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rmacy RAW novel - Chapter 14
14화.
14화
가흔은 흠흠, 뻑뻑해지는 목을 헛기침을 하며 가다듬었다. 캔디라면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하며 낭랑하게 노래했겠지만 정가흔은 역시 둘리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골 때리는 토니, 토니.”
기분이 벌써 좋아지기 시작했다. 가흔은 시뻘건 어묵 국물을 쭉 들이켜고는 노래를 이어 갔다.
“귀여운 안소니는 모두 개뻥이래. 호이 호이 안토니는 겁나 왕 재수. 뿡뿡!”
맨밥을 크게 떠서 입 가득 퍼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가흔은 ‘뿡이다, 뿡. 안소니 왕재수!’를 주문처럼 외쳤다.
맨밥을 욱여넣고 볼이 둘리처럼 볼록해진 여자애가 가슴을 탁탁 두드려 가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괴상한 노래는 뭐야, 저주 거는 주문인가 ’
자신만의 비밀 장소라 생각했던 곳에 둘리 한 마리가 앉아서 엉터리 만화 주제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자니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민지후는 쿡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다가가서 왁, 등이라도 밀어 버리면 여자애는 어떤 표정일까. 밥을 물고 있는 볼은 볼록하고 커다란 눈은 더 동그래지겠지 동그란 코끝까지 꼭 둘리 같겠다.
복도에서 정곡을 찌르는 비아냥을 내뱉고서 ‘너, 나는 못 속인다.’ 하는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던 여자애가 떠오른다. 발가벗겨지는 수치심과 동시에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맞추고 쳐다보자니 교복 깃 위로 여자애의 흰 목이 발개졌다. 안녕, 뻔뻔한 인사를 받고 동그래지는 눈이 꼭 만화 캐릭터 같구나 싶었다.
놀려 볼까.
불쑥 솟은 짓궂은 마음을 굳이 통제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쟤는 내 본성을 알잖아.
유일하게 안소니 민지후에게 적의를 품는 여자애. 이름이, 가흔. 정가흔이었다.
가흔이, 안녕.
한 번 더 인사를 해 볼까 싶어 다가서는데 여자애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부스럭거리며 교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네, 네. 송설희 선배님.”
듣는 사람도 없는데 소리 죽여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긴장으로 떨린다.
“아직, 네. 그러니까 제가 사진은, 네.”
“안소니 선배님 잘 보이지도 않아요. 교실에서 안 나와요. 찍을 수가 없어요. 하굣길이요. 네.”
“네, 홍장미 선배 따라가 볼게요. 오늘 화이트데이. 네, 넵.”
끊어진 핸드폰을 들고서 한참 쳐다보는지 고개도 어깨도 축 쳐져 있다.
“아오, 이 나쁜 놈, 미친 놈, 토 나와, 안토니!”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묻고서 울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가흔은 꾸역꾸역 밥을 마저 먹으며 “두울리. 두울리.”를 외치듯 노래했다.
커다란 솜사탕 덩어리 같던 구름이 서서히 움직이자 햇빛이 쨍하게 들이쳤다. 지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가흔을 바라보았다.
송설희의 위협이라. 계산하지 못한 변수인데 좀 놀림받고 말겠거니 했는데.
민지후는 눈썹을 찡그렸다.
홍장미는 또 뭐야.
며칠째, 똑같은 장소 똑같은 시간에 같은 여자애를 본다. 여자애는 매일 같은 모습으로 매일 같은 도시락을 먹고 있다. 한 손에는 단어장을 들고 맨밥을 크게 퍼서 우물우물 씹고, 목이 메이면 가슴을 탁탁 쳐 가면서 빨간 떡볶이 국물 같은 정체 모를 탕을 후룩후룩 소리를 내며 마신다.
정가흔, 1학년 8반. 어머니와 혼자 사는 아이. 이 지역구에서 가장 형편이 어려운 주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주소지가 있고, 당연히 생활보호대상자.
민지후의 아버지, 국회의원이자 학교 이사장인 민경국이 성적별로 한 학년에 다섯 명씩 주는 장학금을 받기에는 한참 모자란 성적이지만 입학 직후 치른 평가에서 수학과 과학 성적만은 월등하게 좋았다.
첫날 이후 여자애는 괴상한 둘리 노래는 부르지 않지만, 꾹꾹 밥을 씹어 삼킬 때마다 매번 목이 메는 것을 보면 밥알만이 아닌 다른 것도 삼켜야 하나 싶다. 목구멍이 좁혀지는 기분, 그래서 식도를 내려가는 물조차 동그랗고 탄력성이 있는 고무공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는 늘 그렇듯 가슴 사이가 뻣뻣하게 아파 왔다. 모든 것을 다 토해 버리고 싶지만 꾸역꾸역 삼키다 보면 또 삼켜졌다.
민지후는 태어나 보니 민경국의 장남이었다. 민경직, 민경수, 민경기가 큰아버지들이었고 법학계의 거목 민병훈이 조부였다. 민가는 대대로 내려오는 거부이자 존경받는 가문이었다. 특히 민병훈의 아버지는 민영완으로 대한제국시절 왕의 친족이자 고위 관리직을 역임했는데, 을사늑약 체결 당시 책임을 잊지 않고 조약의 부당함과 참담함 심정을 자결로써 알린 우국지사였다. 현대에 들어서도 그의 집안은 경외의 대상이 되는 법조계의 큰어른들이 즐비했고, 정계에 진출한 지후의 아버지 민경국은 정치의 젊은 새바람을 일으킨, 보수 진보를 통틀어 정치인들의 바람직한 이미지로 대표되는 상징적 존재였다. 또한 화려한 집안만큼 돋보이는 외모와 실력은 민경국을 단숨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타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아라.’
민병훈의 유언이었다. 젊은 나이부터 정치에 입문한 지후의 아버지 경국에게 병훈의 가르침과 유언은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기준이 되었고, 어린 나이부터 지후 역시 그 뜻을 자연스레 받들어야 했다. 눈에 띌수록 입에 오르내릴수록 사소한 행동 하나, 말 하나하나를 다듬고 골라야 했다.
한결같은 겉모습을 유지하며 겸손함과 온화함, 지성과 논리를 잃지 않는 큰아버지들과 아버지를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들은 마치 거울처럼 비슷비슷했다. 민영완의 직계손으로서 매일매일 그릇됨을 멀리하며 흐트러짐 없는 하루를 쌓아 가는 일이 호흡처럼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을사늑약이 이루어지던 시절, 전후 시절, 민주와 독재가 맞서던 시절, 그들이 겪어 냈던 시절과 너무 다른 시절에 태어난 어린 지후는 놀랍고 다행스럽게도 완벽하게 어울리는 후손이었다. 몸이 약해 지후 하나 외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던 어머니에게도 지후는 충분할 만큼 완벽했다.
완벽…….
어른의 기준으로 아이의 완벽함을 재단하는 일은 다분히 폭력적이었다. 갈등 없이 견디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민지후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대와 통제가 폭력적임을 깨닫기 전에 몸으로 이미 훈련되었고, 마음이 요동치던 사춘기에는 어린아이에게 가혹한 기준들이 나름대로 가치 있는 신념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어 스스로를 설득했다. 여태껏 흠결 없는 자손으로 씩씩하게 살아왔다. 이따금 정치인 아버지가 타인의 시선에 결벽적으로 예민하게 굴 때면 숨이 막히고, 긴장으로 굳은 목구멍으로 물 한 모금 삼키기 힘들었지만 민지후는 적어도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잘 살아왔다.
“지후야, 미안해. ……미안해, 내 아들.”
6학년이 되기 전 겨울, 어머니가 어린 지후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병색으로 창백했지만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어머니는 어울리지 않는 민가에 시집와서 1년 열두 달을 종종거리며 집안의 가풍과 위엄에 맞는 처신을 하려 최선을 다했다. 만화책과 가요를 좋아하고 천성이 유쾌하고 엉뚱한 생각에 골몰하여 종종 크고 작은 실수를 하던 어머니는 스스로를 늘 자책했지만 그럴 때마다 지후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는 아버지를 볼 수 있어 즐거웠다. 깜박하고 좀 태워 버린 쿠키나 파이는 이런저런 어설픈 데코를 하여 적당한 눈속임을 하였다. 그러고선 특유의 긍정성으로 밀어 붙였다.
“원래, 큰아버지들 단거 잘 안 드셔. 내가 혹시나 해서 큰아버지들 좋아하는 인절미를 콩고물에, 녹두 거피에, 쑥 인절미까지 삼색으로 준비했잖니. 분명히 쿠키나 파이는 모양만 보실 거야.”
요리의 실수는 디저트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종종 어머니는 간 조절과 물 조절에 실패하여 애매한 상태의 음식을 들고서 지후에게 물었다.
“지후야, 아버지한테 이거 국이라고 할까, 찌개라고 할까 ”
지후는 한 숟갈 맛을 보고는 식탁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아버지가 일찍 들어와 저녁을 드시는 날이면 흥얼흥얼 만화 주제가를 같이 부르며 저녁 세팅을 하였다. 눈이 마주치면 어머니는 지후를 향해 까르르 웃었다.
“그래도 이거 해물 하나하나 내가 손질부터 다 했어. 정성 엄청 들인 거야. 음식은 정성이잖아, 그치 아버지의 입은 좀 불만족스러울지 모르나 내 정성으로 몸은 좋아질 거라고. 물론 울 아들 지후도, 몸과 마음이 쑥쑥 클 거야. 엄마가 정성 조미료를 아낌없이 부었거든.”
어머니가 양팔을 벌리면 지후는 품으로 쏙 들어갔다. 이마에 닿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 뺨에 닿는 연약한 피부를 느끼며 포근함에 절로 눈이 감겼다.
엉성하고 포근하며 허술하고 온화했던 어머니의 품을 잃은 후, 내면 깊숙이 어느 한 지점에서부터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완벽한 민지후는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서서히 무너졌다.
새로운 어머니로 들어온 분은 민가 가문이나 아버지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특별한 노력 없이 조용하고 수월하게 집안의 대소사를 잘 치러냈으며 생활에 위화감이 없었다. 또한 최선을 다해 지후를 돌보았다.
시간은 조용히 흘렀고 동생이 태어났다. 동생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지후는 깨달았다. 새어머니는 지후에게 밑바닥까지 훑어 모은 최선을 쏟아부어 완벽한 어머니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동생 찬후에게는 인간적인 결함과 욕심을 가진 평범한 어머니라는 사실을.
몸살 기운으로 학원을 빠지고 이르게 귀가한 날이었다. 주방에서 낯선 활기가 돌았다. 자그마한 비명 소리와 웃음소리가 동시에 새어 나왔다. 바닥에 앉아 머리에 밀가루를 잔뜩 묻히고는 동생과 괴상한 모양의 빵인지 쿠키인지 정체 모를 반죽을 만들고 있던 새어머니가 지후를 보고서 벌떡 일어섰다.
“어, 어떻게 이 시간에…….”
얼굴에 스치던 난감한 기색과 당황스러움을 못 본 척하고 지후는 “엉아, 엉아.”라고 부르며 달려오는 자그마한 동생을 양팔로 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교복에 밀가루 묻어. 찬후 지금 엉망이야.”
주뼛주뼛 다가오면서도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새어머니를 보며 까닭 없는 슬픔과 그리움으로 지후는 입술을 깨물었다.
새어머니가 최선을 다한 도시락을 펼치고, 지후는 탁탁 가슴을 두드렸다. 밥 한 숟갈을 퍼서 입에 넣고 따뜻한 연포탕 국물을 삼키고, 색스럽게 지져 낸 전을 집어 먹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 좋구나.
여자애를 흉내 내며 지후는 피식 웃었다. 알레르기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점심시간만은 쏟아지는 시선을 피해 숨고 싶었다. 엉성하고 비뚤어진 민지후, 나약하고 겁 많은 민지후, 그 상태로 잠시 동안 무너져 있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