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1
1화.
1화
지루한 애프터눈 티타임이다. ‘금빛 가을 애프터눈 티’라고 이름 붙인 호텔의 작명 센스에만 99점을.
가을의 황금빛이라.
‘Golden Autumn’
이벤트를 홍보하는 글자를 본 순간, 남자의 시야 가득히 그림으로만 본 적이 있는 황금빛 밀밭이 어른거린다. 밀밭 속, 황금빛 물결을 가르며 달려가는 소년이 보인다. 엉뚱한 상상이다. 정작 밀밭에 몸을 밀어 넣으면 어느 높이까지 잠길지 알 수도 없는데…….
그러고 보니 밀밭에서는 빵 냄새가 나려나.
상상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남자는 부신 눈을 가늘게 뜨며 현실을 자각한다.
층고가 높은 점만 마음에 드는 호텔 라운지 내부로, 키의 세 배는 넘어 보이는 기다란 통유리창을 통해 말 그대로 금빛 가을 햇살이 쏟아진다. 남자의 눈길이 테이블에 세팅된 애프터눈 티 세트를 잠시 훑고 지났다. 남자의 시선이, 외모가 주는 단정하고 다정한 이미지와는 달리 냉소를 담고 있음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한다. ‘황금빛 가을’이라 이름 붙인 호텔 애프터눈 티타임은 지나치게 달고 쓰고 지루하다. 맞선을 본 후 두 번째 만나는 여자가 고른 장소였다. 핸드폰 너머 여자의 제안에 ‘그러시죠.’라고 감흥 없는 예의로 답하였다. 전화를 끊으며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티 셀렉션은 길고 다양했다. 찻잎을 시향하는 여자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고 얼굴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남자가 어떤 것을 선택했어도 그렇게 웃었을 테지만. 지독하게 쓰고 강한 티였거나 신맛으로 혀가 오그라들 지경의 티를 골랐어도 말이다. 맞선 상대는 M&P로펌의 아들 민지후니까. 하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남자에게 더 필요한 여자였다. 상대는 자문 서비스 재계약을 앞둔 거대 클라이언트의 딸이다.
“차는 입에 맞으신가요 ”
남자의 물음은 부드럽고 예의 바르다. 길고 깊은 눈매 속에 다정한 갈색 눈동자가 마주 앉은 여자를 담았다.
“좋아요.”
“다행이네요.”
남자는 찻잔을 들어 입에 대었다 떼어 냈다. 예상에서 한 치의 벗어남도 없는 리액션을 보이는 여자는 고상한 동시에 몹시 지루했다. 밋밋한 패션도 표정도 외모도 목소리까지 이름 빼고 다 졸리는 애프터눈 티처럼.
“변호사님은 차 맛이 어떠세요 이번 시즌 애프터눈 티 세트는 특별히 영국 황실 수석 셰프를 초청해서 기획했다고 들었어요.”
아, 역시 뻔한 물음과 의미 없는 정보. 민지후는 새삼스러운 듯이 “오, 그래요 ”라고 박자를 맞춰 답을 해 준다.
이 호텔의 라운지 바를 약속 장소로 선택하는 여자는 대체 두 종류로 나뉜다. 전통과 역사를 갖춘 최고급 호텔이라는 브랜드가 주는 호기심에 끌리거나, 유모차에 실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드나들던 익숙함에 습관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이다. 지금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후자이다.
“변호사님, 성함이 민지후우.”
여자는 후를 길게 빼어 여운이 남게 불렀다. 후우, 발음하는 산호색 입술이 동그랗다. 새삼스레 이름을. 당신, 나랑 선보고 두 번째 만나는 자리 아니었던가. 여자의 이름은 서수현이었다. 서병원을 브랜드로 만든 의료 재벌가 여식, 연년생 중 언니이다.
“네, 맞습니다.”
지후는 앞에 앉은 여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외모랑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실은.”
여자는 말을 끊고서 남자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제가 변호사님을 조금 알고 있었어요.”
“그런가요 ”
지후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변호사님 얼굴은 로펌 홈페이지에서 봤고…….”
“아, 네.”
그 어색하게 나온 사진을 말이지.
“변호사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제가 건너 아는 사람이 한 해 후배인데 졸업하고 뵌 적이 없어서 변호사님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별명만은 기억한다고. 별명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이름도 만화 주인공 같았는데, 별명은…….”
“아, 저런.”
지후는 주름이 깊이 잡히는 미간을 황급히 펴면서 활짝 웃었다. 뒷조사에 불쾌하다는 말 대신 예의 바른 답을 내어놓았다.
“그런 말씀을 하시니, 좀 부끄럽습니다.”
민지후의 중·고등학교 시절 별명은 안소니였다. 요즘 애들이야 웹툰의 누구누구라 해야 핫한 만화 주인공인 시절이지만, 당시 30대 영어 교사에게 최고의 만화는 그녀가 초등학교 시절에 탐닉했던 ‘캔디 캔디’였다.
‘넌 어쩜 웃는 것도 얼굴도 꼭 만화 주인공 같다니. 맞아, 꼭 안소니 같아.’
민지후가 알 리가 있나, 안소니를. 그 시절에도 캔디는 오래된 만화였던지라 안소니를 모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다음날로 학교엔 올드 패션 만화 캔디 캔디가 한바탕 돌았다. 물론 민지후는 끝까지 버티고 읽지 않았다. 1년이나 지난 후에야 내용을 알았는데, 그날 이후 민지후는 안소니 별명을 한층 더 격렬하게 증오하였다. 순정 만화 캐릭터여서 적당히 멋있겠거니 했는데 어이없게도 안소니는 캔디 캔디의 주인공도 아니었다.
남자 주인공은 테리우스였다. 멋진 건 그놈이 독식하고 있었다. 영국 귀족 사생아, 비밀, 터프, 신비로움, 반항아, 연극배우, 긴 머리. 심지어 계단에서 백허그와 ‘캔듸, 행복해야 해. 안 그러면 내가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 하는 오글거리는 멋진 대사까지. 그에 비하면 안소니는 장미나 키우며 장미처럼 웃는 소년이라나. 더없이 민망하고 불쾌했지만 민지후는 중·고등학교 6년 내내 별명이 안소니였다.
“제가 캔디 캔디 만화를 봤어요. 저는, 안소니가 제일 좋았어요.”
지후가 불쾌함을 감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여자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비쳤다. 아, 저……. 무언가 말을 더하려는 여자의 말을 끊으며 지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요.”
더 이상 안소니 별명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자리를 비우기 전, 예의 바르게 양해를 구하였다. 지후의 미소에 여자는 좀 안심이 되는 표정이었다.
지후는 레스트룸에서 손을 씻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저녁 식사까지 연결하지 않고 애프터눈 티로 마무리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더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 느릿느릿 라운지로 향하다 지후는 걸음을 멈추었다. 지후의 시선 끝에 여자 한 명이 잡혔다. 그리고 한 번의 의심도 없이 여자를 알아보았다.
얼마만인가. 그러니까 벌써 10년
대학 3학년 여름이었다. 사법고시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고서 무작정 지하철에 올랐다. 합격자 명단에 지후는 없었다.
[기운 내라.] [첫 시험은 경험이야.] [민지후, 합격했지 ] [술 사 줄게. 나와라. 붙은 선배가 쏜단다. 아님 낙방생끼리 한잔할까 ]손에 쥔 핸드폰 진동이 울릴 때마다 손바닥에서부터 팔을 타고 몸속 깊은 곳까지, 고목의 나이테처럼 검고 깊은 자국이 새겨지는 것만 같았다. 수십 통 쌓이는 부재중 전화와 쏟아지는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고 핸드폰을 껐다.
‘3학년에 뭘, 욕심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명백한 실패였다.
‘법조계의 성골 집안’
법대에 진학한 후 후광처럼 지후를 따라다니는 말이었다. 교수들조차 존경을 표한다는 법조 집안이라는 징표는 지후가 보유했는지 스스로도 확인할 바 없는 ‘리걸 마인드(legal mind)’에 대한 칭찬 혹은 찬양, 때로는 질시로 마무리되곤 했다.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전공 첫 수업부터 민가(家) 집안의 손이라는 딱지는 어지간히도 지후의 어깨를 짓눌렀다. ‘소년 급제해야지.’라는 구닥다리 같은 말이 은백빛 머리칼을 한 고상한 교수의 입에서 자연스레 나왔다.
지후는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서 뻑뻑해진 눈을 감았다. 동그란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합격하면 제일 먼저 찾아가리라 맹세했던 아이.
‘나 기다려.’
약속을 믿지 않는다는 아이에게 고집을 부렸다.
‘내가 기다릴게. 약속은 네가 해.’
벌써 3년 전 일이다. 상대는 까마득히 잊었을지도 모르는 헛소리였을지도. 지하철역 안내방송을 의미 없이 흘려듣고는 문득 귀에 꽂히는 대학교 이름에 충동적으로 내렸다. 그 아이가 진학했다는 대학교였다. 실은 내내 보고 싶어 일부러 2호선을 빙빙 돌았다.
그 아이의 첫인상은 엉뚱하고, 명랑하고, 유쾌했다. 동그란 얼굴, 동그란 코끝, 순하게 뜨는 커다란 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났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그 애를 떠올리면 웃음 끝에 마음이 애틋해지고 손거스러미를 뜯다가 벗겨진 피부처럼 아린 상처가 생겼다. 유달리 긴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며 두서없이 생각했다.
우연히 만나게 되면 안녕, 인사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자고 해야지. 밥을 먹은 후 영화를 보자고 할까.
지하철역을 빠져나가며 지후는 속도를 높였다.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길게 뻗은 인도 끝에 대학교 정문이 있다. 다가갈수록 걸음은 더 빨라졌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오르고 이마에서 잔잔히 땀이 배어났다.
어쩌면 우연에 베팅하는 일이란 운명을 거는 일이 아닐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로맨티시스트가 되어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우뚝 멈춰 섰다. 반소매 아래 드러난 팔 위로 소름이 자잘하게 솟았다. 그날, 베팅했던 우연은 일어났지만 운명은 비켜 갔다.
안녕, 길 너머 그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소니
소리 없이 남자를 부르고서, 여대생이 된 그 아이가 손을 높이 들어 반짝반짝 별 노래에 맞춰 율동하듯이 흔들었다. 옆에는 지후가 아는 얼굴이 바싹 붙어 있었다. 명문대 의대생이 된 그 아이의 남자 친구와 눈이 마주치기 전 시선을 황급히 틀었다. 목적지가 따로 있는 사람처럼 지후는 태연하게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베팅했던 우연이, 결국 운명을 결정한 건가.
지후는 길고 긴 지하철 계단을 하나씩 천천히 밟아 내려가며 계단이 끝날 때까지만 여자를 생각하자 마음먹었다. 달려오는 지하철을 보며 여전히 어른거리는 얼굴을 지우려 눈을 감았다. 오늘까지만, 그리고 오늘 이후 여자를 완전히 잊기로 했다. 눈에 맺히던 보석 같은 눈물이 그 애의 답이라 믿었는데,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나 기다려. 내가 고시도 빨리 붙고…….’
지하철 헤드라이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며 번쩍였다. 고백이 섬광 속에 흩어졌다.
정가흔.
그 아이의 이름이다.
고등학교 시절 익숙한 기억 속에 여자 아이는 낡은 교복 차림이거나, 나달나달해진 청바지에 색이 날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몸에 붙지 않는 듯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다. 어색하게 화장한 얼굴도 처음 본다. 끝을 동글동글 말아 부풀린 머리칼도……. 그럼에도 정가흔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호텔 로비의 센터피스를 보며 가흔의 입술이 와아, 하는 순수한 감탄으로 열렸다. 가흔은 놀이공원에 데려온 아이처럼 들떠 있음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모티브로 한 크리스털 장식 조명등을 감상하는 눈이 별처럼 빛났다. 꼭 10대 소녀 같다.
10대 소녀 때는 어땠더라…….
가흔은 유달리 눈이 크고 눈동자가 검은 여자애였다. 그 눈으로 한 번씩 지후를 빤히 쳐다보면 주위가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빛을 모으는 검정색처럼 가흔의 눈동자는 고요히 지후를 빨아들였다.
여전히 누군가를 바라볼 때면 그런 눈을 하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