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찰칵찰칵찰칵찰칵.
촤라라라라락!
금발의 화려한 미녀를 향해 수많은 플래시 세례가 쏟아진다.
얼음장같이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했지만, 사실 사일리아의 마음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 나에게 이런 걸 시키다니.’
총재를 ‘의심’한 것과 그것이 ‘사실’로 드러난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래더의 배신이 사실로 밝혀진 그 순간, 사일리아 또한 형용할 수 없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얼떨결에 수락한 것일지도 모른다.
천해선이 부탁한, 배신자의 뒤처리를 말이다.
“지금부터 천해선과 잉센, 그리고 스틸 실드에서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야차의 이름을 숨긴 것과 스틸 실드의 이름을 제일 마지막에 호명한 것.
그건 사일리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어쨌거나 그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래더 총재를 무릎 꿇릴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를 어지럽히는 셔터음과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기자들을 보며 사일리아는 욕지거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천해선에게는 부족하고 사일리아에게는 넘쳐흐르는 것.
그건 바로 ‘공신력’이었다.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 믿기지 않을 때, 사람들은 ‘메신저’를 의심하기 마련이다.
그런 측면에서 사일리아는 이 일에 제격인 헌터였다.
성격에 다소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대중들은 그녀가 거짓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천해선과 잉센은 일곱 번째 마인을 제거함은 물론, 장기간 인류의 눈과 귀를 속였던 래더 총재의 배신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저희 스틸 실드는 래더 총재가 은밀하게 진행했던 역사 왜곡, 자금의 비정상적인 유출, 억울한 누명 등을 추가적으로 밝혀냈습니다. 가장 큰 누명을 뒤집어쓴 인물은…….”
사일리아가 눈을 빛내며 그녀의 이름을 밝혔다.
“키릴입니다.”
“!!!”
장내에 소란이 일순간에 멎을 만큼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인류를 배신하고 초월급 헌터를 도륙했다 전해진 키릴이 사실은 누명을 쓴 것이었다니.
사일리아는 담담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발표를 이어 갔다.
“키릴은 ‘기타 능력자’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특수한 타입입니다. 일명 ‘포이즈너’라 불리며, 인간을 키메라로 변화시키는 암흑 물질에 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10년 초월급 헌터들이 키메라로 변했을 때 멀쩡할 수 있었습니다. 키릴은 이미 마물로 변해 버린 헌터들을 벨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그 이후에 그녀에게 가해진 처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키릴은 인류를 배신한 헌터다.
세뇌에 가까울 만큼 모두에게 각인된 이야기였다.
“현재 키릴의 행방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 있을 두 번째 전쟁을 준비할 수도 있지만, 인류에 환멸을 느끼고 영영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이 모든 사항은 래더 총재의 자백을 기반으로 했음을 밝힙니다. 이후의 처분은 헌터 감시청이 아닌 정부 기관에 맡길 생각입니다. 헌터 감시청에서 원치 않는다면,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해도 좋습니다.”
그럴 염치가 있다면 말이지.
사일리아가 이 순간만큼은 조소를 머금었다.
헌터 감시청은 글자 그대로 헌터들의 부패를 감시하고 감독하는 국제기관이었다.
하지만 WHPO의 총재를 헌터 감시청이 수사한다는 건 쥐가 고양이를 취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게다가 더 중요한 건, 그들에게는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10년간 총재가 뒤로 허튼짓을 하고 돌아다녔는데, 감시청은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말이다.
“저를 포함한 스틸 실드는 앞으로도 미국 시민들, 나아가 인류를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합니다. 총재의 배신은 뼈아프지만, 인류는 처음으로 마인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WHPO에서는 하루빨리 래더 전 총재와 함께했던 배신자들을 숙청하고, 새로운 리더들을 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 * *
“총재에 입후보를 한다고?”
흐뭇한 얼굴로 기자 회견을 바라보던 천해선 일행의 입이 떠억하니 벌어졌다.
아니, 방향이 왜 거기로 튀는 건데?
“어쩐지 순순히 허락한다 싶더니마는…….”
잉센이 쓰게 웃으며 자신의 비어 있는 휑한 정수리를 긁적였다.
“한국에는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이 있어. 사일리아의 목표 중 하나였다면서? 총재 자리.”
“맞아 해선. 분명 그랬지. 하지만 이렇게 빨리…….”
“타이밍은 이른 감이 있지만 분명 어울리는 느낌이 있어. 리더십, 카리스마, 그리고 희생정신도 있지. 그녀에게 부족한 건 나이…… 정도라고 해야 하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해선과 달리, 잉센은 입맛을 다셨다.
“쉽지 않을 거야, 해선. WHPO 조직에도 엄연히 파벌이 존재하니까. 반면 사일리아는 혈혈단신으로 싸워야 할지도 몰라.”
“글쎄. 사일리아가 못 이길 내기를 할 것 같지는 않은데.”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야?”
“래더 총재의 배신을 발표한 것만으로 사일리아는 대충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될 거야. 던전과 게이트에서는 이상 현상이 늘어나고, 마인의 침략은 이제 카운트다운에 들어섰지. 난세에는 영웅이 필요한 법이야, 잉센.”
“그 영웅이 사일리아라는 거야?”
해선, 네가 아니고?
잉센의 표정은 꼭 그렇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난 감투에는 관심 없어. 그랬다면 진작에 이레귤러가 아니라 특정 길드에 가입했겠지.”
“……그런가.”
잉센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그러나 해선은 깍지 낀 양손에 뒷머리를 대며 너스레를 떨 뿐이었다.
“그림 좋잖아. WHPO의 총재로 부임하는 젊고 아름다운 금발의 초월급 헌터.”
“……말을 말아야지.”
“나는 나대로 할 일을 하면 돼. 나처럼 감투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저기 자고 있는 사람도 그중 하나인가?”
잉센이 턱짓으로 한 마리 야수를 가리켰다.
“커어.”
스틸 실드가 제공해 준 전용기 안에서, 야차가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글쎄…… 저건 좀 애매한데.”
키메라를 한꺼번에 다섯 마리나 불러냈으니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네크로맨서 야차는 코를 고는 것은 물론 침까지 흘려 가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 암시장의 정점에 오를 리는 없을 터.
천해선은 분명 야차에게도 남다른 과거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과거의 연장선이 자신과 닿아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야차가 이레귤러로 편입될 가능성은 없을 거야.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지시를 따를 타입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게다가 이레귤러 안에는 비수가 있어. 악연은 예전에 끝났지만, 그렇다고 비수가 야차를 호의적으로 생각할 리 없지.”
비수의 입가에 난 상처를 금영화로 치유해 준 것도 야차고, 정작 그 입을 찢어 버린 당사자도 야차다.
비수에게 있어서는 복잡한 심경일 것이다.
잉센이 창밖을 내다보며 솔직한 감상을 표했다.
“이런 마음을 가져도 될까 싶은데, 꽤 여유롭고 편하네. 지금쯤 미국은 난리가 났을 텐데.”
“그렇겠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래더를 심판하려면 어지간히 시끄러울 거야. 게다가 새로운 총재가 되기 위해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이겠지. 사일리아가 했던 것처럼.”
“키릴도 분명 사일리아의 영상을 봤겠지?”
“그러길 바라야지.”
이것으로 조금은 은혜를 갚았다고 봐도 될까?
천해선은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품었다.
생명의 은인이자, 정글에서 살아날 방법을 하나하나 가르쳐 준 스승.
천해선에게 키릴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특별한 존재였다.
‘어디에 있는 걸까? 함께 힘을 합치면 사정이 조금 나아질 텐데.’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온 억울한 누명이 풀렸다.
그리고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키릴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키릴은 세상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릴지도 모른다.
입장 바꿔서 생각을 해 보자.
키메라가 된 초월급 헌터들이 영물과 수호령을 죽이고 아니마 꽃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데, 그걸 가만둘 수 있겠는가.
죽을 힘을 다해 키메라를 비롯한 마물을 죽이고 간신히 현실로 돌아왔더니, 돌아오는 것은 배신자라는 오명과 수배령이라니.
어쩌면 지금까지 온건한 멘탈을 유지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키릴의 행방은 같은 파이브 사이더스조차 모르는 거야?”
“응. 우리는 각자가 허용하는 정보만 공유할 뿐이야. 공개되기를 원하지 않는 정보를 강요하지 않아.”
“쓸데없이 평화적이네. 그건 그렇고…….”
천해선이 조금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잉센에게 물었다.
“잉센. 넌 왜 다시 한국으로 가는 거야?”
“으, 응?”
예상외의 질문에 잉센의 똘똘한 눈이 크게 떠졌다.
“넌 프라이스 길드의 리더면서 파이브 사이더스의 일원이잖아. 파이브 사이더스야 그렇다 치고, 이렇게 오래 길드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야?”
서열 일곱 번째의 셉티뭄을 처치하고, 사실상 빈사 상태로 만들었다.
또 래더 총재의 배신을 확인하고 그 추한 비밀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사실상 천해선 일행이 미국으로 가기 전에 계획했던 거의 모든 것을 이뤄 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센은 스틸 실드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야…… 당연하잖아, 해선.”
잉센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정 관리를 했다.
하지만 천해선의 예민한 감각은 그의 목소리가 다소 흔들리고 있음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아직 우린 마인들의 비밀을 파헤치지 못했어. 셉티뭄의 샘플을 분석할 수 있다면 차후에 마인들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래? 흠.”
천해선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투명한 용기를 내려다보았다.
특별히 가공 처리를 한 샬레 안에는, 작고 가느다란 유기체가 미약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이것 때문만인가?”
천해선이 악동 같은 얼굴로 시선을 잉센에게 옮겼다.
마치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모습에, 잉센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 그렇다니까. 지금 이것보다 더 중요한 연구가 어디 있겠어?”
“하나 더 있지. ‘식물 소년’이라는 연구 대상이.”
“!”
얼어붙은 잉센의 얼굴을 보면서 천해선은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을 품었다.
과학자들의 호기심은 일반인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한다.
대중들은 잉센이 ‘초월급 헌터’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지만 줄곧 옆에서 지켜본 바, 잉센은 ‘헌터의 탈을 쓴 과학자’라는 표현이 훨씬 적합해 보였다.
안 그래도 ‘식물 소년’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반짝반짝하는데, 새롭게 영계에서 가져온 식물로 실험을 해 본다 하니 그 호기심이 오죽하겠는가.
“딱히 숨길 필요 없어, 잉센. 정현이가 매력적인 연구 대상이라는 건 나도 충분히 알고 거든. 편집증에 시달리던 진 박사마저 밖으로 나오게 만들 정도니까.”
“그…… 건 그렇지만…….”
잉센은 함께 전장을 돌아다녔던 강정현을 연구 대상으로 여기는 게 내심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진 호기심을 완벽하게 지우지는 못했다.
과학자란 참으로 웃기는 사람들이다, 라고 천해선은 생각했다.
“뭐. 네 말대로 이 녀석을 분석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
천해선이 다시 손바닥 위의 샬레를 바라보았다.
과연 이 생명체가 그렇게 잔학무도한 짓을 한 게 맞는지 싶을 만큼,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유기체였다.
인간계에서조차 넘쳐흐르던 마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사실상 아무런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는 상태.
하지만 이 녀석이 앞으로 있을 마인과의 전투에서 단서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곧 있으면 도착이네.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식물 소년을 만날 수 있겠어.”
“해선. 지금 날 놀리는 거지? 굳이 이름 대신 그렇게 부르는 걸 보면.”
천해선은 모처럼 큰 소리로 낄낄거렸다.
전쟁통 속에서 잠시 즐기던 망중한은 끝났다.
천해선은 셉티뭄이 담긴 샬레를 안주머니에 조심하게 집어넣은 뒤,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