 어차피 놈을 죽여야 한다면 지금 처리하는 게 백배 천배 낫지 않겠소?”
백제자는 고민에 빠졌다.
“백제성군, 고민하지 마시오. 놈이 어도경이 되면 내가 직접 나선다 해도 쉽게 죽이지 못할 것이오. 하지만 지금이라면 약간의 희생만 감수하면 얼마든지 가능하오!”
“흠… 만에 하나 도총이 방해하려 든다면…….”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겠지만, 일단 도총이 원하는 대가를 쥐여주는 식으로 회유해 볼 순 있소.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그들의 몫이겠지만.”
백제자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주저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신군, 그대 뜻대로 하시오.”
* * *
고요한 성역,
엽현이 한 손에 검을 쥔 채 눈을 감고 떠 있다. 이때 손안의 천주검은 끊임없이 몸을 떨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엽현이 눈을 번쩍 뜨더니, 동시에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쉭-!
한 줄기 검광이 번뜩인 순간, 무려 십만 리 이내의 공간이 그대로 사라졌다.
말 그대로 세상에서 지워진 것이다.
도권과 검도의 합일(合一)!
장시간의 수련 끝에 엽현은 드디어 검 안에 대도의 기운을 집어넣는데 성공했다.
이 검의 위력은 도권만 사용했을 때보다 무려 세 배 이상 강했다.
초식을 펼치고 난 직후, 엽현은 온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위력이 강한 만큼 소모 역시 대단했던 것이다.
만약 그의 육신이 충분히 강하지 않았더라면, 소멸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으리라.
엽현은 천천히 눈앞으로 검을 가져다 댔다.
“도검(道劍)이라 부르기로 하자.”
수련을 마친 엽현은 주변을 한 번 훑어본 후 자리에서 사라졌다.
엽현은 다시 요왕성으로 돌아왔다.
요왕성 대전 입구에는 치요요가 서 있었다.
아무래도 그를 기다리던 중인 듯했다.
엽현이 치요요에게 다가가며 인사를 건네려는 이때, 갑자기 허공이 길게 갈라지더니, 갈라진 틈 사이로 중년인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왔다.
백포!
백포 이후에도 틈을 통해 무인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이윽고 대전 상공에는 천 명에 가까운 무인들이 빽빽이 들어섰다.
이 중 신군급 무인의 숫자는 무려 서른여섯이나 됐다.
서른여섯 명의 신군!
신군의 뒤쪽으로는 백포군의 정예들이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으며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대군의 위용을 본 엽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에 치요요가 장난스럽게 엽현에게 물었다.
“당황했느냐?”
“조금?”
“지금쯤 도총과 도정 고위층 간에 담판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담판?”
엽현의 물음에 치요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두고 협상을 하려는 거겠지.”
“음… 요왕, 혹시 나도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구경할 수 있겠소?”
“…….”
“부탁하오.”
치요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잠시 후.
두 사람은 어느 정자가 있는 곳에 나타났다. 정자 위에는 엽현에게 익숙한 얼굴들이 이미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백제자, 진무신군, 나후 그리고 아고왕까지!
난데없는 엽현의 등장에 백제자 등이 미간을 찌푸린 이때, 치요요가 웃으며 나섰다.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고 싶다 해서 데려왔소. 계속 말씀들 나누시오.”
이에 나후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치요요를 응시했다.
이때 엽현이 백제자를 향해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로군!”
“후후, 엽현. 너무 늦게 왔구나. 협상은 이미 타결됐다!”
“하하, 잘 됐군! 도총이 절대 거절하지 못할 조건이라도 제시한 건가?”
이때 나후가 대신 대답했다.
“최상급 영맥 열 개와 이십 년간 불가침이 조건이었다.”
이에 엽현이 웃으며 나후에게 물었다.
“혹시 제안을 승낙한 것이오?”
나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에선 납득할 만한 조건이었다.”
그의 말대로 도총은 도정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영맥 열 개를 얻는 데다, 만에 하나 엽현이 도정에게 죽게 되어 그의 배후가 나서기라도 하면, 도총으로서는 손도 대지 않고 코 푸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즉, 도총은 잃는 것 없이 얻기만 하면 되는 상황인 것이다.
엽현이 도정에게 죽고, 도정이 엽현의 배후에게 멸망 당하는 것.
도총 측에 이것만큼 좋은 결말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후는 도정의 조건을 듣는 즉시 고민하지 않고 수용했던 것이다.
이때 자리에서 일어난 나후가 치요요에게 눈짓을 보냈다.
“우리는 이만 빠지도록 하지.”
하지만 치요요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를 보자 나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때 치요요가 엽현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없느냐?”
“…….”
“어찌, 이대로 포기할 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