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67
65화. 하동
“음…….”
나는 잠시 할 말을 골랐다.
물론 강창호는 성질 급한 한국인답게 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뭐, 어차피 네 진짜 등급 같은 건 딱히 중요하진 않지만.”
잠깐, 뭐라고?
“향상심의 조건쯤이야 게이트 장비로 일시적으로 끌어올리면 그만이거든.”
“어, 그럼.”
“F급도 얼마든지 적용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소리지.”
이게 생각보다 기준점이 낮아서.
강창호는 팔짱을 낀 자세로 그렇게 주절거렸다. 나는 다시금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조건 따위는 언제든 채울 수 있다니.
“그럼 왜 여태껏 그러지 않은 거죠?”
이때. 짧은 의문이 들었다.
S급의 힘이면 장비를 억지로 채우는 것도, 같은 각성자를 죽이는 것도 쉬웠을 터.
이놈은 어째서 날 아직 살려뒀지?
“그거야 뭐…….”
강창호는 내 질문을 듣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눈썹을 으쓱했다.
“윤리 문제?”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너희는 툭하면 사람을 무슨 나쁜 놈 취급하듯 하는데, 나도 도덕심이란 게 있어.”
“….”
“그런데 어떻게 죄가 없는 헌터를 함부로 죽이겠어?”
“그래요?”
“향상심을 쓸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당사자와 합의를 볼 생각이야.”
오늘 나온 이야기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멀쩡한 소리긴 하다만.
“합의를 시도했는데도 상대방이 끝까지 싫다고 하면?”
교섭이 결렬될 경우를 예로 드니 아니나 다를까. S급 헌터의 본색이 드러났다.
“그건 좀 고민해 봐야지.”
강창호는 절대 포기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흠, 살면서 남의 스킬을 탐내본 적은 없는데.”
“향상심이 있는데도?”
“사실 이게 횟수 제한이 제법 빡빡해.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다 보니 어지간한 능력은 눈에 안 차…….”
도대체 이놈은 나를 무슨 계열 각성자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뭐가 됐든. 이제 와서 부정해봤자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강창호는 이미 모종의 확신에 차 있는 것 같으니.
그렇다면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겠군.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가시게? 그래서 내 제안에 대한 답은?”
이 와중에 상대의 느긋한 말투가 귀에 꽂혔지만,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카페를 나갔다.
화낼 테면 화내보라지.
어차피 이쪽은 죽음을 앞둬서 눈에 뵈는 것도 없으니까.
‘강창호의 저 잘난 윤리 의식이 과연 며칠이나 갈는지.’
나는 불쾌한 커피 가게를 뒤로하며 휴대폰으로 납골당 예약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조만간 뒤질 것 같으니 미리 한 자리 맡아두련다.
***
김기려가 떠난 후.
마찬가지로 카페를 나온 강창호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이게 얼마 만에 마셔보는 브랜드 커피더라.
‘이런 가게는 안 온 지 꽤 됐는데.’
확실히 이럴 때는 F급이 부럽긴 하다.
점원이 벌벌 떨며 잔돈을 흘리지도 않고, 잠깐 방심했다고 주변인이 기절하지도 않으니.
이래서 그 헌터가 각성치를 떨어트리고 다니는 건가.
“하.”
강창호는 목소하며 아까의 대화를 곱씹었다.
정말이지 웃기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S급의 압박을 태연하게 견디면서 꿋꿋이 하급 각성자 타령을 하다니.
‘게다가 밑바닥 중의 밑바닥인 F급.’
진짜 F급은 아까의 제안에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S급이 무서워서라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을 테지.
그러나 김기려는?
아주 눈을 부라리며 거절하던데 말이야.
‘너무 겁이 없어.’
강창호는 길을 걸으며 사색했다.
일단 김기려가 향상심의 강자 조건에 들어맞는 건 확실하다.
문제는…….
이 조건을 좀 과도하게 충족하고 있을 경우인데.
‘그리드를 죽였다니 최소 A급이긴 하겠군. 하지만 과연 그게 끝일까?’
강창호는 상대의 마지막 행동을 조용히 되뇌었다.
-후우.
-이대로 가시게?
마른 자작나무처럼 매서운 눈매를 가지고 있는 그 헌터는 자신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었다.
-…….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건조한 시선으로 사람을 한 번 흘기고 말다니.
그 눈빛으로 말미암아 강창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놈, 머릿속으로는 S급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거만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지. 그래. 향상심을 가진 누군가가 달려들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흐음.”
추측하면 할수록 진실은 모호해진다.
김기려의 진짜 등급은 대체 뭘까.
‘그리드를 처치하고, 동시에 별것도 아닌 놈들에게 납치를 당했었지.’
향상심의 기준보다 위?
아래?
어쩌면 S급 수준일 수도 있고.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강창호는 그가 자신보다 강할 가능성도 생각은 해두기로 했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수리가 벌써 다 됐어요?”
임시 대피소 텐트 안.
구운 계란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던 나는 간만에 희소식을 접했다.
원룸의 개수 공사가 드디어 끝났댄다.
반이나 갈려 나간 건물을 복구하는 데 불과 한 달이 들지 않다니. 지구의 술사들도 꽤 하는데.
“그럼 내일부터 다시 입주할게요. 예! 들어가세요. 집주인 어르신.”
통화를 마친 후.
조용히 짐을 정리하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무 일도 없었네.’
그 S급의 제안을 거절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
상대가 금세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이번 주는 그야말로 평화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고요함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이 순간에도 강창호는 감시를 이어나가고 있을 테니 말이다.
‘폭풍전야로군.’
더욱 두려운 점은 바로 상대방의 감시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
일단 선우연과 같은 서쳐 스킬일 가능성은 없다. 그건 표적의 상태는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치면 참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퇴물이 됐다 해도, 내가 설마 원시 술사의 미행 하나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이 근방에선 강창호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지금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그랬어.’
본인이 접근한 게 아니라면 설마 도구를 사용했나?
도청기, 위치추적기, 감시카메라.
김기려의 뇌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게 붙어있었다면 오히려 더 빨리 발견했을걸.”
그렇다면 남은 경우의 수는 2가지.
첫째, 내가 알지 못하는 지구의 기술로 감시했다.
둘째, ‘용의 눈’이 문제다.
“흠.”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무게가 실렸다.
강창호와의 첫 만남을 돌이켜보면 얼추 짚이는 바가 있으니까.
‘김기려의 시체에서 무언가 ‘보고’ 있는 거네. 그걸로 위치도 특정하는 거야.’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생각보다 사생활 침해는 없을지도 모른다.
자기 눈으로 직접 봐야만 위치를 알 수 있는 거라면, 상대는 지금쯤 어딘가 높은 건물 위에 올라가 있을 테니.
“용의 눈이라.”
척척척.
나는 여벌 옷을 개며 고심에 빠졌다.
“그것만 속일 수 있다면…….”
강창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향상심의 발동을 망설이고 있다.
그리고 이쪽은 추적을 벗어날 때 쓰는 좋은 마법을 몇 가지 알고 있다.
딱 좋은 상황 아닌가?
‘역시 튀자!’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결론 내렸다.
그 향상심 보유자가 방심하는 사이 멀리 도망쳐버리자고 말이다.
하지만 이 계획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아.”
제기랄. 그러고 보니 마력 증폭제 여분이 없었지!
“갑자기 또 골 아파지네.”
하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셔댔으니 슬슬 떨어질 때도 됐나.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크게 걱정할 건 없다.
대부분의 재료는 잉여분이 있으니까. 새로 채취해야 하는 것은 기껏해야 1~2종뿐이다.
그런데 이런 맙소사. 하필이면 그중 하나가 멸종됐네.
“뭣이라?”
나는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
헌터 협회 어플로 정보를 검색하자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물약 제조에 가장 핵심적이던 게이트가 모조리 공략되어 사라진 상태라니!
‘안 돼! [살인벌의 둥지]가 없으면 약을 완성할 수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지역 설정을 전체로 바꾸고 다시 검색하니 곧이어 원하는 정보가 떴다.
휴우.
‘뭐야, 괜히 쫄았잖아.’
서울에서만 자취를 감췄을 뿐이지 다른 지역은 아직 살인벌의 둥지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어디 보자. 그럼 자세한 위치는.
‘경상남도 하동군이랑 경상북도 구미시. 이렇게 각각 하나씩?’
둘 다 생소하군. 하긴 외계인에게 지구의 어딘들 그렇게 느껴지지 않겠느냐마는.
“하동, 하동이라.”
이 순간, 왠지 하동군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분명 하동이라는 말을 어디에선가 봤는데, 뭔가 검색하다가…….’
하지만 한참을 고민해 봐도 뚜렷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 기시감을 무시하며 짐가방을 챙겨 들었다.
잘 기억나질 않는 걸 보니 어차피 쓸데없는 웹서핑이었겠지.
***
김기려의 원룸으로 돌아가는 길.
깜빡깜빡.
신호등 불빛이 노랗게 점멸한다.
‘다음 신호에 가자.’
나는 차분히 멈춰 섰다.
F급 따위는 툭 치면 죽을 정도로 연약하기에 차조심은 기본 중의 기본.
“…….”
그리고 이때.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내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음?”
허리까지 늘어진 까만 생머리. 그리고 저 특유의 반듯한 차림새. 이제 모를 수가 없지.
‘선우연.’
협회 직원이다.
나는 발견한 지구인을 무심결에 눈으로 좇았다.
그러자 조금 특이한 행동이 관찰됐다.
사거리 건너편에 있는 그 지구인은 양손 가득 보따리를 들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
선우연은 옆에 서 있는 노년의 여성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선우연은 이내 무릎을 굽혀 상대를 등에 업었다.
그 후에는 뭐, 예상했다시피.
“죄송합니다. 저희가 이런 건 빨리빨리 고쳐놨어야 했는데, 도로가 다 파여있어서 불편하셨죠?”
“아유, 아니에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젊은 학생.”
“짐은 여기에 두면 되나요?”
선우연의 도움으로 노인은 무사히 건널목을 건넜다.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구인들은 아직 양심이 남아있구나.’
나의 고향. 알파우리.
그 행성의 시민들은 여러 가지로 윤리 의식이 박살 나 있었으니까.
그곳에선 소위 말하는 ‘친절한’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이에 대한 사회적 분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쨌든 마법의 고도성장이 좋은 효과만 가져온 건 아니라 치고.
‘우리 행성은 이타적인 유전자가 다 뒤진 지 오래인데.’
덕분에 나는 이런 장면만 보면 감회가 새로웠다.
‘착하네.’
나는 선우연의 행동에 작은 호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순간,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뀐다.
길을 건넌 나는 선우연과 딱 마주쳐버렸다.
상대는 노인을 배웅하느라 줄곧 여기에 멈춰있었으니 말이다.
“선우연 씨, 안녕하세요.”
“어.”
“오래간만에 뵙네요. 어디 가시는 중이었어요?”
나는 자연스런 인사를 건넸다. 스스로 봐도 기가 막힌 솜씨다.
캬, 이걸 보고 누가 날 외계인이라고 의심하겠어?
“저야 밥 먹으러 나왔죠. 협회도 지금 점심시간이거든요.”
“아하.”
“오늘은 팀원들이 다 외근을 나가서 혼자 간단히 때울까 했는데.”
예상대로 선우연은 별문제 없이 인사를 받아줬다. 표정은 좀 딱딱했지만.
“김기려 헌터님은 여기에 무슨 일로?”
“집 가는 길이에요.”
“그럼 방향이 같네요. 저는 저기 있는 분식집에 갈 생각이라.”
짧은 대화 후.
우리는 마침 가는 길이 비슷했던 탓에 잠시 함께 걷게 되었다.
하지만 별다른 잡담은 오고 가지 않았다. 평소에 서로 자주 보는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생각보다 금방 대화가 끊겼네.’
나는 어색한 침묵을 잊기 위해 괜히 보도블록을 관찰했다.
그런 찰나였다.
“저기, 기려 씨.”
여태 조용히 있던 선우연이 불쑥 첫 마디를 꺼낸다.
나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바짝 긴장한 태도의 선우연.
“그으,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사실 제가 그동안 드릴 말씀이 좀 있었는데요.”
“네?”
“혹시 식사가 아직 이시면…….”
그 헌터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다 간신히 운을 뗐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