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70)
370화. 생과 사가 무너진 땅 (7)
사자의 심장이 맥동하자 엘릴 기사들이 일제히 우렁찬 포효를 토해냈다.
명천사가 둘이나 임한 가운데, 아이작은 속이 기이한 열기로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동자에 연한 황금빛이 물드는 가운데, 이미 들어본 적 있는 속삭임이 다시 들려왔다.
[날 받아들여.]오월의 검이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사실 아이작은 그녀가 굳이 오지 않아도 상황이 정리되리라고 생각했다. 베셰크에게서 전혀 투쟁의 열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만히 상황을 관조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도 빛의 법전 쪽 천사가 임해야 동맹이라는 느낌을 병사들에게 줄 수 있었다.
마침내 아이작의 눈이 태양처럼 불타올랐다.
그의 머리 주변으로 녹슬고 부러진 검들이 하나둘 나타나 후광처럼 맴돌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오월의 검이 임한 것만으로도 파수자의 등대를 사용하는 부담이 훨씬 경감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파수자의 등대는 다른 명천사들의 기운마저 공격했기 때문에 아이작은 등대의 불꽃을 꺼뜨렸다.
무려 세 명의 명천사들이 땅에 임한 가운데, 병사들은 처음으로 신의 전사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광휘과, 열기가, 바람이, 그들을 신성한 군대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오오오오오!”
병사, 기사, 성기사들, 심지어 사제들조차 가리지 않고 포효를 토해냈다. 끓어오르는 생명력이 죽음마저 잊고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멸하는 죽음은 그저 그들을 조용히, 존재감 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아이작은 이사크레아 여명군이 이 세계에서 제일 강력한 군대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명천사들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전황을 뒤집어 놓을 만한 자들이다. 그런 명천사들이 이 자리에 셋이나 모여 한 존재에 대적하고 있었다.
베셰크는 신이지만, 신은 신 나름대로의 제약이 있다.
엘릴이 땅에 다시 강림해 깽판 치는 일이 없듯이.
하지만 이 소란 속에서 오직 명천사들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명천사들은 신의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 땅에 임한다. 때문에 그들은 잠시도 조용히 있지 않는다. 신의 음성을 전달하거나, 의지를 전달해 파괴하거나, 다른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지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명천사들조차 불사 황제의 앞에서는 침묵할 뿐이었다.
아이작은 그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베셰크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저들이 당신을 이 땅에 붙들어 놓는 의지들이군요.]베셰크는 휘황찬란한 명천사들과 분연히 일어선 병사와 전사, 기사들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명천사들과 달리 일말의 긴장이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사태를 파악하고 원인을 분석해 기록하는 사람처럼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제 이해했습니다. 귀하께서 왜 그렇게 제게 맞서는지.]“……드디어 인류애와 인간 찬가에 대해 눈뜨기라도 한 건가?”
당연하지만 그런 터무니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셰크는 확신하듯 대답했다.
[당신과 당신들, 모두 속고 있군요.]“……뭐?”
아이작은 이 황당한 말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선 투할린이 빠득 이를 가는 것이 들려왔다. 천둥 장인의 맥박 소리가 모루를 두들기는 망치처럼 요란하기 때문인지 이를 가는 소리조차도 요란했다.
하지만 결국 베셰크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베셰크는 아랑곳 않고 슬픈 듯한 목소리로 자기 할 말만 속삭였다.
아이작은 ‘그들’이 신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속고 있다’는 말은 심지어 천사들까지 겨냥한 말이라는 사실도.
베셰크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는 대신, 더 이상 이 자리에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망토를 접었다.
검은 먹구름이 밀려오면서 서서히 베셰크의 존재감을 지우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베셰크를 향해 웃기지도 않은 조롱의 말들을 던졌으나,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베셰크가 물러나는 듯하자 아이작은 자신의 안에 깃든 오월의 검이 안도하는 것마저 느꼈다.
아이작은 다른 천사들도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귀하를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이작.]베셰크가 밤바람 속에 섞여 달콤하게 속삭였다.
[귀하의 재능은 절대로 도태시킬 수 없습니다. 영원의 시간을 들여서라도 당신을 제 곁에 두겠습니다. 당신이 비로소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날, 당신은 이 땅의 황제가 되고, 저는 모두를 보살필 신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의 균형을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기에.]베셰크가 칼센에게도 제안했던 내용이었다. 칼센에게도 불사 황제의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했지만, 루트에 따라 플레이어가 그 자리를 빼앗을 수도, 양보할 수도 있었다.
이 절차를 통해 베셰크는 황제이자 신인 존재가 아니라, 진정한 신으로 거듭날 예정이었다.
그것이 불사 교단의 승리다.
달라지는 것은 없으나, 앞으로 변화하지 않을 미래가 예정된 승리.
[부디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천국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귀하가, 귀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생하며, 이 세계가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세계가 되도록 돌봐주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꺼진다는 놈이 왜 이렇게 말이 많…….”
[만약 그런 의미에서 사망보험에 관심 있으신 분은 부디 이 파란 장미잎을 소지하고 계시길. 보험설계사가 찾아갈 것입니다.]그와 동시에 거센 돌풍이 일면서 파란 물결이 밀어닥쳤다. 마치 베셰크의 몸이 찢어지면서 전신이 파란 장미로 변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병사들이 파란 장미 물결을 뒤집어쓰자 뒤늦게 로튼해머가 노성을 토해냈다.
“아무도 장미잎에 손대지 마라! 전부 모아서 불태워 버려라!”
충분히 재빠른 대응이었으나, 모순되는 지시라는 점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리고 불가능한 지시이기도 했다. 파란 장미 잎은 마을 전체를 수북하게 덮을 정도로 흩날린 채였다. 아무리 애써 끌어모아도 반드시 숨겨진 잎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당했군.’
베셰크는 그 말만 마친 채 밤안개처럼 사라졌다.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이때까지 무수한 성기사와 사제들을 꼬드겨 왔나 싶을 만큼.
아이작은 성을 내며 돌아다니는 로튼해머에게 다가갔다.
“됐습니다. 어차피 작정하고 숨기면 찾을 수 없어요. 병사들의 신앙을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간특한……!”
“믿음으로 무장한 여명군과 성기사들, 사제들도 저 꼬드김에 넘어갔습니다. 병사들을 닦달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겠지요…….”
로튼해머는 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아이작의 말대로였다. 베셰크가 이렇게 난장판을 놓지 않았더라도 불사 교단의 언데드들은 언제고 비슷한 꼬드김을 반복했을 것이다. 로튼해머는 더 춥고, 배고프고, 목숨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비슷한 제안을 받아본 적도 있었다. 전우가 그 꼬드김에 넘어가는 것도 보았다.
“……최소한 빨리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 신의 기적이 머문 장소에 머물고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흔들릴 가능성이 있으니.”
그건 아이작도 동감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베셰크가 사라지자 주변에 감돌던 열기 또한 가라앉았다. 아이작은 투할린이 지친 표정으로 주저앉는 것을 보고 천둥 장인이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델레드 또한 사자 기사를 돌려보냈다.
[아이작.]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의 내면에서 오월의 검이 아직 물러나지 않은 것을 느꼈다.
[여명군이 찢어질 것이다. 분열에 대비해라.]***
“내가 본 게 대체 뭔지 모르겠다.”
이사크레아 여명군은 난데없는 한밤의 습격 아닌 습격 탓에 허둥지둥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비를 마쳤을 때에는 새벽이나 다름없었지만, 이 마을에 더 오래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작 곁에는 게벨이 함께 걷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과 숨길 수 없는 동요가 가득했다.
게벨은 물론 성기사 출신이지만 성기사의 갑옷이나 무장이 없는 것은 물론, 기적도 쓰지 않는다. 때문에 칼솜씨 좋은 일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콧대 높은 기사들처럼 구는 것도 아니니 일반병들은 대부분 검술교관인 게벨을 좋아했다.
아이작이 그를 굳이 불러 대화한 것도 게벨이 가장 일반병과 가까운 직책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아이작이 묻는 것은 간밤에 베셰크가 드리운 ‘죽음’의 풍경이다. 그것이 예언인지, 환각인지, 아니면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를 보여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게벨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내 가슴을 파고들던 칼과 창들.”
평범한 전장에서의 죽음이다.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게벨에게 그 정도는 충격이 될 만한 모습도 아니리라.
그러나 게벨은 거기에 하나를 덧붙였다.
“나를 죽인 것은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칼과 창, 그리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
게벨은 아발란체 성기사단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찾아왔다. 이미 그들이 개종해 버렸다면 안식을 주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아직 노예인 상태라면 불태우는 것으로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 그러나 게벨은 동료들이 배교하고, 자신은 안식도 주지 못하는 최악의 죽음을 목격한 것이다.
“다른 병사들도 비슷한 것을 보았을까요?”
이사크레아 여명군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축 처진 상태였다. 어제 명천사들이 임하면서 극도의 고양감을 느낀 여파인지, 오히려 반동이 세게 찾아와 위축되었다. 심지어 에델레드나 투할린마저도 날카롭게 곤두선 상태였다.
‘하지만 명천사들을 부르지 않았다면 고스란히 붕괴할 위기였으니…….’
아이작은 그들을 탓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사실, 기분이 처지는 것은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탓한다면 비열하게 시작하자마자 찾아온 베셰크다. 신이면 신답게 어디 커다란 옥좌에 앉아 턱 끝으로 천사나 부릴 것이지, 어디 엉덩이 가볍게 나돌아다닌단 말인가. 말세가 따로 없다.
게벨은 아이작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아이작, 너도 보았나? 너에게 최악인 죽음이었나?”
“……최악의 죽음이긴 했지요.”
아이작은 쓰게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았는지는 말해줄 수 없었다. 게벨도 캐묻지는 않았다.
환각인지, 가능성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름 없는 혼돈을 경계하기에도 애매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름 없는 혼돈이 추구하는 미래 중 하나라면…….’
성지 루아에 도착한 다음 자신은 어떻게 될까? 자신의 몸을 열쇠 구멍 삼아서 혼돈이 이 세계로 비집고 들어올까? 그 어떤 신앙이 추구하는 미래, 심지어 불사 교단이 추구하는 온 세상의 언데드화조차도 아이작이 본 죽음에 비하면 천국에 가까웠다.
아이작은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매만졌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조치를 해두긴 했지만.’
아이작은 갑옷에 이름 없는 혼돈이 폭주하지 못하도록 몇 가지 조치를 해두었다. 익사자 왕과의 싸움에서 효용성은 입증되었지만, 자신이 완전한 죽음에 이를 정도가 되었을 때에는 어떨지 모른다.
애초에 성물 몇 개와 기적 몇 가지로 ‘그런’ 것을 완전히 막아내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그저 아이작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이솔데가 보고 싶군.’
아이작은 문득 한 사람이 보고 싶어졌다. 자신이 어떤 꼴을 하든,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든, 그 사람이 곁에서 손을 잡아준다면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아이작은 세상과 끝과 끝에 갈라져 있었다.
“성배기사님, 후방에서 누군가 다가옵니다.”
“뭐?”
“언데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선두에 여자도 있다는 보고입니다.”
아이작은 전령의 보고에 이사크레아 여명군에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하고 후방으로 달려갔다.
죽음의 군대가 출현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작은 숨 가쁘게 달리면서도 혹시나 했다. 그저 상상만 할 뿐이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아이작은 그녀와 마주쳤다.
레오노라는 아이작의 표정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거창한 환영 인사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나름 동업자인데 그렇게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건 좀 심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