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흐악!”
관중석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풍압만으로 뒤로 밀려난다.
대련장 주변에 에테르 보호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돌의 여파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쾅!!!!!!!!!!!!
여러 에스퍼들이 힘을 모아 형성한 보호막이 한 방에 날아갈 만큼, 적독사와 ‘통곡의 벽’은 어마어마한 임팩트를 만들어 냈다.
‘역시…….’
구건이는 강해졌다.
이전에도 ‘통곡의 벽’은 구건이의 성명 절기나 다름없었다.
탱커의 본분에 충실한, 그 무엇으로도 뚫어 낼 수 없는 방패.
하지만 일전에 보았을 때보다 ‘통곡의 벽’은 훨씬 더 단단해져 있었다.
과거에는 유지원의 이빨에도 찢어졌던 통곡의 벽이, 이제는 적독사의 강력한 물리력도 버텨 낼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캬아아아아아아.
“으…….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아.”
“어디서 저런 괴수를 불러낸 거야? 난 게이트가 열린 줄 알았잖아!”
“과연…… 괜히 S랭크 에스퍼 자격을 얻은 게 아니었어……!!”
언제 봐도 적독사의 모습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마 이곳이 랭킹전이 아니었다면 모두가 혼비백산해서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강렬한 힘 대 힘의 대결.
성질 급한 적독사가 몸을 이리저리 꼬며 머리를 거세게 밀어붙인다.
이제까지 자신의 공격이 막힌 적이 없었던 터라, 그 기세가 한층 더 흉포했다.
적독사가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진다.
황당함.
그리고 더 진한 분노.
녀석에게 쏟아지는 에테르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걸 보니, 작정하고 ‘통곡의 벽’을 깨부수려는 듯하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
상식을 뛰어넘는 힘 대 힘의 대결.
지금 당장 둘 중 하나가 박살 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 구도다.
하지만.
균열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빠직.
빠직.
나와 구건이.
두 명이 차고 있던 구속구에서 불협화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적독사와 ‘통곡의 벽’의 기세가 세지면 세질수록, 그 불협화음은 더 크게 울렸다.
급기야,
파지지직.
“……!!”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펼쳤던 스킬을 회수했다.
구속구가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기 때문이다.
지직…… 지직.
본래 가지고 있던 방대한 에테르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탓에, 기운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대사건에 관중들은 물론이요 지켜보던 다른 헌터들의 눈마저 휘둥그레졌다.
“구, 구속구가……!!”
“말도 안 돼!!”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없지!! 한 번도 없었어!!”
“에테르가 얼마나 넘치칠래 구속구가 터져 버린 거야?”
나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V1에 물었다.
‘진짜 한 번도 없어?’
해외에서는 몇 건의 기록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일로 확인됩니다.>
‘오호…….’
V1의 대답을 듣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간다.
국내에서는 발생한 적이 없는 유일한 사건.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어느 누구도 구속구를 깨 버릴 만큼 강한 헌터는 없었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한정이긴 하나, 오늘 랭킹전에서 정점에 오른다면 그건 ‘현재’뿐만 아니라 ‘역사상’에서 최고의 헌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래저래 걸린 게 많은 한판이네.’
본래대로 돌아온 에테르를 갈무리하며 슬쩍 진행 요원들을 바라본다.
전전긍긍하고 있는 얼굴이 보이기는 하나, 특별히 무언가 액션을 취하지도 않는다.
그럴 만도 하지.
입가에 짓고 있는 미소가 살짝 비릿하게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원칙적으로는 둘 사이에 나서 구속구를 다시 채운다든가, 경기를 물린다든가 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 자리에 섣불리 뛰어들었다간 격돌하는 에테르의 파장에 몸부터 갈기갈기 찢겨질 것이다.
이 대결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대결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물러서는 것.
다시 말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구건이의 얼굴이 한 층 더 흉포하게 변했다.
본래의 힘을 찾게 되어서 그런지, 동공에 자리 잡은 보라색 빛이 더욱 선명히 드러났다.
이쯤 되면 슬슬 인간과 몬스터의 중간 정도는 온 것 같은데.
구속구가 깨져 본연의 힘을 찾은 상태.
구건이와의 진짜 대결은 지금부터였다.
파악.
보란 듯이 ‘통곡의 벽’을 꺼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구건이가 먼저 선공을 가했다.
본래 탱커는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타입.
그러나 앞서 육철완을 상대했던 것처럼, ‘변화’가 시작된 구건이는 더 이상 ‘탱커’만으로 구분 지을 수 없었다.
화악!!
머리통보다 더 큰 손아귀가 잡아 뜯을 듯 얼굴을 향해 날아온다.
구속구가 없어졌으니, 육철완에게 달려들었을 때보다 속도가 훨씬 빨랐다.
관중석에서 비명이 막 터져 나올 무렵.
나는 ‘독보’를 Lv2로 끌어올렸다.
휘익.
커다란 손이 얼굴 대신 빈 허공을 가른다.
아무리 ‘호신강기’가 있다고 하나 저 공격을 정통으로 맞는다면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
‘엇……!’
공격이 빗나가기 무섭게 구건이가 몸을 틀어 다시 이쪽으로 도약한다.
신체의 구조상, 아니 일반적인 관성의 법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수준.
구건이의 몸놀림은 이미 상식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나고 있었다.
‘이대로는 당한다.’
예상하고 있던 공격이 아닌 터라 순식간에 거리를 내어 주고 말았다.
이번에야말로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구건이가 입을 벌리고 어금니를 드러냈다.
부웅.
하나.
이번에도 구건이는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원래부터 없는 곳으로 주먹을 뻗었다고 해야 할까.
“어?!”
“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니야, 제대로 봤어. 나도 방금 천해선이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했거든……!”
적중을 확신했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갈 때의 황당함.
예전에 내가 지었던 표정이 구건이에게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환격(幻格).
염동력이 없다면 본질을 파악하기 힘든 격투술.
수많은 나이트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그 기술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수준이었다.
“잔재주를 부리기는……!!”
구건이가 이를 갈며 땅을 박찼다.
하나 잔재주라고 부를 만큼 공략하기 쉬운 기술이 아니다.
염동력이 있어도 그 본체를 쫓기 힘든 마당에, 능력이 없는 이에게는 눈을 감고 날짐승을 잡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과거 유지원에게 환격을 사용하지 않은 건 공격이 먹히지 않아서가 아니라, 뒤에 마리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여라도 놈이 공격 방향을 바꿔 그녀를 공격한다면 큰일이니까.
하지만 지금 구건이의 목표는 오직 나뿐이다.
끊임없이 나만을 노리고, 끊임없이 공격에 실패한다.
부웅!!! 휘익!!
반면 내가 가하는 공격은 고스란히 구건이의 전신에 날아가 박혔다.
퍽!! 쿵!! 콰직!!
한쪽은 일방적으로 피하고, 한쪽은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불공평한 공방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S’랭커라 한들 그 또한 탱커.
과거 구건이와 강현과의 전투가 그랬듯, 단순 탱커가 ‘다중 능력’ 타입을 상대하는 것은 이다지도 불공평한 일이다.
“크아아아아!”
구건이의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급기야 괴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내가 가하는 물리 공격이 그다지 강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 아무리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처맞기만 한다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터.
한쪽 방향으로만 가해지는 폭격에 구건이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그러나,
퍽!! 퍽!! 쿵!!
‘환격’을 쓸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기량 차이는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가 없다.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구건이의 몸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게 보인다.
타격도 타격이지만, 애당초 구건이가 새로 익힌 ‘저 능력’은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쓰면 쓸수록 상태가 병신이 된다는 걸 나와 마리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끝낼 때가 됐나.’
비틀거리는 구건이를 바라보며 팔에 찬 프라셀에 기운을 불어 넣는다.
“저건……!!”
결승전까지 오르면서 매번 사용하는 무기다 보니, 이제는 관중들도 알아보는 것 같다.
스치기만 해도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드는 흰색의 칼날, 백몽.
이제는 구건이를 쓰러트릴 시간이 왔다.
물론 아직 분이 다 풀린 건 아니다.
그러나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이곳 랭킹전에서 구건이를 죽여 버릴 수는 없다.
처음부터 구건이에게 질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 없다.
내 나름대로 화풀이를 좀 하고 싶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백몽’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꼴을 보아하니 폭주할 수도 있겠어.’
만에 하나라도, 구건이가 유지원처럼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면 영 피곤해진다.
내 쪽이 아니라 관중석으로 달려들면 인명 피해는 자명한 일이다.
스르륵.
50cm 정도로 돋아난 백몽의 칼날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그 아름다움에 대부분은 탄성을 터트렸지만, 눈앞의 대상은 오히려 길길이 날뛰었다.
“크아악!!”
처음으로 구건이에게서 섬뜩함을 느꼈다.
기세가 흉흉해서라기보다, 이제는 몸의 움직임이 완전히 유지원처럼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려 보니 마리아의 얼굴 또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휘리릭.
‘환격’을 이용해 구건이의 공격 궤도에서 벗어난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놈의 팔다리가 애먼 곳을 연신 휘두른다.
이대로 구건이의 뒷덜미에 ‘백몽’을 박아 넣으면……!
콰악!!
“?!”
막았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휘두른 내 공격을 구건이가 한쪽 팔로 막아 내었다.
‘……어떻게?’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구건이가 맹렬한 기세로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고, 나는 환격을 펼친 채 몸을 앞으로 굴렀다.
촤악.
서걱.
짜릿한 감각이 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역시, 우연이 아니었어.
이번에도 놈이 내 본체를 감지한 것 같다.
갑자기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나, 구건이가 ‘환격’에 적응하고 있었다.
이대로 전투가 길어지게 되면 내게 정타를 꽂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결정적으로 큰 차이가 하나 있었으니, 이쪽은 아주 작은 상처만으로도 승부를 결정 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뚝…… 뚝…….
백몽의 칼날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진다.
서로 격돌하는 와중에 출수(出手)를 한 건 놈뿐만이 아니다.
구건이의 옆구리에 생긴 자상.
나 또한 ‘백몽’으로 놈에게 유효타를 먹인 뒤였다.
털썩.
“크르르…….”
구건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한쪽 무릎을 꿇는다.
블랙 에테르를 원료 삼아 만든 것이니만큼, 백몽 또한 거역할 수 없는 진한 성분을 가지고 있다.
제아무리 치유력이 강한 힐러라 할지라도 백몽 한 방이면 코를 골고 자빠지는 마당에, 탱커인 구건이가 버틸 리가 없었다.
쿵.
강제로 감기는 눈꺼풀에 저항하려 해 보지만, 놈의 머리는 이미 바닥에 박혀 있었다.
나는 백몽을 거두어들인 후 활성화했던 에테르를 거두어들였다.
땅에 머리를 박은 헌터와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헌터.
누가 보더라도 승자는 자명한 일이었다.
진행자가 마이크를 부여잡고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이번 대결의 승자!! 그리고 이번 랭킹전의 우승자는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스스스…….
스스슷……!!
휘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
진행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나타난 세찬 회오리가 스튜디오를 휘젓기 시작했다.
‘뭐지?’
예민해진 오감이 알람처럼 경고 메시지를 보낸다.
이 바람과 기운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단순히 바람이라고 하기에는 그 움직임이 너무나 작위적이었다.
휘오오오오오오오오오.
“우아앗!!!”
바람의 세기가 터무니없을 만큼 강해진다.
관중들이 엉겁결에 서로의 몸을 붙잡을 만큼, 회오리의 기세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무대 중앙에 나타난 잿빛의 회오리.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니, 특정한 색깔이 회오리 표면에 비친다.
‘보라…….’
유지원의, 그리고 구건이의 변화에서 나타났던 불길한 색깔.
보랏빛이 진득한 회오리 속에서, 인간의 형상을 닮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