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86
정도마신 85화
현종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현종이 두 노승을 사부가 아니라 사승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소림 수호승이라는 직책 때문이었다. 소림 수호승은 소림사 전체를 위해 존재하기에, 사사롭게 한 명의 사부를 갖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종이 어려서부터 그들에게 무공과 세상의 많은 가르침을 받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나 다름없는 두 노승의 입에서 세상에 유일무이한 친우의 단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현종은 어떤 임무나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을 느끼거나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이때 사완악은 현종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고, 현종이 고개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현종의 심각한 얼굴과 달리, 사완악은 그를 보고는 씩 웃음을 짓는 것이 아닌가?
“한판 붙어야 되는 상황인가?”
“완악……!”
“현종, 네 사부는 사대악인이 아니라 소림사야.”
두 명의 노승과 십팔나한들은 사완악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사대악인의 제자와 소림사의 제자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법이므로.
하지만 그 순간, 현종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아……!’
사람들은 사완악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종은 사완악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완악이 만약 나였다면……!’
사완악의 사부는 사대악인이었다.
만약 그들이 사완악에게 현종을 해하라고 명령했다면, 사완악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사부들의 말을 간단히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종의 사부는 소림사였다.
그곳에는 수많은 규칙과 율법, 엄격한 관계가 존재한다.
사완악의 말에는, 만약 자신이었다면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서운함과, 그럼에도 현종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런 선택을 해도 자신에 대한 배신은 아니라는 두 가지 뜻이 함께 담겨 있는 것이었다.
현종은 사완악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완악은 아무 말없이 서 있었고, 마치 현종의 선택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이때 현종은 사완악의 옆에 서서 뒤를 돌아 두 노승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완악은 제 막역한 친우입니다.”
두 노승의 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뜻이냐?”
현종이 말했다.
“저는 제 벗을 돕겠습니다.”
십팔나한의 표정에 미미한 변화가 일어나고, 두 노승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현종!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현종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소림사로 돌아가 방장 사형 앞에서 책임을 지겠습니다.”
“정신 차리거라, 현종! 그가 익히고 있는 무공은 네 사조를 죽인 자가 훔쳐 간 무공이다! 너는 소림 수호승으로서 마땅히 그 무공을 거둬야 함이니라!”
“소림 수호승의 사명은 오직 소림사의 안전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갈! 너는 지금 사부들의 명령을 어기겠다는 것이냐!”
“제게는 사부님이 없습니다. 두 분은 제게 소림의 무공을 선대로부터 전해 주신 사승님입니다.”
“현종!”
두 노승은 분노한 음성을 토해 내며 현종을 노려봤다.
하지만 현종은 공손한 자세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때 키 큰 노승이 근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돕는다 한들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십팔나한진이 어떤 진법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현종은 노승의 말이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십팔나한진은 소림사의 침입자를 대비한 진법이다.
하지만 애초에 수많은 은거 고수가 존재하는 용담호혈의 소림사에 침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즉, 십팔나한진은 다수 대 다수가 아니라, 오직 한두 명의 절대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연구하고 만들어진 진법이었다.
심지어 현종에게 수많은 소림사의 절학을 알려 준 두 노승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현종은 사완악을 한 차례 바라보고, 다시 정면을 보며 말했다.
“쉽진 않을 거다. 아니, 아주 어려운 싸움이 될 거다.”
사완악이 말했다.
“그래 봐야 단전만 부순다잖아. 죽을 일도 아닌 것을.”
“하하, 그래. 죽을 일도 아니었군.”
이 순간, 두 사람은 마음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들은 이 싸움이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두렵거나 걱정되지 않았고, 소림사의 십팔나한진이 아니라 온 무림이 앞을 가로막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것은 혈기왕성한 청년들의 기개(氣槪)였고, 서로 목숨을 걸 수 있는 전우(戰友)가 있는 사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패기였다.
-완악, 손속에 사정을 둬 주길 부탁한다.
사완악의 귓가에 현종의 전음이 들렸다.
현종이 아무리 사완악을 돕는다 해도 같은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살초를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완악은 현종이 굳이 전음으로 이야기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어떤 마음가짐인가는 전투에서 많은 영향을 주는 법이었다.
소림사의 십팔나한 입장에서 만약 사완악이 살수를 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더욱 거세게 몰아붙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완악은 현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자신을 정파인들을 죽이는 살인마로 만들려던 천기자의 계획은 절대 따를 생각이 없는 사완악이었다.
-걱정 마. 그럴 생각도 없었으니까.
사완악의 대답을 들은 현종의 몸에서 지금까지 다른 무인들의 포위망을 뚫고 내려올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남다른 기도에 두 노승의 안색은 돌처럼 굳어졌다.
“네가 정녕…….”
현종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두 노승의 얼굴에는 충격과 분노가 교차했다.
자신들이 키운 제자가, 불구대천 원수의 제자를 돕는 것이 아닌가.
“일이 끝나면 돌아가 사죄하겠습니다.”
현종은 다시 한번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키 큰 노승의 입에서 마침내 명령이 떨어졌다.
“저들을 제압하라!”
두 노승은 뒤로 빠져 진법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열여덟 명의 나한들은 두 손으로 봉을 잡아 앞으로 찌르듯 내세우고 양발을 앞뒤로 벌려 낮춘 자세로 서서히 걸어왔다.
사완악과 현종은 십팔나한이 만든 원의 중심에 있었으니, 팔방에서 열여덟 개의 목봉이 서서히 숨통을 조이듯 다가오는 것이었다.
사완악은 그 모습을 보며, 서로 등을 맞대고 선 현종에게 물었다.
“그래서 십팔나한진의 약점이 뭐지?”
“딱히 없다.”
“뭐?”
“십팔나한진은 그물 같은 진법이다.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보완하여 뚫리지는 않고, 상대를 공격할 때는 매우 절묘한 합격술로 촘촘하고 넓게 다가와 빠져나가기 어렵게 만든다.”
물론 십팔나한진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었다.
공격당하는 한쪽을 모든 주변에서 돕는 방법이기 때문에, 다수 대 다수의 전투에서는 큰 효용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완악과 현종에게 지원군이 생길 리 만무하니 소용없는 말이었다.
“아니, 그럼 어떻게 싸우려고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거야?”
“내가 언제 자신만만해했지?”
“태도가 완전히 자신만만했잖아! 난 당연히 믿는 구석이 있는 줄 알았지.”
“매우 어려운 싸움이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불가능한 싸움이라고 했어야지, 이 미련한 땡중아!”
“어차피 죽을 일도 아니라더니, 이제 와서 겁이 나는가?”
“야, 인마! 너야 두들겨 맞고 끝나겠지만, 나는 단전이 부서진다니까! 내공으로 사람의 단전을 부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얼마나 아플지 상상도 안 된다고! 명색이 부처님을 모시는 것들이 어떻게 저리도 극악무도할 수 있지? 너 누구보다 저 진법에 대해 잘 안다며? 빨리 약점 좀 생각해 내라.”
현종은 사완악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로서는 진법의 약점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까지 완벽할 수는 없겠지.”
사완악은 현종의 말을 알아들었다.
진법 자체의 약점이 아니라, 그것을 시행하는 십팔나한진을 노려야 한다는 것이다.
현종이 다시 말했다.
“십팔나한진의 완벽함은 그 다양하고 유연한 대응에서 나온다. 당연히 높은 집중력과 숙달된 기술이 필요하지. 물론 십팔나한은 눈을 감고도 진법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수련을 거듭하지만, 사람에게는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사완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마디로 실수할 때까지 계속 두들기라는 거군. 무식하다, 무식해.”
두 사람이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사이, 십팔나한진은 어느새 삼, 사 장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때 십팔나한 중 한 승려가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외쳤다.
“불- 광- 계사(佛光懲邪)!”
부처의 빛이 삿된 마음을 징계한다.
불광이라는 단어는 천지에 길게 울려 퍼졌고, 계사라는 단어는 칼을 내려치듯 단호하게 떨어졌다.
현종이 나지막이 말했다.
“온다!”
그와 동시에 십팔나한의 봉이 팔방에서 쏟아졌다.
하늘에서 땅으로 번개처럼 떨어졌고, 어깨와 가슴, 옆구리를 찔러 왔으며, 수평으로 낮게 깔려서 낙엽을 쓸어버리듯 발목을 후려쳐 왔다.
다행인 점은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있어서 후방을 서로에게 맡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완악과 현종의 손에서도 무공이 펼쳐졌다.
현종은 넓은 어깨와 긴 팔을 휘두르며 장법을 펼쳤다.
강맹하면서도 신속한 장력이 사방으로 쏘아지며 날아오는 봉들과 격돌했다.
사완악은 파신마장이나 환요검이 아니라 유풍유권을 펼쳤다.
십팔나한진이 다수가 소수를 상대하기 위한 진법이라면, 유풍유권은 최소한의 힘으로 많은 공격을 막아 낼 때 유용한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완악은 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기 때문에 최대한 힘을 비축할 필요가 있었다.
유풍유권의 이화접목(梨花接木)의 묘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십팔나한의 봉들이 방향이 꺾이며 서로 얽혀 들었다.
땅땅땅땅!
목봉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십팔나한진의 공격은 마치 벌 떼가 함께 하나의 목표를 노리는 것처럼, 하나의 봉이 튕겨 나가면 바로 다른 하나의 봉이 허점을 찔러 왔다.
현종과 사완악이 강한 힘으로 맞받아치면 뒤로 물러나며 힘을 흘려 보냈고, 그 무너진 틈을 다른 나한이 나타나 메우는 형식이었다.
사완악은 현종이 십팔나한진을 일컬어 그물 같다고 한 이유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방어는 여럿이 함께하고, 공격은 서로 나누어 순환하니 끊김이 없었다.
또한 십팔나한들 역시 소림사에서 뛰어난 무재를 가려 뽑은 자들인 만큼, 사완악의 수법에 익숙해지면서 강공(强攻)보다는 지공(遲攻)으로 바꾸어 오히려 사완악을 지쳐 가게 만들었다.
‘중놈들은 다들 머리가 좋은가? 이대로 가면 끝이 없겠다.’
사완악은 자신의 가슴 중앙을 회전하며 찔러 오는 봉 끝을 빠르게 잡아 돌려 다른 나한의 공격을 막아 낸 다음, 허리의 보검을 뽑아 환요검법의 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환요검법의 괴랄하면서도 신묘한 초식들이 번쩍이자 십팔나한들은 조금 당황한 듯 주춤하며 두 사람이 방어하던 것을 네 사람이 방어해야만 했다.
사완악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또 하나의 무공을 섞어 주었다.
바로 엉뚱하고 예측불허한 면으로는 환요검법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는 광대권법이었다.
본래의 사완악이라면 장난으로 만든 이 권법을 지금처럼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나, 태산에서 암습자와의 싸움에서 얻은 깨달음은 그런 고정관념을 버리게 만들었다.
‘도대체 저게 무슨 권법이란 말인가?’
그것은 이 싸움을 진법 밖에서 지켜보는 두 노승의 표정에서도 나타났다.
무공의 고수라고는 전혀 볼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움직임.
하지만 그 가운데서 피어나는 신묘한 검초들.
십팔나한진의 손발이 조금씩 급해지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완악은 현종에게서 한 가지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