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133
131화. 파티
잠시 뒤.
나는 큰 사거리에서 보자는 에스더의 문자에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마탑 길드장은 사거리로 나온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이리 말하더라.
“저희 봄옷 사러 가요!”
지난겨울. 알다시피 나는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정장을 제법 애용했었다.
말이 애용이지 사실 옷장에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밖에 나갈 때면 강제로 그녀가 준 옷만 입은 셈이지만.
신기하게도 이 행동이 지구인에게는 꽤 기쁜 일이었던 모양인지, 에스더는 그 사실을 연이어 강조하며 왠지 기꺼이 새로운 의복을 사주려 했다.
“기려 씨가 선물을 너무너무 잘 써주길래 내가 다 고마워서요! 이번엔 맞춤 정장 집으로 가요.”
하얀 셔츠. 남색 조끼. 그 외 기타 등등.
상대가 사주는 의복은 여전히 가격이 어마어마했지만, 이제는 나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S급 헌터가 되어보니 알겠어. 이런 건 에스더한테 정말 껌값 수준일 거야.’
하지만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과 호의에 무심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이쪽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할 터.
“이렇게 받기만 하면 죄송한데……. 제가 보답으로 식사라도 대접하면 안 될까요?”
뭘 좋아하는진 모르겠지만 에스더도 지구인인 이상 음식은 먹겠지?
나는 나름의 계산을 마치고 그녀에게 제안했다.
“식사요?!”
그런데 반응이 꽤 격하네.
어째 밥을 사준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상대의 목소리가 2옥타브쯤 높아졌는데.
아무래도 에스더가 오늘따라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다.
***
이어서 도착한 것은 인근 식당.
나는 가게와 메뉴 선택을 상대의 취향에 맡겼다. 에스더가 고른 것은 높은 빌딩의 스카이뷰 레스토랑이었다.
‘어라?’
하지만 한창 점심시간임에도 손님이 없다.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옆에 있던 에스더는 설명했다.
“아, 놀라지 마세요. 기려 씨랑 오붓하게 식사하려고 미리 전세를 낸 거거든요.”
“예?”
“지인한테 급하게 연락한 건데 다행히 오늘은 예약 손님도 없었다네요.”
전세.
그럼 설마 저 많은 자릿값을 죄다 지급해야 하는 건가?
나는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꼈지만, 다행히 우려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에스더는 창가의 자리로 향하며 음식값은 딱 2인분만 내라.
주변을 비운 건 그저 자기가 조용히 식사하는 걸 좋아해서 멋대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 대충 그렇게 덧붙였거든.
‘다행이네.’
그럼 모처럼 고급진 식당도 왔겠다. 오늘은 이 행성의 식문화나 즐기기로.
나와 에스더는 똑같은 코스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채 요리가 나왔다.
작은 그릇에 담긴 알록달록한 음식. 바닥에 깔린 건……. 새우인가.
‘어떻게 먹는 거람?’
나는 처음 보는 음식을 흥미롭게 살폈다.
그리고 그때, 건너편에서 동행인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흘러들기 시작했다.
“기려 씨, 그나저나 전에 했던 약속은 기억하고 있어요?”
여기에서 말하는 약속이란 아마 그것이리라.
「좋아요. 수예휘를 처리하는 걸 도와줄게요. 대신 이건 빚으로 달아놔도 되는 거죠?」
사실 지난번의 도움은 완전히 무료 봉사가 아니었거든.
‘에스더는 일을 도와주는 대가로 나중에 자기가 뭔가를 부탁하면 그걸 들어달라고 했었지.’
나는 과거의 거래를 기억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스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잊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말 나온 김에……. 사실 오늘은 제가 기려 씨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부스럭.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저주술사.
그녀는 찾은 물건을 테이블 위로 슥 밀었고, 자세히 보니 그것은 금장이 둘린 두꺼운 종이 한 장이었다.
“김기려 헌터. 혹시-.”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주겠다고 질러놓긴 했다만 솔직히 무슨 말이 나올지 걱정되는데.
“저랑 다음 주에 어디 좀 같이 가줄 수 있어요?”
몇 초 뒤.
에스더는 나찰사원의 처리를 도운 대가를 치르라며 준비한 화두를 꺼냈다.
“정확히는 어떤 길드가 주관하는 파티예요.”
톡. 에스더는 테이블에 올려진 종이를 가리키며 설명을 덧붙인다.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헌터 길드 ‘게이트 스타’. 거기가 이번 달에 창립 5주년을 맞거든요.”
게이트 스타?
자세히 들어보니 해당 길드는 회사의 길일을 기념하여 큰 규모의 행사를 여는 듯했다.
게다가 올해는 특이하게도 각국의 S급 헌터들을 초대했다지.
최상급 헌터들은 그 수가 적어 서로 얼굴을 보기가 힘드니, 이런 때라도 잠깐 모여서 함께 교류하자는 취지라는데…….
“외국의 S급들과 연을 터 둬서 손해를 볼 건 없죠.”
에스더는 개인적으로 게이트 스타의 제안을 나쁘지 않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전 이 초대에 응할 예정이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슬쩍.
그녀는 몸을 기울이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에스코트해줄 사람을 못 구했어요.”
“에스코트?”
“설명을 들었으니 아시겠지만 아무래도 이런 자리는 혼자 가기 그렇잖아요?”
확실히 그렇긴 하네. 각국의 헌터가 모이는 거면 파티장에 죄다 외국인뿐일 테니까.
“그러니 결론은, 기려 씨에게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했어요.”
나는 에스더의 요구를 큰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실력의 밑천이 드러나는 의뢰가 들어오면 어쩌나 고민했었는데. 이렇게 연회 하나 참여하는 걸로 빚을 없앨 수 있다면 나야 좋지.
‘이 기회에 외국도 구경할 수 있고.’
어? 생각할수록 좋은 점밖에 없잖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세상에, 정말요?”
그렇게 나는 게이트 스타의 창립 기념일 행사에 기꺼이 동행하기로 했다.
그러자 상대는 기쁜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출국 예정일은 언제라느니. 복장 규정은 무엇이라느니…….
***
‘4.’
그것은 보통 재수 없는 수 취급을 당한다.
병원에서는 죽을 사(死)가 연상된다며 아예 4층이라는 표시를 쓰지 않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쪽은 저주 계열로 각성해서 그런가. 왠지 그런 불운의 상징이 종종 행운으로 다가오곤 했다.
‘네 번째.’
김기려. 저런 사람이 한국의 S급으로 나타나 준 건 정말 다행인 일이지.
한국마탑 길드장의 머릿속에선 사실 김기려의 평가가 제법 높았다.
당연한 일이다. 지난 1월에는 그가 세이렌을 모조리 죽여준 덕분에 몇 년 만에 설날도 챙겼지 않는가.
[(속보) 김기려 S급. 강창호, 안윤승과 함께 인어고개 공략에 나서…….]‘뭐야, 하필이면 강창호 같은 전과자 자식이랑 팀으로 일하다니!’
물론 인어고개 사건의 보도를 봤을 땐 잠깐 실망할 뻔도 했지만…….
다행히 부정적인 감정은 금방 해소됐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김기려가 한국마탑의 최상층으로 찾아와 이런 말을 건넸으니까.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미필연한 악성]을 만든 각성자를 처리하고 싶어요.
그날.
에스더는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S급을 보고 다시 없을 감정을 느꼈다.
-부탁합니다.
사라진 이무기의 비밀을 가장 먼저 파악한 것도 그렇고.
투명화 스킬을 소지한 자의 신상. 나찰사원의 배후.
생각해보면 그 S급 헌터는 이전부터 각성 범죄에 관한 정보를 수상할 정도로 많이 알았다.
게다가 뒤늦게 조사한 바로는 김기려가 보스 스틸범들을 얼려서 무력화시켰다는 소문까지 협회에 돌고 있었으니…….
‘흐음.’
서에스더는 협회장의 공식 발표가 거짓임을 안다.
한데, 지금까지의 정황을 보면 그 거짓 공표와는 별개로 기려가 진짜 이면의 심판을 해온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문득 들었다.
-공권력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됩니다. 어차피 세뇌들을 해제하려면 당신 능력으로 수예휘의 의식을 박살 내버리는 게 가장 빨라요.
그만큼 김기려라는 인물은 범죄자의 처단에 거침이 없었거든.
‘저 헌터가 그런 일에 직접 나설 줄이야…….’
필요하다면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악인을 멈추자는 사고방식.
이것은 어느 길드의 우두머리와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게다가 어느 폐공장에 나눈 대화를 떠올려보면, 에스더는 이제 어렴풋한 갈증까지 일었다.
-나는 지금 수예휘가 폐인이 돼서 죽어버릴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건데 반응이 영 심심하네요?
-그럼 제가 여기에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데요?
딱딱한 표정.
바닥을 기는 수예휘를 내려다보던 그 텅 빈 눈동자.
기려는 수백의 가정을 파탄 낸 사이비 종교인의 죽음에 신랄한 반응을 보냈다.
범죄자에게는 티끌만 한 감정조차 낭비라는 듯 심드렁한 태도로 일관하다니.
에스더는 그러한 기려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느꼈다. 그렇기에 이런 충동이 들었다.
‘정말로.’
저런 자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으면 참 소원이 없겠다고.
하지만 이런 부류의 소망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마탑 영입은 고사하고, 저기 있는 사냥꾼은 그 정하성의 팀 요청을 거절할 정도로 어려운 성격이었던지라.
‘그런 인간이 또 강창호와는 공략대를 짰단 말이지. 왜였을까. 혹시 서로 스킬 조합이 좋기라도 한가?’
하여간 만만치가 않다.
에스더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눈을 흘겼다.
이 순간에도 건너편에는 삼백안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이전부터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발언했지만, 솔직히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진심인진 모르겠고.
‘툭하면 식사 약속을 피하는 데다 3개월을 잠적하려 한 적도 있었지…….’
에스더는 일단 같은 S급과 무난한 친분을 유지해낸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어떤 화염 속성 일벌레와 달리 저 양반은 적어도 문자에 답장은 하잖아.
게다가 그동안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은 덕에 이런 부탁도 꺼내 볼 수 있고.
“김기려 헌터, 혹시 저랑 다음 주에 어디 좀 같이 가줄 수 있어요?”
에스더는 식사를 멈추고 본론을 꺼냈다. 사실 봄옷은 핑계며 오늘은 이 제안을 하러 나온 것이다.
“정확히는 어떤 길드가 주관하는 파티예요.”
그녀는 미국에서 온 초대장을 내려다봤다.
이번 파티에서 새로운 S급들과 친분을 다져두면 여러모로 쓸 일이 있을 터.
물론 그들도 머리란 게 있으니 함부로 이용당하진 않겠지만…….
이렇게 생긴 연결고리로 어떻게 이득을 보느냐는 개인의 역량에 달렸고, 에스더는 이 사교 활동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전 이 초대에 응할 예정이랍니다.”
그러나.
게이트 스타에서 온 초대를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걸리는 점이 남아 있지.
S급의 지위가 위협적인 이유는 그들의 대적자가 적기 때문.
한데 이렇게 동급의 각성자가 한 공간에 모여버리면 그 가치도 빛이 바래고야 만다.
‘일면식도 없는 S급 헌터 틈바구니에서 사고라도 벌어지면……. 과연 내가 혼자서 대처할 수 있을까?’
뜻밖에 경계심이 많은 성격인 에스더.
따라서 그녀는 모든 가능성을 열고 만전을 기한다.
한국의 다른 S급과 동행한다는 보험을 들어 여러 위협을 방지하려 든 것이다.
‘게이트 스타 길드에선 각국의 안전을 우선한다는 이유로 나라마다 1장의 초대장만 보냈어. 나처럼 S급 동행인을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겠지.’
그런 의미에서 김기려는 참 더할 나위 없는 선택지다.
나름 초대할 명분도 갖춰졌으며, 그의 앞에선 자신이 저주 스킬을 마음껏 써도 2차 피해가 생기지 않을 테니.
‘으흠, 사실 이건 좀 자존심 상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에스더는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다가 금방 주제로 돌아왔다. 어쨌든, 그녀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그러니 결론은, 기려 씨에게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하려 했어요.”
그런데, 설마하니 오랫동안 고민한 문제가 이리도 쉽게 풀릴 줄은.
“알았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으응?
에스더는 뒤이은 남자의 답에 흠칫 놀란다. 기려는 마탑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요구를 수락했다.
망설임이 없는 대답.
맙소사, 그는 S급이 우글우글 모인 괴물 소굴에 가는 것이 부담스럽지도 않은 건가?
‘우와!’
승낙을 받자마자 에스더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아, 김기려 헌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두길 잘했다. 그가 함께해주면 더는 걱정할 게 없지.
저 사람은 무려 이무기를 죽인 장본인이니까.
‘목격자들의 증언으로는 내 저주받은 검을 들고 토벌했다던데, 그럼 역시 김기려 헌터는 근접전에 강한 파겠지?’
실력이 검증된 포식자!
에스더는 네 번째 S급이 자신을 따라와 준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정말이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