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99)
99화. 고해 (3)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이솔데는 한참 제자리를 맴돌았다.
‘촉수라니!’
그녀는 소리를 지를 수조차 없었다. 누군가 들으면 안 되니까.
아이작 앞에서는 허둥지둥 그에게 내려진 시련이자 고난의 상징이라느니 떠들긴 했지만, 정말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니었다.
촉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어떤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 이솔데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혼돈의 신을 숭배하던 자들에 대한 역사는 거의 다 지워진 상태지만, 그 끔찍한 악명만큼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그가 보여 준 됨됨이와 업적은 그녀가 배운 모든 것과 상반되고 있었다.
물론 기만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이작은 경건한 성배기사로 숭배받으며 많은 이득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단심문관 사이에서는 늘 같은 경구가 잠언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가장 신실한 자가 가장 뼈아픈 배교를 할지니.
루앗딘에게 반역한 엘릴, 엘릴의 심장을 뽑아버린 붉은 성배, 빛의 법전의 주교였지만 배교하고 사후세계를 지상으로 끌어내린 베셰크.
신화 속 세계는 인간 세계만큼이나 배신과 음모의 연속이었다.
이단심문관들은 그런 일이 또다시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니 아이작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즉, 아이작이 촉수를 보인 순간 이솔데는 그를 즉시 제압했어야 했다. 불가능하다면 탈출하여 알리거나.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솔데는 이미 빛의 법전 교단이 교리를 잘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이작은 성배기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이솔데는 차마 아이작을 악이라고 몰아붙일 수 없었다.
‘내 신앙심이 흔들리고 있는 건가?’
아니,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것은 교단에 대한 신뢰였다.
아이작이 교단을 바꿀만한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솔데는 자신이 맡은 역할이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아이작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앞으로도 그녀는 아이작을 감시할 것이다. 다만 목적은 달라질 것이다.
아이작이 악인의 면모를 숨기고 있는지, 혹은 악인이 되어가지는 않는지.
그러나 동시에 이솔데는 다른 걱정도 품고 있었다.
‘가장 신실한 자가 가장 뼈아픈 배교를 할지니.’
이단심문관으로서의 직무를 포기하고 교단에 대한 충성심을 잃은 자.
어쩌면, 배교를 저지른 이는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
아이작은 방 안에 은거하는 동안 이번 전투를 통해 얻은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우선 알 두아자드를 처치하고 얻은 보상…….’
알 두아자드를 처치한 순간, 아이작은 사후세계에서 범람해온 혼돈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이름 없는 혼돈은 착실하게 보상을 제공했다. 비록 알 두아자드를 포식할 수는 없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보상이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해방주교 ‘알 두아자드’ 처치에 만족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어두운 성찬례’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어두운 성찬례 / 촉수로 대상을 포식하거나 ‘성찬’으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성찬의 질에 비례하여 신앙이 상승합니다. 성찬을 목격한 적은 공포 혹은 혼돈 상태에 빠지지만, 당신의 추종자들은 종교적 황홀경에 빠집니다.]‘이거 나한테 좋은 특성 맞아?’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스킬 설명을 읽었다. 이름 없는 혼돈보다 붉은 성배 클럽에 어울릴 법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적을 산 채로 씹어 먹는 촉수나 피 빨아먹는 뱀파이어나 크게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신앙을 늘릴 필요도 느끼고 있었고, 잘 써먹기에 따라 광역 디버프, 혹은 아군에게는 광역 버프도 부여한다고 하니 나빠 보이진 않았다.
‘종교적 황홀경’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낳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은 알 두아자드에게서 빼앗은 성물.’
아이작은 헤사벨에게 영대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헤사벨은 이미 준비한 듯 바로 내놓았다. 상당히 강한 기적을 즉발성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영대였다. 빼앗고 보니 역시나 상당한 가치가 있는 성물이었다. 이미 몇 군데 타들어 간 흔적이 있지만 아직 8개의 문양이 남아 있었다.
아이작의 눈앞에 이 물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창이 나타났다.
[예비된 자의 영대(S)] [베셰크 주교가 아직 배교를 저지르기 전 사용하던 영대. 강력한 제례용 도구로, 미리 필요한 제물과 기도문만 적어 놓는다면 복잡한 의식을 생략하고 기적을 발휘할 수 있다. 사용되어 그을린 흔적은 오직 베셰크 주교만이 지울 수 있다.]분열 예식과 같은 제례용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불사 교단의 신, 베셰크와 직접 연관된 아이템.
하지만 분열 예식보다는 등급이 낮았다. 분열 예식은 신의 탄생과 직접 연관된 아이템이지만, 예비된 자의 영대는 단순히 베셰크가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에 소지했던 물품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신의 물건이어서 그런지 제례용으로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분열 예식은 강력한 제례용 촉매로, 많은 절차와 재료를 생략하게 해 준다. 하지만 이 영대는 촉매로써의 역할 외에도 미리 복잡한 과정을 치러 둔다면 나중에 필요할 때 기적을 즉시 발동할 수 있는 형태인 듯했다. 마치 총알을 장전하는 것처럼.
‘문제라면 무슨 기적이 있는지 모른다는 건데.’
아이작이 아무리 들여다봐도 베셰크 주교의 영대라는 정보만 보일 뿐, 무슨 기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발동했다가 언데드 소환 기적 따위가 나타나면 곤란해질 수 있었다.
‘이건 그냥 버프용 아이템으로 가지고 다니는 게 낫겠어.’
[‘예비된 자의 영대’ 성물을 습득하였습니다.] [숭고한 여정 효과가 더욱 강해집니다.]불사황제 베셰크와 얽힌 사연이 있는 성물이었기 때문에 아이작이 가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버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불사 교단을 적대시하는 상황에서 반납할 수도 있는 것도 아니니, 이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작은 듀라한과 싸우던 때를 떠올렸다.
그 듀라한은 분명 보통 검사가 아니었다. 엘릴 교단에서도 이름있는 검사였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였는지 알아낼 단서는 전혀 없었고, 다만 그가 무기로 쓰던 부러진 검 손잡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검 손잡이는 딱히 기적도 힘도 없어서 가치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보관해 두기로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와중, 아이작은 자신의 내면에서 검 쪽을 향해 솟구치듯 발현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기적이나 상급 검술과는 다른 무언가였다.
듀라한의 검술 실력은 명백히 자신보다 우위였다. 하지만 그의 검술 실력을 흡수하면서, 아이작은 자신의 한계를 깨뜨린 것이다.
‘이것도 칼센의 재능 덕분이겠지. 칼센은 대체 얼마나 강했던 거지?’
만들어진 신의 후보, 명천사로 예비된 성기사였으며, 불사 교단의 이인자까지 올라가는 존재였으니 강한 것은 당연했다. 그런 존재가 자신에게 잡아먹혔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기이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이 능력만큼은 상태창으로 확인이 되지 않으니 방에 은거하는 동안 명상을 하면서 되새겨 보기로 했다. 그때의 감각을 다시 깨우칠 수만 있다면 그의 수준은 확실하게 한 단계 진보할 것이다.
‘적어도 게벨이나 그 이상…….’
성기사들 중에서는 최상위권에 속하는 수준이다. 아이작은 눈을 감고 듀라한과의 대결을 되새겼다.
***
땅, 땅.
금속을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성 구석에 마련된 대장간은 한동안 쓰는 사람이 없다가 갑자기 피어오른 열기와 망치질 소리에 오랜만에 기지개를 켰다. 망치를 든 남자는 맹렬하게 모루에 망치질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힐끔거리며 망치질하는 남자를 훔쳐보았다. 땅딸막하지만 단단한 체구에 덥수룩한 수염 곳곳이 그을린 모습. 이제는 대륙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알려진 바로 그 드워프였기 때문에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백 년 넘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화로 장인이라니.
하지만 함부로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작의 보호를 받는 손님이라는 경고를 들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화로 장인은 걱정 없이 망치질을 할 수 있었다.
누군가 등 뒤에서 말을 걸기 전까지는.
“어르신.”
요란한 쇳소리를 뚫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치질을 하던 화로 장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위아래로 말을 건 여자를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이단심문관 아가씨로군.”
“이솔데 브란트입니다.”
이솔데가 정중하게 대답하자 화로 장인은 뻣뻣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울스텐이오. 좀 대꾸가 투박해도 이해해주시구려. 원래 내 말투가 이 모양이니…… 비록 신앙은 달라도 은혜를 모르는 놈은 아니오.”
울스텐은 다리 위에서 불사 교단의 언데드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자신을 구하러 온 이솔데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단심문관인 이솔데는 그가 세상의 화로 교단의 사제인 화로 장인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고, 울스텐은 이단심문관이 자신을 보호하러 왔다는 사실에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은혜라니요. 같은 백제국에 속한 자들끼리 돕는 것은 당연하지요.”
“뭐……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소만.”
엘릴, 빛의 법전, 세상의 화로.
아홉 신앙 중 이 세 가지 신앙을 믿는 국가들을 뭉뚱그려 백제국이라 부른다.
물론 그 안에서 갈등이나 내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비슷한 가치를 지향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최근에는 빛의 법전에서 점점 교조적인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관계가 껄끄러워지긴 했지만, 함께 흑제국에 맞서왔다는 공통의 역사가 그들을 여전히 묶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솔데와 울스텐이 함께 불사 교단의 적들을 막아 낸 것은 꽤나 의미 있는 일이었다. 세상의 화로 교단이 고립주의에 빠져들면서 그럴 일이 최근에는 거의 없었으니까.
그리고 세상의 화로 교단이 고립주의에 빠져들게 된 이유─이단심문관이 이렇게 겸손하게 나오자 울스텐은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아는 이단심문관답지 않은 반응이군. 다들 콧대만 높아서 말 몇 마디 나누다 혈압 올라서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 급하지 않다면 만들면서 이야기해도 되겠소? 중간에 그만두면 품질이 떨어지거든.”
울스텐은 두들기던 쇠를 다시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솔데는 명성이 자자한 화로 장인이 손수 두들겨 뭘 만드나 하고 자세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전설적인 명검을 만드는 것 같진 않았다.
“정(釘)입니까?”
석공이나 광물을 캐낼 때 쓰는 커다란 대못 같은 도구였다.
“그렇소. 조만간 필요할 것 같아서.”
화로 장인들이 신비로운 화로의 기적을 이용해서 마법 같은 무기를 만들어 낸다고 알고 있던 이솔데는 울스텐이 평범하게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정 하나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화로 장인들이 바다를 건너온 것도 알려진 것만 백여 년 전 일이니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울스텐은 자신의 작업을 말없이 지켜보는 이솔데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듯 힐끔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썩 꺼지라고 하겠지만 이단심문관에게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으시거든 하시구려.”
“음? 아아, 큰일은 아닙니다. 지나가다가 화로 장인께서 제련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요. 혹시 제가 실례를 저지르고 있는 걸까요?”
“흠, 아니오. 이건 자기 수양과 기도 같은 거니까.”
화로 장인들은 세상의 화로 교단의 대장장이이자 사제다. 변화와 불꽃, 단련의 기적을 다루는 그들에게 이런 제련은 아침 기도와 마찬가지다. 빛의 법전 사제들이 기도하기 전에 제단의 촛대에 불을 붙이듯, 이들은 화로에 불을 피워 올리고 쇠를 두드리는 것이다.
울스텐이 이솔데를 힐긋 보면서 말했다.
“할 말이 없다면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예?”
“성배기사는 어떤 사람이오? 수도원에 돌아오고 나면 금방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얼굴도 보기 힘들군. 부상이 그렇게 심한가? 듣기로는 천사도 꺾었다 하던데.”
“아, 아이작 님이라면…….”
이솔데는 아이작에 대해 이야기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아이작과 함께 보낸 시간이 길다 할 수는 없지만 이 영지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인연이 오래된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솔데는 아리엣 수도원에서 아이작의 진실된 모습을 봤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잘 알 수 없게 되었다.
버벅거리던 이솔데는 그를 만나본 사람이나 알 수 있는 말을 가까스로 내뱉었다.
“잘생겼지요?”
“……그것뿐이오? 에이단도 그렇고 어째 만나는 사람마다 다들 그 얘기를 빼놓지 않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