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209
207화. 비스트 (5)
나의 입장에선 이것이 처음으로 보는 비스트의 실물이다.
그런데 그 새카만 복식의 S급 헌터는 던전룸 안으로 목격자가 등장했든 말든 일말의 망설임이 없이 눈앞의 생물을 베어 넘겼다.
자신과 같은 포식자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 한국의 랭킹 1위를 스킬로 공격한 것이다.
지구인들에게는 [지정 절단]이라고 불리게 된 듯한 강력한 방어 무시의 술법.
-지이이잉.
불우하게도 하성은 비스트의 이 강격을 피하지 못한다.
인제 보니 영웅의 한쪽 발목은 짐승의 발톱에 쥐어뜯긴 것처럼 뼈가 드러나 있는데.
이는 아마도 비스트가 자신의 [지정 절단]을 확실히 맞히기 위해 상대의 기동력을 먼저 빼앗아 둔 결과일 터.
“큭!”
혈액이 비산한다.
공간을 찢는다고 알려진 비스트의 절개술은 하성의 어깨, 쇄골, 그리고 가슴뼈 따위가 존재하는 인간의 앞면을 자비 없이 터트렸다.
S급다운 반사신경으로 어떻게든 직격만은 면하려 했건만, 상대의 술식에 스친 것만으로도 몸을 보호하는 모든 것들이 망가지며 피가 허공으로 유출된다.
이윽고 무너져 내리는 정하성.
원래는 이 던전에서 빨리 사망자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등의 생각만 했었는데, 막상 눈앞에서 살아 있던 것이 죽어가는 비극이 발생하니 상상 이상의 충격이 다가왔다.
게다가 다른 이라면 몰라도 저것은 그동안 내가 직접 교류를 해온, 심지어 꽤 선한 성향의 지구인이었기에.
“정하성!”
나는 반사적으로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급한 대로 비스트의 다음 공격을 몸으로 받아냈다.
솔직히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하성은 이 상태에서 추가타가 들어가면 정말 죽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으악.’
쾅!
비스트는 방어 장비의 성능을 무시하는 절개술 외에도 육중한 배틀 엑스를 한 손으로 다루는 어마어마한 괴력의 소유자였는데, 배틀 엑스의 뭉툭한 검은 날은 나의 몸에 닿자마자 굉음을 내며 바깥으로 튕겼다.
S급 헌터의 공격조차도 한 번은 밀어낼 정도의 뛰어난 반발력.
이는 [신성나무 묘목]의 수호 효과를 한 점에 집중시킨 덕분이다.
‘됐다!’
그런데 문제는 묘목의 효과도 마냥 무적은 아니라는 것인데……!
‘아니, 그래서 이건 무슨 상황이야?’
일단 비스트가 여기에 출몰한 것 정도는 이해가 간다.
모방 도시의 입구는 세계 곳곳에 뚫려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던전과 이어진 통로가 늘어나는 중인데 아무렴 여기에 한국의 S급만 있으란 법은 없지.
하지만 이것만은 정말 납득이 안 간다.
정하성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압도적으로 당했느냔 말이다. 성장이 다 끝나지 않았다고는 해도, 대마법사가 무려 128시간을 쏟아 직접 기른 제자인데!
‘헉.’
그 순간이었다.
나는 비스트의 몸에 내재한 마력을 훑던 도중 무언가의 비밀을 알아챘다.
신원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상대방은 특수한 마도구를 통해 체내 마력의 양을 평소와 다르게 조율해 둔 상황이었지만.
이쪽이 보고 있는 것은 더욱 근본적인 특징.
즉, 비스트의 얄팍한 변장은 대마법사에게 통하지 않았으니.
‘망할! 주변에 그을린 자국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저 녀석은 저리 멀쩡한가 했더니만……!’
그때였다.
“김… 헌터님…….”
뒤쪽에서 청년의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하성은 내가 이 던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는지 귀신이라도 본 듯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궁금증을 채 풀기도 전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출혈이 심해서 뇌가 버티지 못한 모양인데.
‘이런!’
나는 정하성의 아이템 박스에 여분의 회복약이 있으리란 걸 알지만, 섣불리 치료를 시도할 수가 없었다.
비스트가 언제 다음 공격을 해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든 정하성을 물리적으로 감쌀 수 있도록 경계하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이어진 상황이란.
“…….”
음.
“…….”
으음.
‘어?’
뭐야. 이상하게 비스트가 공격을 해오질 않는데?
의미불명의 정적이다. 어째서인지 비스트는 나의 등장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장 난 듯 제자리에 멈춰버렸고.
이때 나의 머릿속에는 이 상황을 설명할 만한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딴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정하성을 치료해야 한다.
‘제발 공격하지 마라. 제발.’
나는 기절한 하성의 아이템 박스를 뒤져 익히 아는 형태의 약물을 꺼냈다.
그리고 이것을 청년의 몸 위로 콸콸 쏟아부었다.
인체의 앞면이 터져서 기절해 버린 영웅과 이것을 치료하는 F급. 왠지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만 그래도 이 점 하나는 다행이지.
생각보다 상처가 얕아서 이번에는 적어도 귀한 폐가 상하지는 않았으니까.
‘그 점을 제외하면……. 나머지 요소들은 죄다 저번보다 안 좋다마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TV가 연일 비스트를 떠들어댈 때 관심을 좀 가져둘 걸 그랬나?
이곳에 오기 전에 육감으로 포착한 상황을 되짚자면…….
비스트는 게이트에 들어온 정하성의 마력을 쫓아 일직선으로 달리다가,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스킬을 발동해 선공을 시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땅에 누워계신 내 제자는 영문도 모르고 시비에 걸렸을 확률이 높다는 거다.
게다가 비스트는 원시의 술사이니, 그 거리에서 마력만 보고 대상을 식별하지는 못했을 터.
‘그렇다면 그저 S급이라는 각성치 크기만 보고?’
한참을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이변이 벌어졌다. 이쪽을 기웃기웃 넘겨다보던 짐승 가면의 각성자가 갑자기 다시 도끼를 고쳐 쥔다.
그리고 비스트는 내가 없는 방향으로 돌아가 기절한 하성의 목을 내리찍으려 한다.
‘아니, 이런 미친!’
캉!
하지만 이번에도 어느 인간 방패의 눈물겨운 희생으로 공격이 가로막혔는데.
비스트는 내가 온몸으로 하성을 보호하자 엘크의 뼈로 덮인 얼굴 부분을 갸우뚱하며 재차 알 수 없는 제스처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후에 벌어진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끈질긴 대치다.
서성서성.
비스트라 불리는 술사는 우리의 주변을 돌며 자꾸만 기회를 엿보고.
나는 그런 비스트의 도끼날이 하성에게 닿지 않게 상대방을 주시하며 보호를 시도한 터라.
“…….”
“…….”
그런데 역시 내 이럴 줄 알았다.
“헉!”
콰앙!
비스트는 간만 보는 것이 질렸는지 자신의 배틀 엑스를 두 손으로 잡고 이내 내 옆구리를 힘껏 후렸다.
과연 S등급의 헌터답게 그것의 공격은 가공할 충격을 만들어 냈다.
어느 정도냐면, 그 [신성나무 묘목]의 수호 효과마저도 타격을 채 흡수하지 못하고 본체가 밀려나 버린 상황.
“크윽!”
콰당탕!
하지만 이쯤 되면 눈치챌 수 있듯이, 비스트는 끝까지 자신의 최대 마법인 절개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상대의 절개술은 탁월한 성능을 지닌 만큼 소모하는 마력도 클 테니 함부로 남발을 못 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나를 향해서 단 한 번도 쓰지 않는다는 점은 이상하지.
노골적으로 이상하다.
그러니 이 반응은 정리해 보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비스트는 날 죽이는 걸 꺼리고 있어.’
생각은 길지 않았다.
나는 상대방의 이러한 특징을 이용해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이곳은 온 나라의 지구인들이 모이는 세계적인 던전.
따라서 이쪽은 만일의 사태를 위해 입장 때부터 픽시의 번역기를 착용한 상태였다.
-딸깍.
나는 무너졌던 몸을 다급히 바로 하고 번역기에 달린 큰 버튼.
요컨대 한영 번역 기능과 연결된 단추를 눌러 상대방을 향해 외쳤다.
“그만 하세요!”
그러자 허리춤의 기기에서 다소 음질이 좋지 않은 영어 문장이 흘렀다.
“그만하라고요. 제발.”
“…….”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우리 대화 좀 합시다. 대체 뭣 때문에 갑자기 정하성을 죽이려 하는진 모르겠지만. 얘만 살려주면 제가…….”
하지만 비스트는 나의 이런 교섭 요청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 제 할 일만 집중했다.
‘이런.’
그것은 마치 내가 ‘순발력이 떨어진다’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화염술사의 숨통을 끊는 걸 포기하고 기절한 영웅을 통째로 업어가려 했으니.
짐승의 돌발 행동은 F급 따위가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의 마력이 이상 반응을 보이자마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브루클린 모건!”
정하성을 보호하기 위해.
“당장 멈추라고!”
입에 올려선 안 될 비밀을 밝혀버린 것이다.
자, 여기까지 드러났는데 이제 숨겨서 뭐 하랴.
비스트. 누켈라비 킬러. 신비주의자.
그리고 최근 들러붙은 것으로는 인류의 위협이라는 거창한 별명까지.
실로 다양한 이명을 지닌 저 짐승의 정체란 바로 이전에도 만나보았던 어느 금발의 외국인.
스펙트럼 길드의 S급 헌터. 브루클린이다!
“내가 번역기로 다짜고짜 영어를 뱉었으면 어련히 알아서 눈치채셔야지. 네 정체를 정말 몰랐으면 지구에서 사용 인구수가 제일 많은 중국어를 먼저 시도하지 않았겠어?”
그때였다.
엘크의 가면을 쓴 상대는 내 말을 듣더니 천천히 반응을 보였다.
컥컥대는.
마치 들짐승이 목을 열고 짖을 때처럼 공기가 섞인 기괴한 소리로 몇 번 웃더니, 이내 사람의 언어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게 아니겠는가.
-How?
하지만 그것의 뜻이 AI 음성으로 채 치환되기도 전에 상대방이 바로 행동에 나섰다.
어차피 정체도 들켰겠다 더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그녀는 얼굴의 가면을 시원스레 벗어던졌거든.
그런데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제법 생소한 광경이다.
단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밀어버린 눈썹과 머리카락.
심한 화상으로 피부가 온통 녹은 얼굴.
그러나 눈빛에는 여전히 평소의 이채를 품고 있는 젊은 나이의 여자라.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드러낸 브루클린은 입을 움직여 말한다.
이것은 번역기를 통해 곧 한국어로 변환되어 귀로 들어왔고.
“놀라지 않는군요.”
브루클린은 제 이질적인 외양을 보고도 표정 변화가 없는 상대가 영 신기한 모양이다마는.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 반전은 비스트의 실물을 마주친 순간부터 예상했다.
저 미국인은 예전부터 최상급의 재생 스킬 소유자로 유명했으니.
‘아마 하성과의 전투에서도 최대한 피를 흘리지 않도록 상처를 바로바로 회복했겠지.’
비스트의 가면 속이 민머리인 것은 머리카락을 떨어트려 DNA 감식을 당하는 상황을 회피하기 위함이었을 터.
‘게다가 면상이 저 상태면 서쳐들의 스킬에서 ‘같은 것’ 판정이 뜨지 않았을 수도 있겠군.’
아무래도 비스트가 그동안 잡히지 않았던 건 단순히 운 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아.
나는 육체에 저장된 버릇을 따라 콧대를 주물렀다.
일단 브루클린을 멈춰 세우려고 냅다 지르긴 했다만. 이거 너무 위험한 상황 같은데.
‘입막음을 위해 표적이 나로 바뀔 확률이 90%…….’
혹자는 이쯤에서 의문을 가질 것이다.
브루클린 모건. 미국에선 천사라는 이명까지 얻은 유명 S급 힐러가 어떻게 비스트일 수가 있었을까.
그간의 상식으로 생각해 보면 이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브루클린의 각성 능력은 치료계.
그리고 비스트는 이것과 거의 대척점에 있는 공격적인 공간 간섭계.
드러난 속성이 2개니까. 보통은 사람도 2명이 필요한 법이거늘.
그런데 사실 이 의문은 딱 한 가지. 어떠한 특별한 가정을 하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희귀 케이스네.’
브루클린 모건은 2가지의 각성 속성을 지닌 헌터다.
그 한마디면 모든 사실이 어긋남이 없이 맞아떨어지기에.
한데 이 듀얼 속성이라는 점이 자세히 파고들면 두려운 특징이란 말이지.
이건 단순히 남들보다 스킬이 많아서 좋겠다고 말하고 넘어갈 게 아니다.
마법이란 술사의 심상과 짙은 관련이 있는 개념.
그리고 지구인들은 요술을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자신의 뇌에 가장 강렬하게 박혀있는 이미지로 속성을 갖고는 하는데…….
브루클린은 아마 저 가슴속에 ‘2명의 다른 인간이 품은 것 같은 상반된 열망’을 숨겼기에 남들과 다른 결과를 얻은 것이리라.
그래.
단순히 페르소나 같은 가벼운 가면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 해리되어 있는 건가.’
브루클린 모건은 정신적으로 다중의 인격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은 원시의 술사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새로운 고민이다.
나는 이 던전에 들어오기 전 강창호에게 모방 도시에 들어간다는 문자를 보내둔 상태고.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 우리 계약자님은 오전 6시경쯤에 하루를 시작하시지.
그런데 문제는.
“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속성을 2개나 가진 미국의 사이코 앞에서 F급이 6시까지 못 버틸 것 같군.
역시 지금이라도 정하성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